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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은행나무, 2016

햇살처럼-이명우 2025. 1. 22. 07:31

674.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은행나무, 2016

Henry Dabid Thoreau(1817.7.12.~1862.5.6.  45세) 결핵으로 사망.
  메사추세츠주 콩코드 출생.  하버드 대학을 졸업. 부와 명성을 쫓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않고 측량일이나 목수일 등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을 썼다. 1845년(28세) 그는 월든 호수가의 숲 속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모든 점에서 소박하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시도한다. 소로우의 대표작 <월든>은 이 숲 생활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숲생활의 기록이 아니라, 자연의 예찬인 동시에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며,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한 자주적 인간의 독립선언문이기도 하다.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여 수감되었던 사건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권력의 의미를 깊이 성찰한 그의 또다른 저서 <시민불복종>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책으로 꼽히고 있다.

     시 한 줄을 장식하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차례
1. 숲 생활의 경제학
2. 나는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3. 독서
4. 숲의 소리들
5. 고독
6. 방문객들
7. 콩받
8. 마을
9. 호수
10. 베이커 농장
11. 보다 높은 법칙들
12. 이웃의 동물들
13. 집에 불때기
14. 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겨울의 방문객들
15. 겨울의 동물들
16. 겨울의 호수
17. 봄
18. 맺는 말

  불멸의 영혼을 지녔다는 인간들이 가엽게도 등에 진 짐의 무게에 눌려 깔리다시피 한 채, 길이 75피트, 폭 40피트의 곡식 창고와 청소를 하지 않아 아마게아스 왕의 외양간 만큼이나 더럽기 짝이없는 외양간과, 100에이커나 되는 토지와 밭, 목장과 숲을 앞으로 밀고가면서 힘든 인생의 길을 걷는 것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유산을 물려받지 않아 그런 불필요한 짐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자그마한 육신 하나의 욕구를 다스리고 가꾸는데도 힘겨워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조만간 땅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필요성이라고 불리는 거짓 운명의 말을 듣고는 한 옛날 책의 말처럼 좀이 파먹고 녹이슬며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 끝날 무렵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인생이다.

  지금은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노예 주인들이 수 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감독(공장 주인)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감독일 때이다.

  들에 단비를 내려줄 구름으로 믿었던 것이 한낱 견해(見解)라는 이름의 연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날 지 모른다. 노인네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일도 여러분은 시도해서 이루어내고 있지 않은가?
  나이 많음이 젊음 보다도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이 먹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생이라고 하는 내가 그 대부분을 겪어보지 않은 하나의 실험이 있다. 인생의 선배들이 그것을 이미 겪었다는 것이 내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어떤 가치있는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나에게 조언해 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는 회상을 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잠시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떤 날씨건 낮과 밤의 어떤 시간이건, 나는 그 시점을 최대한 선용하고 나의 지팡이에도 새겨놓으려고 했다.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개의 영원이 만나는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서서 줄을 타듯이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해가 뜨는 것을 실제로 돕지는 못했지만 해가 뜨는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니었던가?
  얼마나 많은 가을날과 겨울날을 마을 밖에서 보내면서 바람 속에 들어있는 소식을 들으려고 했으며, 또 그 소식을 지급(至急)으로 전하려고 했던가!

