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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안티프래질(Antifragile),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와이즈 베리, 2019.

햇살처럼-이명우 2021. 4. 26. 20:52

627. 안티프래질(Antifragile),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와이즈 베리, 2019.

 

차례

1. 안티프래질 개론

  1) 다모클레스와 히드라

  2)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잉보상과 과잉반응

  3) 고양이와 세탁기

  4) 나를 희생시키는 것이 다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2. 근대는 안티프래질을 거부한다.  

  5) 수크와 사무실

  6) 내가 (어느 정도는) 무작위성을 좋아한다고 말하라.

  7) 어설픈 게입

  8) 예측, 근대의 산물

3. 예측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

  9) 뚱보 토니와 프래질리스타

  10) 세네카가 말하는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

  11) 록스타와 결혼하지 마라.

4. 옵션의 특징, 기술,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닌 기능

  12) 탈래스의 달콤한 포도

  13) 새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치다

  14)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대상이 아닐 때

  15) 패자가 쓰는 역사

  16) 무질서가 주는 교훈

  17) 뚱보 토니 소크라테스와 맞장뜨다.

5. 비 선형성

  18) 바윗덩어리 1개와 작은 돌맹이 1000개이 차이

  19) 철학자의 돌과 그 반대

6. 비아 네가티바

  20) 시간과 프래질

  21) 의학, 볼록성, 불투명성

  22) 오래 살기 위해서, 그러나 너무 오래 살아서는 안된다.

7. 프래질과 안티프래질

  23) 승부의 책임 :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안티프래질과 옵션

  24) 윤리를 직업에 짜맞추다

  25) 결론

 

<바람을 사랑하는 法>

  바람은 촛불 하나는 꺼뜨리지만 모달불은 살린다.

무작위성, 불확실성, 카오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이 이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활용하기를 원한다. 불이 되어 바람을 맞이하라.

  우리는 불확실성을 다루면서 겨우 살아남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로마시대의 공격적인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불확실성에 살아남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려고 한다. 우리의 임무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불투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길들이고, 심지어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다.

 

<안티프래질>

  세상에는 충격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가변성, 무작위성, 무질서, 스트레스에 노출될 때 번창하고 성장하며, 모험과 리스크,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지만, 충격을 가하면 부서진다는 의미인 프래지질에 반대가 되는 단어는 없다. 이제부터 이런 단어를 '안티프래질(antifragile)' 이라고 부르자.

  안티프래질은 회복격 혹은 강건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회복력이 있는 물체는 충격에 저항하면서 원상태로 돌아온다. 반면, 안티프래질한 대상은 충격을 가하면 더 좋아진다. 이런 특징은 진화, 문화, 사상, 혁명, 정치시스템, 기술혁신, 문화적이거나 경제적인 성공, 기업의 생존, 훌륭한 조리법, 도시의 성장, 법률 시스템, 적도지방의 삼림, 박태리아의 저항, 심지어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모든 것들의 배후에 있다. 그리고 안티프래질은 인간의 몸처럼 살아있는 유기체(또는 복잡계)와 책상 위의 스태이플러처럼 생명이 없는 물리적 대상 간의 경계를 정해준다.

  안티프래질은 무작위성과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이는 일정정도의 오차를 좋아한다는 의미다. 나는 매우 똑똑하고 프래질하기 보다는 차라리 우둔하고 안티프래질 하기를 원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정 정도 스트레스나 가변성을 좋아하는 대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경제시스템, 인간의 몸, 영양(당뇨병을 비롯해 현대의 이와 비슷한 질병은 음식물 섭취의 무작위성의 결여나 간헐적 단식과 같은 스트레스의 결여와 관련이 있다). 정신이 그렇다. 심지어 안티프래질한 금융계약도 있다. 이런 계약은 시장의 가변성으로부터 이익을 얻도록 명시적으로 작성된다.

 

  프래질한 것들은 가변성을 싫어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명백한 특성이 과학과 철학의 담론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타협은 묵인과 같은 의미다. 내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근대 명언은 조지 산타야나(Geoge Santayana)가 했던 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실함을 가지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자유롭다."

  이것은 목표일 뿐만 아니라 의무가 되어야 한다.

 

  많은 사물이 스트레스가 일정 수준에 이를 때까지 안티프래질 하다. 우리 몸은 어느 정도 학대하면 더 좋아진다. 그러나 일정 정도까지만 그렇다. 바벨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리면 결코 더 좋아지지 않는다.

 

  옥스포드 사전에 fragile의 반대의미를 지니는 단일어가 없다.

 

  약리학자들은 소량의 독성물질이 실제로 인체에 유익한 약물로 작용하는 현상을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말한다. 즉 인체게 해롭기는 하지만 소량이라면, 과잉반응을 촉진하면서 대체로 유익하게 작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해로운 물질로부터 얻는 혜택'의 관점이 아니라, '해로움 혹은 약효는 복용량에 달려있다'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지금 과학자들은 복용량과 반응간의 비선형성에 흥미를 갖고 있다.

