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연금술사, 2023.
최종덕 본부장이 소개해준 책이다.
차례
지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 류시화
1. 인간 의식의 피어남_우리는 지금 진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 인간에게 상속된 기능장애/ 새로운 의식의 등장/ 영성과 종교/ 변화의 절박함/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2. 에고, 인류의 현재 상태_내 안의 인류로부터의 자유
환상의 자아/ 머릿속 목소리/ 에고의 내용물과 구조/ 물질과의 동일화/ 잃어버린 반지/ 소유라는 환상/ 욕망- '더 많이'를 향한 욕구/ 육체와의 동일화/ 내부의 몸 느끼기/ 존재의 망각/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사르트르의 통찰까지 /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
3. 마음이 만드는 드라마_에고를 초월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것들
불만과 분함/ 맞대응과 원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리게 만들기/ 환상이 자신을 방어한다/ 진리-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전쟁은 마음의 방식/ 평화와 드라마 중 어느 것을 원하는가/ 에고를 넘어-진정한 정체성/ 모든 구조물은 불안정하다/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에고의 욕구/ 에고와 명성
4. 역할 연기_에고의 여러가지 얼굴들
나쁜 사람, 피해자, 연인/ 자기 규정 내려놓기/ 미리 정해진 역할들/ 일시적인 역할들/ 손에 땀이 난 선승/ 역할로서의 행복과 진정한 행복/ 부모-역할인가 기능인가?/ 의식적인 고통/ 의식이 깨어있는 부모/ 아이의 존재를 알아보기/ 역할 연기의 포기/ 병적인 에고/ 배경에 있는 불행/ 행복의 비밀/ 에고의 병적인 형태들/ 에고를 가지고 일하기와 에고없이 일하기/ 병과 에고/ 집단적인 에고/ 불멸의 결정적 증거
5. 고통체_최고의 예술은 과거를 내려 놓는 것
감정의 탄생/ 감정과 에고/ 오리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과거를 업고 다니기/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고통체가 자신을 재생시키는 방법/ 생각을 먹고 사는 고통체/ 드라마를 좋아하는 고통체/ 단단한 고통체/ 오락과 언론과 고통체/ 여성의 집단적인 고통체/ 국가와 인종의 고통체
6. 감옥으로부터의 탈출_고통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들
이 순간에 존재함/ 고통체의 돌아봄/ 아이들의 고통체/ 불행/ 고통체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기/ 고통체를 촉발시키는 것들/ 나를 깨우는 고통체/ 고통체로부터의 자유
7. 형상의 꿈에서 깨어나기_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 풍요로움/ 자신을 아는 것과 자신에 대해 아는 것/ 무질서와 더 높은 질서/ 좋은 것과 나쁜 것/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가?/ 에고와 현재의 순간/ 시간의 역설/ 시간의 제거/ 꿈꾸는 자와 꿈/ 한계를 넘어/ '있음'의 기쁨/ 에고의 작아짐/ 겉에서도 안에서도
8. 내면의 공간 발견_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
대상의식과 공간의식/ 생각 아래로의 추락, 생각 위로의 올라감/ 텔레비전과 의식/ 내적공간의 인식/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가/ 올바른 행동/ 이름 붙이지 않고 인식하지/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호흡/ 중독/ 내부의 몸 알아차리기/ 내적공간과 우주공간/ 틈 알아 차리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기/ 고요
9. 삶의 목적에서 깨어나기_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인가
깨어남/ 내면의 목적에 관한 대화
10. 새로운 지구_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삶의 간단한 역사/ 깨어남과 회귀운동/ 깨어남과 외부로 향하는 운동/ 의식/ 깨어있는 행동/ 깨어있는 행동의 세가지 방식/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새로운 의식의 담당자/ 새로운 지구는 이상향이 아니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에고라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나'를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 안의 존재이다. 게다가 에고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무엇인가에 자신을 동일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무엇인가'는 앞서 말한 것들 외에도 지위나 명예, 신앙, 고급 브랜드의 상품, 외모 등등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과 동일화되든 에고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계속 동일화 될 외부의 대상을 찾아다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에고가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에 눈을 뜨는 일이다. 나의 생각, 감정, 감각, 경험은 내가 아니다. 그저 존재함의 기쁨이 곧 나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규정짓는 것을 중단하라. 그래도 당신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면, 깨어있는 고요 속에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모든 창조물, 모든 생명 형태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만물 속에 내재해 있는 순수의식 또는 영(靈)을. 그럼으로써 그것을 자신으로서 사랑하게 된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류라는 집단의 정상적인 상태가 '원죄'이다. '죄'라는 단어는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고대 희랍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투르고 눈먼채로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을 겪고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축적물과 잘못된 해석들을 걷어내면 '죄'는 인간의 조건 속에 내재한 기능장애를 가리킨다.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동료 인간들의 손에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한 숫자는 1억명이 넘었다. 스탈린, 히틀러, 크메르루즈, 스페인 내전 등.