  얼마 전에 한 인디언 행상이 우리 마을에 사는 유명한 변호사의 집으로 바구니를 팔러 왔다. "바구니를 사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아니오. 살 생각 없습니다."라는 것이 대답이었다. "뭐요? 우리를 굶겨 죽일 생각이오?" 하고 나가면서 그 인디언은 외쳤다. 자기 주위의 부지런한 백인들이 모두 잘 사는 것을 보고, 특히 변호사는 변론을 엮어내기만 하면 무슨 마술처럼 재물과 지위가 뒤따르는 것을 보고 이 인디언이 생각했던 것이다. 나도 사업을 시작해야지. 바구니를 짜야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니까. 그 인디언은 바구니를 만들어 놓으면 자기 일은 끝나고, 바구니를 사는 것은 백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남이 살만한 바구니를 만들든가, 최소한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든가 또는 살 가치가 있는 어떤 다른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하나의 바구니, 올이 섬세한 바구니 하나를 엮어 놓았으나 그것을 남이 살만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 경우에 그 바구니는 엮을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남이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팔지않아도 될 것인가를 연구했다.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 단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 가지 삶을 과대평가 하는 것일까?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 테스트로 나의 친지들을 시험해본다. 즉 당신들 중의 누가 무릎 위를 깁거나 또는 두번 박음질을 한 옷을 입어볼 용기를 가졌느냐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옷을 입으면 자신의 앞날이 망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떨어진 바지를 입기 보다는 차라리 다리가 부러져 절룩거리며 걷는 것을 택할 것이다. 한 신사의 다리에 사고가 생기면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그 비슷한 사고가 그의 바지가랭이에 생기면 치료방법이 없다. 그는 무엇이 진실로 존경할만한 것인가 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염두에 둔다.
  우리는 사람은 알지 못하나 외투나 바지는 무던히도 많이 알고 있다. 당신이 마지막 입었던 옷을 허수아비에게 입혀 놓고 그 옆에 알몸으로 뱅충맞게 서 있어보라. 그러면 누구나 곧바로 허수아비에게 먼저 인사를 할 것이다. 요전날 나는 어느 옥수수밭을 지나가다가 나무 말뚝에 모자와 외투를 입혀 놓은 것을 보고 그 밭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았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개는 낯선 사람이 옷을 입고 주인집 가까이 오면 짖어댔으나 발가벗고 침입한 도둑에게는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옷을 벗겨버렸을 때 어느 정도까지 각자의 상대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 경우 당신은 가장 존경받는 계급에 속한 일단의 문명인들을 틀림없이 가려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옷이 아무리 남루하고 더럽더라도 새옷을 사서는 안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처신해오고, 일을 해오고 또 항해(航海)를 해온 결과 스스로 헌옷을 걸친 새사람처럼 느끼고, 그래서 더 이상 헌옷을 계속입으면 낡은 병에 새 술을 담는 것처럼 느낄 때 까지는 말이다.

  나는 오늘날의 영국을 무척이나 많은 짐들을 끌면서, 여행하고 있는 노신사로 보고 있다. 이 짐들은 오랜 살림살이로 누적된 잡동사니들인데 그는 이것들을 태워버릴 용기가 없는 것이다. 큰 가방, 작은 가방, 판지 상자, 보따리 등. 제발 앞의 세 가지 만이라도 버리도록 하세요, 영감님!
  자기 침대를 메고 걷기란 젊고 건강한 사람도 힘에 겨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픈 사람에게 침대를 버리고 달려가라고 충고하고 싶다. 나는 한번은 갓 이민온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이 든 보따리를 메고(그 짐은 마치 목덜미에 난 엄청나게 큰 혹처럼 보였는데)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동정의 염(念)을 금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그가 가진 것의 전부라서가 아니고 그가 너무 큰 짐을 메고 가야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덫 하나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면 나는 되도록 가벼운 것을 고를 터이고, 그 덫에 내 급소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아니, 애당초부터 덫에 손발을 넣는 짓은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 지 모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젊은이는 목수나 농부나 선원이 되어도 좋으니,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못하도록 하는 것만은 제발 삼가고록 하자. 항해하는 사람이나 도망 노예가 항상 북극성을 지켜보듯이 우리는 어떤 수학적인 점에 의해서만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선행을 베풂으로서 자기가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려고 했던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은 하루 동안 태양의 전차를 빌려 탔으나, 궤도를 벗어나는 바람에 하늘나라의 아래쪽 거리에 있던 여러 마을을 불사르고 지구의 표면을 그을렸으며, 모든 샘물을 마르게 하고 거대한 사하라 사막을 생기게 했다. 마침내 제우스 신이 번개로 내리쳐서 그를 지구로 추락하게 했고, 태양은 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1년 동안 빛을 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변질된 선행에서 풍기는 악취처럼 고약한 냄새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당신이 어떤 자선행동을 하게 되었다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다음에는 묵묵히 구두끈을 매라. 숨을 돌린 다음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어떤 자유로운 일에 착수하라.

  "사람들이 현자에게 묻기를, 지고한 신이 드높고 울창하게 창조한 온갖 이름난 나무들 가운데, 열매도 맺지 않는 삼나무를 빼놓고는 그 어느 나무도 '자유의 나무'라고 불리지 않으니 그게 어찌된 영문이나이까? 현자가 대답하기를, 나무란 저 나름의 과일과 저마다의 철을 가지고 있어 제철에는 싱싱하고 꽃을 피우나,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드는도다. 삼나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항상 싱싱하느니라. 자유로운 자들, 즉 종교적으로 독립된 자들은 바로 이런 천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칼리프들이 망한 다음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뚫고 길이 흐르리라. 그대가 가진 것이 많거든 대추야자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라. 그러나 가진 것이 없거든 삼나무처럼 자유인이 될지어다." <굴리스탄>, <화원>, <장미원>으로 번역되는 페르시아 최고 문학작품의 하나. 페르시아 시인 사아디. 1258년작.