인간 존재의 핵심에 존재하는 집단적 광기가 가져오는 사건들이 인류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광기의 역사다. 만일 이것이 한 개인의 병력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진단이 내려졌을 것이다.
'만성적 피해망상증. 적이라고 굳게 믿는, 사실 적이라는 것은 그 자신의 무의식의 투영에 불과하지만, 상대방을 향한 병적인 살인 충동과 극도의 폭력과 잔인성, 가끔씩 잠깐 동안 제정신이 돌아올 뿐인 범죄광!'
구약과 신약성서 모두에 등장하는 예언은 지금까지의 세계질서 붕괴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출현을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1절,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없어졌더라.' 이사야 65장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여기서 하늘이 공간적인 장소가 아니라 내면의 의식 영역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그 단어의 비전적 의미이며,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의미이다. 한편 땅은 그것이 형상으로 나타난 외부세계를 의미한다. 외부세계는 언제나 내적(內的)세계의 반영이다.
인류의 집단의식과 이 행성 위에서의 삶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하늘'은 변화된 인간 의식상태의 등장이며, '새로운 땅'은 그것이 물질세계에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인간의 삶과 의식은 지구의 삶(생명)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낡은 의식이 소멸하면 그것에 공명해 많은 곳에서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대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가 저절로 나타난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려 낙담하고 화난 여성환자에게,
"그럼,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 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각각의 질문을 한 후에 잠깐씩 멈추겠습니다. 대답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 대답이 말의 형태로 올 필요는 없습니다. "
그녀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결국, 그것도 아마 가까운 시일 안에, 그 반지를 내려놓기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그것을 내려놓으면 자신이 더 작아지나요? 그 손실로 인해서 당신의 존재가 줄어드나요?"
마지막 질문 후에 몇 분간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다.
"마지막 질문이 나로 하여금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했어요. 먼저 내 마음에게 그 답을 물었지요. 마음이 말하더군요. '맞아, 당연히 나는 작아졌지!' 그래서 다시한번 그 질문을 했어요. '나는 정말로 줄어들었나?' 이번에는 생각으로 대답을 찾지않고 느껴보려고 했어요. 그러자 갑자기 나 자신의 '순수한 있음(Being)'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어요. 만약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순수한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어요. 평화로우면서도 매우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내가 말했다.
"그것이 존재의 기쁨입니다. 머리에서 벗어날 때만 느낄 수 있습니다. 존재는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에고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반지는 사실 하나의 생각으로 당신의 머릿속에 있었고, 당신은 그것을 자신의 존재 또는 그 일부가 반지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고가 추구하고 집착하는 것은 에고가 느낄 수 없는 존재의 대용품입니다. 물건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집착을 느끼면 그것이 에고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당신은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들어가 있는 '나', '나를',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그 때마다 당신은 에고를 넘어서 갈 수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의 존재 즉, 의식 자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야 지금까지 아무리해도 알 수 없던 '누가 네 겉옷을 달라고 하면 너의 속옷까지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은 결코 문에 자물쇠를 잠그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때로는 사물을 내려놓는 것이 지키거나 매달리는 것 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라는 뜻입니다. "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만큼 에고를 강화시켜주는 것은 없다. 옳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 의견, 판단, 이야기 등과 같은 정신적 입장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틀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바꿔말해, 자신의 더 강한 자아의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틀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강화시킨다.
진리-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진리는 자신들 쪽에만 존재한다는, 다시말해 자신들만 옳다는 믿음은 행동과 행위를 광기 수준으로까지 전락시킨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자체가 여실히 보여준다. 종교는 몇 세기 동안이나 자신들이 내린 교리와 성서 - 혹은 '진리' - 의 좁은 해석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자가 있으면 고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그런 행동은 옳으며, 그 이유는 희생자들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은 너무도 틀리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진리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그 '진리'란 무엇인가? 당신이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 즉 한 묶음의 생각이다.
캄보디아의 미치광이 독재자 폴 포트가 죽이라고 명령한 백만명의 사람들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왜인가? 폴 포트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이 절대 진리였으며, 그 절대진리의 포 포트 해석에 따르면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지, 농민의 착취자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폴 포트가 주장한 그 진리도 단지 한 묶음의 생각에 불과했다.
대립하는 당사자들은 어느쪽이든 자신들이 관점, 자신들의 이야기와 동일화되어 있다. 즉, 자신들의 생각과 동일화되어 있는 것이다. 양쪽 모두 자신들과 다른 관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 역시 타당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언론인 요시 할레비는 '대립하는 이야기의 조정'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세상의 많은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럴 의지도 없다.
대립하는 어느 쪽이든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철저히 믿는다. 양쪽 모두 자신들은 희생자로, 상대방은 악의 무리로 간주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적으로 개념화 해왔기 때문에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까지 온갖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인간적인 마음의 고통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공격과 보복, 받은 만큼 되받아친다는 광기어린 악순환에 빠져있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집단 측면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에고는 '나'라는 개인적인 에고와 그 작용방식은 동일해도 훨씬 더 광기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서로에게 가한 폭력의 상당수는 범죄자와 정신이상자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극히 '정상적인' 훌륭한 시민이 집단적 에고에 봉사하며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행성에서는 '정상'이라는 것이 '정신 이상'과 동일한 의미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 정신이상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각과 감정과의 완전한 동일화, 즉 에고이다.
탐욕, 이기심, 착취, 잔인함, 폭력이 여전히 이 행성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것이 마음 밑바탕에 있는 기능장애 혹은 정신적 질환의 개인적, 집단적 표현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개념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들은 이런 인간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 안에서 인식하는 에고를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혼동할 때, 이러한 오해를 자기 강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당신의 에고가 흔히 하는 일이다. 자신이 옳고, 그러므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으로 인식되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비난과 분개와 종종 분노로 반응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에고에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상대방이 분리된 존재라는 의식이 강해지고 상대방의 '타인성'이 점점 극대화되어, 상대방이 자신과 공통된 인류라고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뿐더러, 인간 존재로서 공유하고 있는 '한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도, 공통된 신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다.
에고는 '나'라는 자아의식을 부여받아 반복해서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과 조건지어진 정신적 감정적 패턴들의 복합체이다. 에고는 무형의 의식인 '나의 있음(I am)' 즉 '순수한 있음(Being)'이 형상과 뒤섞일 때 생겨난다. 이것이 동일화의 의미이다. 이것이 존재의 망각이며, 근본적인 실수이고, 존재가 개별적인 형상들로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다. 이것이 현실을 악몽으로 바꿔놓는다.
스스로에게 자아의식을 주기위해 개념적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짓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면 혼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망했어"는 하나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당신을 한정짓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는다. "통장에 달랑 500원 밖에 남아있지 않아."는 하나의 사실이다. 사실과 대면하면 반드시 힘이 솟아난다.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되는 대신,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야 한다.
행복을 찾아다녀서는 안된다. 찾아다닌다는 것은 행복의 안티테제(헤겔의 변증법에서, 첫번째 단계를 부정하는 둘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교묘히 달아나지만,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대신, 있는 그대로와 마주함으로써 가능하다. 불행은 진정한 행복의 원천인, 심신의 조화와 내적 평화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숨겨버린다.