  나는 종종 시인이 어느 농장의 가장 값진 부분을 즐기고 물러나는 것을 보는데, 이때 무뚝뚝한 농부는 그 시인이 야생사과 몇 개를 따갔으려니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 농부는 시인이 그의 농장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훌륭한 울타리는 운율 안에 옮겨놓고, 거기에 가둔 채 젖을 짜고 지방분을 걷어낸 다음 크림은 전부 떠갔으며 자기에게는 찌꺼기 우유만 남겨 놓았다는 것을 몇 해를 두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농장에 얽매이든, 군(郡) 형무소에 얽매이든, 얽매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 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내일의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

  하루를 자연처럼 의도적으로 보내보자. 그리하여 호두껍데기나 모기날개 따위가 선로 위에 떨어진다고 해서 그 때마다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든 또는 거르든 차분하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자. 손님이 오든 또는 가든, 종이 울리든, 아이들이 울든, 단호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하자. 왜 우리가 무너져 내려 물결에 떠내려 가야 하는가? 정오의 얕은 모래톱에 자리잡은 점심이라는 이름의 저 무서운 격류와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자. 이 위험을 이겨내면 당신은 안전한대로 들어서게 된다. 나머지는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지말고 아침의 기백을 그대로 가지고, 율리시스처럼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외면을 하면서 그 소용돌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만약 기적이 울면 목이 쉴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두자. 종이 울린다고 해서 우리가 뛰어갈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이것들이 내는 음악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뿐이다.  
  이제 침착하게 자리를 잡고 작업을 해보자. 그리하여 의견, 선입견, 전통, 망상(忘想)과 외양(外樣)이라는 이름의 진흙구덩이 속에 발을 넣고 아래로 뚫고 나가 지구를 덮고있는 충적층(沖積層)을 지나서, 파리와 런던, 뉴욕과 보스톤과 콩코드를 지나고 교회와 국가, 시와 철학과 종교를 지나서 마침내 우리가 "바로 이것이야! 여기가 틀림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바위 위에 닿을 때까지 내려 가보자. 이제 거점을 마련했으면 홍수와 서리와 불 아래쪽으로 성벽이나 국가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 장소, 안전하게 램프 기둥을 세울 수 있고 어쩌면 측량계기를 하나 달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보자. 이 측량계기는 '나일 강 계기'가 아니고 '진실의 계기'로서 이것을 보고 거짓과 허식의 홍수가 때때로 얼마나 깊게 범람했던가를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실과 직면하여 똑바로 선다면 마치 그것이 아랍인의 신월도(新月刀)이기라도 한 것처럼 태양이 그것의 양편에 번쩍임을 볼 것이고, 그 날카로운 칼날이 당신의 심장과 골수를 갈라놓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은 행복감 속에서 삶을 마치게 되리라. 죽음이든 삶이든 우리는 오직 진실만을 갈구한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앝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지성은 식칼과 같다. 그것은 사물의 비밀을 식별하고 헤쳐 들어간다. 나는 필요이상으로 나의 손을 바쁘게 놀리고 싶지 않다. 나의 머리가 손과 발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상의 기능이 머릿 속에 모여있음을 느낀다. 어떤 동물이 코와 앞발로 굴을 파듯 나는 내 머리가 굴을 파는 기관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나는 이 머리를 가지고 이 주위의 산들을 파볼 생각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노다지 광맥이 있는 것 같다. 탐지막대와 옅게 솟아오르는 증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자, 이제부터 굴을 파내려 가야겠다.    

  옛 고전을 원어 그대로 읽는 것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은 인류역사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할 수 밖에 없으리라. 왜냐하면 어느 고전도 현대어로 번역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문화적 유산과 고전보다도 훨씬 더 역사가 깊고 더 고전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나라의 경전들이 쌓이게 될 때, 또 바티칸 궁전 같은 곳들이 베다 경전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들, 기독교 성경과 같은 경전들과 호머, 단테,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들의 문학작품으로 함께 어우러져 채워질 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기가 각자가 거둔 전리품을 세계의 광장에 차례로 쌓아 놓을 때 그 시대는 진실로 풍요로운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산의 더미를 딛고서만이 인간은 마침내 하늘에 오를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지적 기능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하에 깨어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방식으로.