역할을 연기하지 않을 때는 당신이 하는 일에 자아, 즉 에고가 없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지키거나 강화하려는 제2의 안건이 없다. 그 결과 당신의 행동은 훨씬 강력한 힘을 갖는다. 당신은 상황에 온전히 집중한다. 그 상황과 하나가 된다. 당신은 특별히 어떤 사람이 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완전하게 자기 자신일 때, 당신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이다.
에고는 상황 그 자체와,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나 반응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말 지독한 날씨야."라고 말하는 당신은 추위, 비, 바람, 그 밖에 당신이 반응하는 상황이 '지독한'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 날씨는 그냥 날씨일 뿐이다. 지독하다는 것은 당신의 반응이고, 날씨에 대한 당신 내면의 저항이며, 그 저항이 만든 감정이 지독할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뿐' (햄릿의 대사). 게다가 고통과 부정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까지는 에고의 강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에고는 종종 그것을 쾌감으로 오인하기까지 한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한 가운데서 "이 순간 나는 스스로 고통을 만들고 있다."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건지어진 에고의 상태와 반응의 한계 너머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것은 알아차림으로써 찾아오는 무한한 가능성을 당신에게 열어줄 것이다. 그 때 어떤 상황도 다룰 수 있는 훨씬 더 지성적인 방식들이 열린다. 자신의 불행이 지성적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 불행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 상태는 지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에고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왜 나는 지금 평화로울 수 없는가?"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평화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지금 이 순간 밖에 없음을 에고는 알지 못한다. 설령 알고 있더라도 당신이 그것을 알아낼까봐 두려워한다. 결국 평화는 에고의 종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때 당신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나는 언젠가 에고로부터 자유로와 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에고이다. 에고로부터의 자유는 사실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깨어있는 '바라봄'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에고의 두려움 대신 불신, 그리고 상대방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정체성으로 만드는데 집중함으로써 상대방의 '다름'을 강고하는 에고의 성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을 비인간적인 괴물로 만든다. 에고는 존재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타인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딜레마가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말은 에고의 절규이다. 그 지옥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하는 것은 피해망상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지만, 에고의 패턴이 작용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똑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당신 안의 에고가 강하면 강할수록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도 힘들게 만들 가능성은 더욱 높다. 물론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피해망상증이라고 부르는 이 정신질환은 또 다른 증상을 드러낸가. 물론 이 증상은 모든 에고가 가진 특징이며, 피해망상증에서는 그것이 더 극단적인 형태를 취할 뿐이다. 자신이 박해받고 있고, 감시받고 있으며,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환자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것이 자기 둘레를 돌고 있다는 믿음이 더 강해진다. 그리고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자신은 더 특별하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긴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박해받는 희생자라는 믿음으로 자신이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망상의 기본을 이루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종종 자신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악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세계 구원 능력을 가진 영웅의 역할을 배정한다.
개인과 집단과 국가가 무의식상태에 있으면 있을수록 에고의 병적 증상이 물리적 폭력이라는 형태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폭력은 원시적이지만, 에고가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이 옳으며 상대가 틀림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방법으로서 지금까지도 널리 퍼져있다. 무의식이 강한 사람들의 경우, 논쟁은 쉽게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한다. 논쟁이란 무엇인가?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의견을 표현하고 그 의견이 다른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의견을 만들어낸 생각들과 너무나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생각들은 자아의식이 부여된 정신적 입장으로 굳어진다. 바꿔말하면 정체성과 생각이 하나로 녹아있다. 일단 이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방어하려고 할 때 늘 자기자신을 방어하는 것처럼 느끼고 그렇게 행동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느끼고 그렇게 행동하며, 따라서 나의 감정들과 그 무의식적인 믿음을 반영한다. 그렇게 되면 사나워질 수 밖에 없다. 기분 나빠하고, 화내고, 방어적이고, 공격적이 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소멸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환상이다. 생각과 정신적 입장이 자신이 누구인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에고는 알지 못한다. 에고는 관찰되지 않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선(禪)에서는 "진리를 추구하지 말라. 다만 자신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멈추라."라고 말한다. 마음과 동일화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 너머의 '나는 누구인가'가 저절로 모습을 나타낸다.
집단적인 에고도 개인적인 에고와 똑같은 성격을 나타낸다. 갈등과 적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이' 요구하며, 틀린 상대방에 맞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집단은 조만간 다른 집단과 갈등을 빚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무의식적으로 갈등을 추구하고, 자신들의 경계선을 정하고,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립할 상대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에고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라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은 머릿 속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믿고 반응한다. 이 반응이 감정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감정이, 감정을 발생시킨 그 생각들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것이 점검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의 악순환이며, 그것이 감정적인 생각과 감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에고가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감정들은 이미 그것들 안에 반대의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순식간에 그 반대의 것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에고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유욕과 중독된 집착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는 미래를 향한 에고의 과대평가이기 때문에 그 일이 끝나버리거나 에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쉽게 그 반대의 낙담과 실망으로 변한다. 칭찬과 인정은 하루 동안 당신에게 활력과 행복을 느끼게 하지만, 다음 날 받는 비난과 무시는 낙담과 불행을 선사한다. 광란의 파티가 주는 쾌락은 이튿날 아침 허무함과 숙취로 변한다. 나쁜 것이 없는 좋은 것은 없으며, 낮은 곳 없는 높은 곳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에서 나는 두 마리 오리의 싸움을 관찰한 경험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오리의 싸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금세 헤어져 각자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간다. 그런 후에 두 마리는 몇 차례 격렬하게 날개를 털어, 싸우는 동안 쌓인 나머지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 후 날개를 접고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물 위를 떠간다.
만약 오리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오리는 생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그 싸움을 계속 할 것이다. 오리는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저 놈이 저런 짓을 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저 놈은 나는 안중에도 없이 내 옆구리 바로 근처까지 밀고왔어. 이 연못이 자기 것인줄 아나? 내 개인적 공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저런 놈은 다시는 믿지 말아야 해. 나를 약올리려고 다음에는 어떤 계략을 꾸민지도 모르는 놈이야. 이미 뭔가를 꾸미고 있는게 분명해. 하지만 이쪽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두번다시 잊을 수 없도록 단단히 가르쳐 줘야지."
이런 식으로 마음은 언제까지고 이야기의 물레를 돌리면서 며칠, 몇달뿐 아니라 몇년 동안이나 계속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몸에 관한 한 그 싸움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이러한 생각들에 반응해 발생하는 에너지가 감정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감정이 더 많은 생각을 만들어내며, 이것이 에고의 감정적인 생각이 된다. 만약 오리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문제가 많을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상황도 사건도 결코 진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낸 '나와 나의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종이다. 자연 속 모든 존재들, 모든 꽃과 나무, 모든 동물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멈춰서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오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날개를 털어라" 그것을 해석하면, "이야기를 내려놓으라"이다. 그리고 힘을 가진 유일한 장소로, 즉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라.
과거의 사건들은 기억으로 당신 안에서 계속 살아가지만, 그 기억자체는 문제가 안된다. 그 뿐 아니라 기억 덕분에 과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기억, 즉 과거에 대한 생각에 당신이 완전히 지배되고 그것이 짐으로 바뀔 때 비로소 기억이 문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당신의 자아의식의 일부가 될 때, 과거에 의해 조건지어진 성격이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당신의 기억들에 자아의식의 옷이 입혀지고,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나'가 되어버린다. 이 '작은 나'는 환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형상을 초월한 '현존'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흐려버린다.
인간에게는 오래된 기억을 지속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에너지장 안에 오래된 감정적 고통의 축적물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것을 '고통체(업장)'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고통체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하는 것은 멈출 수 있다. 오리가 날개를 털어버리듯이 오래된 감정을 축적하고 지속시키는 습관을 부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어제 일어난 일이든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든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과거에 머무는 것을 중단할 수 있다. 상황과 사건을 마음 속에 계속 살아있게 하고 머릿속 영화 만들기에 사로잡히는 대신, 자신의 관심을 본래의 상태, 즉 시간을 초월한 현재의 순간으로 계속해서 데려오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생각과 감정 대신 '이 순간에 존재함'이 우리의 정체성이 된다.
당신의 '이 순간에 존재함'을 가로막을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을 가로막을 수 없다면, 과거에 대체 어떤 힘이 있겠는가?