  귀족들 대신에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고귀한 마을을 건설하자.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 하나를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 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소박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진정 아끼는 만병통치약은 희석하지 않은 순수한 아침공기 한 모금이다.

  방문객들
  생활비를 버느라 자기의 모둔 시간을 다 뺏겨 여유가 없는 사람들, 신에 관한 화제라면 자기들이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말하며 다른 어떤 견해도 용납하지 못하는 목사들, 의사들과 변호사들 그리고 내가 없는 사이에 나의 찬장과 침대를 들여다보는 무례한 가정주부들, 안정된 전문직의 닦인 가도를 걷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린 더 이상 젊지 않은 젊은이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는 현재 나의 위치에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이와 성별을 망라한 이들 늙고 병들고 겁많은 사람들은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에 대해서만 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인생은 위험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나 위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있겠는가?) 그리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마을의 의사인 B씨가 달려올 수 있는 안전지대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상자 없이는 산딸기를 따러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아버지가 용감했던 만큼만 또는 겁쟁이였던 만큼만 용감성을 발휘하려고 한다.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숙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때로 깜깜하고 무더운 밤 늦게 보이지 않는 길을 발로 더듬으며 오면서 몽상에 빠지거나 다른 생각에 깊이 몰두할 경우에는 문의 걸쇠를 올리려고 손을 들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드는데, 이런 때는 내가 걸어온 길이 한 발자국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손이 아무 도움없이도 입을 찾듯이 내 몸도 주인이 버리더라도 집을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대 정치하는 사람들이여, 형벌을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이 덕을 사랑한다면 백성들도 덕을 사랑할 것이다. 윗사람의 덕은 바람과 같고, 평민의 덕은 풀잎과 같다. 풀잎은 그 위에 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다." <논어> 제12편 19절
  子, 爲政에 焉用殺이리오. 子, 欲善이면 而民이 善矣리니 君子之德은 風이요, 小人之德은 草라, 草上之風이면 必偃하나니라.(자, 위정에 언용살이리오. 자, 욕선이면 이민이 선의리니 군자지덕은 풍이요, 소인지덕은 초라, 초상지풍이면 필언하나니라.)

플린트 호숫가 어리석은 농부
  나는 그의 노동을 경멸하며 모든 것에 가격표가 매겨져 있는 그의 농장도 경멸한다. 그는 단 몇푼이라도 받을 수만 있으면 경치라도 아니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도 시장에 나가 팔려고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진짜 하느님은 시장에 있다. 그의 농장에서는 아무것도 공짜로 자라지 않는다. 그의 밭에서는 곡식 대신 돈이 자라며, 그의 꽃밭에서는 꽃대신 돈이 피어나며, 그의 과일나무들에는 과일 대신 돈이 열리는 것이다. 그는 과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으며, 과일이 돈으로 환금되기 전에는 완전히 익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화이트 호수와 월든 호수는 지상의 커다란 수정이며 빛의 호수들이다. 만약 이들이 영원히 응결되고, 훔칠 수 있을만큼 작은 것들이라면 아마 제왕들의 머리를 장식하는 보석으로 쓰기 위하여 노예들이 캐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호수들이 액체상태인데다 그 양이 풍부하여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히 확보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코히누르의 다이아몬드'를 뒤쫓는다. *1850년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소유가 된 커다란 다이아몬드

  식욕과 상관없는 식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나는 정신적인 지각이 천박한 미각에 힘입고 있다는 점, 내가 미각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 왔다는 점, 그리고 언덕에서 따먹은 산딸기가 나의 천재성을 키워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 공자는 "마음이 자체를 거느리지 못하면 거느리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대학> 제7장2절)"고 말했다.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폭식을 하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폭식가임을 면할 길이 없다.  