고양이와 함께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잘 알것이다. 고양이는 겉으로는 잠든 것처럼 보여도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안다. 작은 소리에도 고양이는 귀를 그쪽으로 향하고 눈을 가늘게 뜬다. 잠자고 있는 고통체도 마찬가지다. 어떤 차원에서는 고통체는 여전히 깨어있고, 적절한 계기만 주어지면 곧바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다.
인기있는 대중 신문들은 뉴스를 팔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시말해 고통체의 먹이를 파는 것에 중점을 둔다. 커다란 활자의 헤드라인에서 폭력과 범죄의 단어들이 난무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영국의 황색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이 점에서 탁월하다. 뉴스를 싣기 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채질하는 편이 신문 판매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그 관계자들은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전을 포함한 뉴스매체 전체가 부정적인 뉴스를 먹고 사는 경향이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아나운서와 사회자는 더 흥분하고, 언론매체 자체가 종종 부정적인 흥분을 부채질 한다. 고통체들은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여성 형태보다는 남성 형태 속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쉽게 성장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생각과 동일화되는 것이 덜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직감력이 생겨나는 셍체지성과 내면의 몸에 더 많이 연결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덜 단단한 껍질에 싸여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 형태들에 비해 더 많이 열려있고, 더 민감하며, 자연계에 더 많이 맞춰져 있다.
기록이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단 심문'에 의해 약 3백년 동안 3백만명 내지 5백만명의 여성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것은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인류사의 암흑의 장을 채우고 있는 사건 중 하나이다. 여성들은 다만 동물을 귀여워하거나, 혼자서 들판과 숲속을 걷거나 약초를 모은 것만으로도 마녀의 낙인이 찍히고,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심한 집단적 피해망상증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물론 남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메르 문명, 이집트 문명, 켈트 문명 등 기독교 이전의 많은 고대 문명들에서는 왜 여성이 존경받고, 여성원리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가? 갑자기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남성 안에서 발전한 에고이다. 에고는 남성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여성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시간이 가면서 에고는 대부분의 여성까지 점령해 버렸지만 남성의 경우만큼 뿌리깊은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우리는 여성성의 억압이 내면에서 진행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고, 에고는 인간 마음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가고 있다. 여성의 경우 에고는 깊이 뿌리내린 적이 결코 없기 때문에 남성보다고 여성에 대한 에고의 장악력이 더 빨리 약해져 가고 있다.
"아니요. 난 이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누구인가요? 당신인가요, 아니면 당신 안의 그 불행인가요? 불행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불행해지는 것 또한 불행을 쌓는 일이라는 걸 볼 수 없습니까?
그녀는 다시금 침묵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에게 지금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느낌들이 그 곳에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바꿔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불행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 불행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알고 싶지 않은가요?"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1분 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에너지 장에 갑자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말했다.
"이상하군요. 나는 여전히 불행하지만, 그래도 그 불행 주위에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예전만큼 그 불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불행 주위에 공간이 생긴다는 표현을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 공간은 현재의 순간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 생겨난다.
나는 그 이상은 많은 말을 하지않고, 그녀가 그 경험과 함께 하도록 해주었다. 자신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 느낌, 즉 오래된 고통의 감정과 동일화하는 것을 중단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생각의 지배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속에서 만든 '불행한 나'라는 이야기와도 더 이상 섞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녀 개인의 과거를 초월한 새로운 차원이, '현존'의 차원이 그녀의 삶 속에 들어온 것이다. 불행한 이야기가 없이는 불행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녀의 불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녀의 고통체에게는 종말의 시작이었다. 감정 그 자체는 불행이 아니다. 감정에 불행한 이야기가 더해질 때만 불행이다.
우리의 상담이 끝났을 때 나는 또 한 명의 인간 존재 안에서 '현존'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어 기뻤다. 우리가 인간 형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의식의 차원을 세상으로 가져오기 위함이다. 또한 고통체와의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의식의 빛을 가져옴으로써 그 고통체가 줄어드는 것도 나는 목격했다.
방문객이 떠나고 몇 분 뒤, 전달할 것이 있어 한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 무겁고 음울한 에너지가 느껴져. 토할 것만 같아. 창문을 열고 향을 피우는 게 좋겠어."
나는 방금 전 여기서 매우 단단한 고통체를 가진 사람에게서 에너지의 심각한 분출을 목격했으며, 지금 느끼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상담 도중 방출된 에너지의 일부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친구는 더 이상 들으려고도 머물려고도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떠났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으며, 그녀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인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생각도, 고통체의 먹이가 되는 감정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힘은 개입하지 않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부터 나왔다. '이 순간에 존재함(현존)'은 말이나 행동, 그 어떤 것보다 언제나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마음은 '이 순간에 존재함'을 이해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잘못 해석한다. 생각하는 마음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자비심이 없고, 관계를 멀리한다고. 그러나 사실은 생각과 감정보다도 더 깊은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차원이야말로 단지 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서 진정으로 함께함, 진정으로 하나됨이 가능하다. '현존'의 고요속에서 당신은 자신과 상대방의 형상을 초월한 본질을 하나로 감지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하나됨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돌봄이며, 진정한 자비이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 너 자신을 알라)'
신의 예언을 받는 장소인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 위에 새겨진 말.
이 문장이 암시하는 것은 이 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무의식적인 사람들은 - 많은 이들은 에고에 갇혀 무의식 상태로 평생을 보내는데 - 곧 바로 자신이 누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름은 무엇이고, 직업은 무엇이며, 이러이러한 인생을 보냈고, 몸은 어떻고, 건강상태는 어떠하다며 자신이 동일화되어 있는 모든 사항을 늘어 놓을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를 불멸의 영혼 또는 성스러운 영이라고 생각하는, 영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아니면 단지 영적으로 들리는 어떤 개념들을 마음의 내용물에 추가한 것일 뿐인가?
자기 사신을 안다는 것은 한 묶음의 사상이나 신념을 채택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는 일이다. 영적인 사상과 신념은 기껏해야 도움을 주는 방향 표지판일 뿐이다.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 더 단단히 뿌리내린,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핵심 개념들, 조건 지어진 인간 마음의 일부인 그것을 제거할만한 힘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마음 속에서 떠다니는 다양한 사상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누구도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수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는 것은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신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는 믿음이 필요치 않다. 사실 모든 믿음은 어느 것이든 장애물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심지어 깨달음 조차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 없이는 '진정한 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지 않고 묻혀있는 상태가 된다. 물론 그 묻힌 장소가 '진정한 나'가 있는 곳이다.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사실은 1억달러의 예금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그 막대한 부를 잠재 가능성으로만 남겨두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이 곳에서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 이 상황에 내가 도움이 될 구 있을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풍요를 느낄 수 있고, 늘 풍요를 느끼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당신에게로 온다. 풍요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불공평하게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풍요도 결핍도 내면의 상태이며,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이렇게 표현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혼동하지만 않는다면 심리분석도,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밝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5천쪽의 보고서는 당신에 '대한' 것이다. 과거에 의해 조건지어진 당신 마음의 내용물이다. 심리분석이나 자기 관찰을 통해 알게되는 것은 모두 당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마음의 내용물이지 당신 본질이 아니다. 에고를 뛰어 넘는다는 것은 내용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마음의 내용물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동일화를 멈추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는 일'이란 물론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이미 그러하게 그 곳에 존재하고 있다. '일어나는 일'은 내용물, 즉 이 순간이 취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이 순간 뿐이다.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무저항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 속에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류표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금이라도 순간과의 내적인 조화를 기초로 행동할 때 그 행동에는 삶 그 자체의 지성의 힘이 작용한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그렇게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 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이 시간에 얽매여 기능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순간에 대해 에고는 세 가지 방식으로 반응한다. -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반응하는 것, 장애물로 반응하는 것, 적으로 반응하는 것 - 이 세가지다.
에고에게 현재의 순간은 기껏해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쓸모가 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으로만 다가오며, 따라서 미래라는 것은 머릿속 하나의 생각 이상이 결코 아니다. 다시말해, 이 방식이 작용하면 당신은 언제나 어딘가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바쁘며, 결코 '지금 이곳에' 완전히 존재할 수 없다.