  시의원 나리가 바다거북요리를 대할 때 갖는 탐욕스러운 식욕은 한 청교도가 통밀빵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발견될지 모른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천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을 때 탐욕스러운 식욕이 그를 천하게 하는 것이다. 음식의 양이나 질이 문제가 아니고 감각적인 풍미에 빠지는 자세가 문제이다. 먹는 음식이 우리의 동물적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 우리의 정신적 삶을 고무하는 양식이 되지 못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벌레들의 양식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가 호수에 관하여 관찰한 것은 인간의 심성도 똑같이 통용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평균의 법칙인 것이다. 두 개의 지름을 이용한 그러한 규칙은 우리를 태양계 안의 태양으로 인도하고 사람 몸 안의 심장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한 사람의 매일매일의 모든 행동과 그의 삶의 물결을 뚫고 그의 작은 만과 내포에 이르는 데까지 종횡으로 선을 그을 것이며, 두 선이 만나는 곳에 그의 심성 가장 높은 부분과 깊은 부분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얼음은 흥미로운 명상의 대상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시 호수 옆의 얼음 창고에는 5년이나 된 얼음이 있었다고 하는데 갓 잘라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한 통의 물은 금새 물맛이 변하는데 일단 얼면 언제까지나 싱싱한 것일까? 흔히하는 말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애정과 지성의 차이점이라고 한다.

  마침내 햇살은 직각을 이루고 따뜻한 바람은 안개와 비를 몰고 와서 눈 덮힌 둑을 녹인다. 안개를 흩어버리는 태양은, 향을 피우듯이 김이 모락모락 오른 적갈색과 흰색이 교차된 풍경 위에서 미소짓고 있다. 졸졸 흐르는 수많은 실개천과 개울의 음악에 흥에 겨운 나그네는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뛰어 건너며 이 풍경 속의 길을 간다. 개울들이 혈관에는 겨울의 피가 가득차서 떠내려 가고 있다.

  부드러운 이슬비가 한 번 내리면 풀밭은 한층 더 푸르러진다. 우리 역시 보다 훌륭한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전망도 훨씬 밝아지리라. 우리가 항상 현재에서 살면서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진 한방울의 작은 이슬도 놓치지않고 받아들여 커가는 풀잎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과거에 놓쳐버린 기회에 대해 속죄하는 것으로(그것을 우리는 의무의 수행이라고 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복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의사는 현명하게도 공기와 장소를 바꿔볼 것을 권한다. 여기 이곳 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기러기는 인간들보다 더 세계인에 가깝다. 그는 캐나다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은 오하이오 강에서 먹으며, 밤에는 남부지방의 늪에서 날개를 가다듬고 잔다. 들소마저도 어느 정도는 계절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가 콜로라도 강변의 초원에서 풀을 뜯는 것은 옐로스톤 강변의 풀이 좀 더 푸르러지고 먹음직스럽게 되어 그를 기다릴 때 까지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농장의 나무 울타리를 헐고 돌담이라도 쌓으면 그 후로는 우리의 인생의 한계가 그어지고 운명이 결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 마음속에 여태껏 발견 못하던 천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 곳을 답사하라.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되라."

  사회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의무는 아니다. 자기 내부의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견지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특정한 길을 밟게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내가 숲속에 산지 일주일이 채 안되어 내집 문간에서 호수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인해 길이 났다. 내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은지 5,6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길의 윤곽은 뚜렷이 남아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밟아 길로서 유지되게 했나보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개는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이다. 자기가 왜소한 피그미족에 속했다고해서 가장 큰 피그미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가서 목을 매야 한단 말인가?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일에 열중하며, 타고난 천성에 따라 고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의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이며 멋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소로우
1817년 7월 12일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가내 수공업 연필 제조업
1833년(16세) 하버드 입학, 동서양 고전 광범위한 독서
1834년(17세) 후일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이 될 초월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 콩코드로 이사옴. 소로우 보다 14살 많음.
1837년(20세) 에머슨의 수필집 <자연>을 읽다. 하버드 졸업. 콩코드로 돌아와 교사로 취직.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거부하고 사직. 아버지 연필공장에서 일하며 일기를 쓰기 시작함.
1845년(28세) 월든 호숫가 통나무집 짓기 시작. 3월말부터 시작하여 7월4일 완공. 입주.
1847년(30세) 9월. 월든 숲생활 끝내다. 장기간 유럽 여행을 떠나는 에머슨의 저택에 관리인으로 들어가다.
1848년(31세) 캘리포니아에서 대량의 사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되다. 에머슨의 집을 나와 프리랜스 측량사업 시작.
1861년(44세) 펴결핵 판정. 11월3일자 일기가 마지막 기록이 되다.
1862년(45세) 5월6일 아침 9시 콩코드에서 사망. 병문안 갔던 한 친구는 "그처럼 큰 기쁨과 평화스러움을 가지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말하다.

2023년6월24일 토요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