이 방식이 심해지면, 그리고 이런 일은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이 마치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지고 다루어 진다. 이때 초조함, 좌절, 스트레스가 일어나지만,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직 '지금'인 삶은 '문제'가 되고, 당신은 문제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삶을 시작할 수 없다. 혹은 그렇게 당신은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튀어 나온다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장애물로 보는 한, 문제의 끝이 있을 수 없다. 삶은, 즉 '지금'은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데로 나는 무엇이든 되어줄거야. 당신이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나는 당신을 대할거야. 당신이 나를 문제라고 보면, 나는 당신에게 문제가 되어 줄거야.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면 장애물이 되어줄거야."
가장 나쁜 경우는 , 이것 또한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거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난 일에 욕을 퍼부을 때, 혹은 마음 속 대화가 '해야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이루어져 있을 때, 비난과 남탓으로 흘러 넘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미 그것인 것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삶을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삶도 "싸움을 원하면 싸우게 해주지."라고 응답한다. 외부적인 현실은 늘 당신의 내면 상태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신은 당연히 적대적인 세계를 경험한다.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혹시 그것을 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현재의 순간만이 당신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삶은 '지금'과 분리시킬 수 없으므로, 그 질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인가?"
이 질문은 에고의 가면을 벗기고 '이 순간에 존재함(현존)'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다. 삶은 언제나 '지금'이다. 당신 삶의 모든 것이 이 끝없는 '지금'에서 펼쳐지고 있다. 과거나 미래의 순간들도 당신이 기억하거나 기대할 때만 존재하며, 그것도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인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그것을에 대해 생각할 때 가능하다.
그러면 왜 많은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것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 다시말해 내용물을 현재의 순간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공간을 그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혼동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내용물과 혼동함으로써 시간의 환상 뿐 아니라 에고의 환상도 생겨난다.
시간은 감각에 의한 인식을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목적에 없어서는 안될 마음의 구조물이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최대의 장애이다.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 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시간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는 것은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그의 눈이 무척 맑다는 것에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불행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저항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그는 있는 그대로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그리고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지우는 행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깊은 골짜기가 되라.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너에게로 흘러들어올 것이다. " - 도덕경, 노자 -
한 번의 호흡이 당신이 알아차릴 필요가 있는 전부이며, 당신이 진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전부이다. 나머지는 기억과 기대이다. 즉 생각이다. 사실 호흡은 당신이 아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이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당신에게 흡연, 과식, 음주, 과도한 텔레비전 시청, 인터넷 중독 같은 강박적인 행동패턴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해볼 수 있다. 강박적인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면 잠깐 멈추고 의식적으로 세 번 호흡한다. 그렇게 하면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현재 순간의 성공이란 무엇인가요?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하나의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조심성과 주의력, 즉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가지려면 '이 순간에 존재함'이 필요합니다.
상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의 예로서 일출과 일몰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에 태양이 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리지만 오직 상대적으로만 진리이다. 절대적인 관념에서는 틀린말이다. 땅 위나 지표면에 가까운 장소에서 관찰하는 사람의 제한된 시야에서 태양은 떠오르거나 진다. 그러나 우주로 나가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임을 알고 있어도, 우리는 일출이라고 말하고, 일몰이라고 말하며, 여전히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다.
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가? 늙은 나이가 되면 '행위' 보다 '있음'이 강조되는데, 우리 문명은 '행위'에 몰두해 순수한 '있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은 묻는다. 순수한 '있음'이라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인간의 뇌는 고도로 차별화된 형상이며, 이 형상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온다. 인간의 뇌에는 뉴런이라 불리는 약 천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이것은 우주의 뇌라고 볼 수 있는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숫자와 같다. 뇌가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물질 형태인 뇌를 만들어 낸 것이다. 뇌가 손상되었다고 해서 의식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이 이 형상 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 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당신은 의식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자신이 소유한 것만을 잃어버릴 수 있을 뿐이며, 당신 자신인 것은 잃을 수는 없다.
깨어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2024.1.3.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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