  옛날 사람들도 호르메시스를 잘 알고 있었다.(불루를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1888년이 되어 호르메시스를 최초로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독일의 독물학자 휴고 슐츠(Hugo schulz)였는데, 이때도 여전히 Hormesis라는 이름이 부여되지 않았다. 슐츠는 독성물질을 소량 투입하면 효모의 성장을 촉진하지만, 다량으로 투입하면 해롭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일부 과학자들은 채소의 장점을 우리가 비타민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다른 방식으로 합리화시킨 이론(다시말해서, 이야기 그 자체로는 타당성이 있어보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엄격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아이디어)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식물은 독성물질을 함유하는 식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다른 포식자들을 물리치는데, 우리가 채소를 적당히 섭취하면 이 물질이 우리 몸을 돋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독성물질을 소량 섭취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 

 

  지나칠정도로 규칙적인 식사는 우리 몸에 좋지 않다. 그리고 공복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느끼지 못하면 결국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호르메시스는 인간에게 적당한 음식과 굶주림의 관계를 재설정 해준다. 

  1930년대 이후로 호르메시스는 과학적인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이를 동종요법(homeopathy)과 연관시켜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르메시스와 동종요법은 그 메카니즘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런 연관은 적절치 않다. 동종요법은 미세하고도 효력이 매우 약화된 병원체(지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작아서 호르메시스를 일으킬 수 없다)가 해당 질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요법은 경험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대체의학에 포함된다. 반면, 하나의 현상으로서 호르메시스의 경우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스트레스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반드시 좋을 결과를 만들지는 않으며, 명백하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혁신을 이루어 내는가? 먼저 절망적이지는 않더라도 심각하게 어려운 상황에 빠져보라. 나는 필요가 혁신과 발전을 낳는다고 믿는다. 이런 혁신과 발전은 초기발명 혹은 발명을 위한 시도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서 발생되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라틴어 속담에 "배고픔이 발전을 낳는다"라는 말이 있고,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는 "곤경은 천재를 일깨워준다."고 했다. 이 문장을 달리 표현하자면 '안좋은 일이 생기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이다.

  곤경에 반응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혁신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 메시지는 보기보다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수준의 혁신과 진보에 관한 현대적인 방법이나 생각과는 상충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혁신이 정부의 자금지원과 계획을 통하거나 혹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가르치는 유명교수(그는 무엇인가를 혁신시켜주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의 강의를 듣는데서, 또는 컨설턴트(그 역시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혁신시켜주는 사람이 아니다)를 고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산업혁명에서부터 실리콘밸리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교육받지 않은 기술자와 기업가들이 기술진보를 위해 엄청나게 공헌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내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마는 자기보다 열등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지고, 자기보다 더 우수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 요인이 없을 때(즉 호르메시스의 반대로서 도전정신이 결여된 상태일 때) 나타나는 보상부족(undercompensation)은 가장 뛰어난 경주마에게 최선의 결과를 주지 못한다. 프랑스의 시인 보를레르(Baudelaire)는 신천옹이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걸어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또 많은 학생들이 기본 미적분보다 심화미적분에서 더 좋은 점수를 얻는다.

  이런 과잉보상의 메커니즘은 가장 있을법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곤 한다. 장거리 여행 이후에 피로를 느낀다면, 휴식을 취하기 보다 헬스센터로 간다. 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사무실에서 가장(혹은 두번째로) 바쁜 사람에게 주는 것도 널리 알려진 방법이다. 시간이 남아돌면 게을러지고 동기를 잃게 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바쁠수록 다른 일도 능동적으로 처리한다. 과잉보상이 바로 이런 경우에 발생한다. 

 

  목소리는 서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피아의 거물처럼 가장 힘있는 사람은 조용하게 말한다. 강사는 청중이 열심히 듣도록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청중으로 하여금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집중의 역설은 어느 정도 확인된 바가 있다. '어눌함'이 갖는 효과가 이를 경험적으로 입증해준다. 이때 우리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두뇌를 더욱 활발하고 분석적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피터 드러커와 자크 라캉은 발음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하는 텔레비전 아나운서와는 대조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청중이 집중할 수 있도록 능숙한 쏨씨로 최면을 걸었다.

  우리가 소음이 약간 있을 때 더 잘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과잉보상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마치 소음에 대항해 집중력을 연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있더라도 우리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소음을 걸러내고 신호를 분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작은 요인들은 호르메시스적 반응(Hormatic response)과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에서만 효과가 있다.

 

  리스크관리 전문가는 과거를 통해 최악의 시나리오에 관한 정보를 얻고 이를 활용해 미래의 위험을 추정하는데 이런 방법을 '스트레스 테스팅(stress testing)'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최악의 불황, 최악의 전쟁, 최악의 이자율 혹은 최악의 실업율을 미래에 발생하게 될 최악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추정결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비일관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른바 최악의 상황은 지금까지 발생했던 최악의 상황을 능가한다는 점을 말이다.

  나는 이런 정신적 결함을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가 보았던 가장 높은 산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던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이름을 따서 '루크레티우스의 문제(the Lucretius problem)'라고 불렀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사람은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존재 가능한 가장 큰 대상으로 생각한다.

 

  정보는 안티프래질적 특성을 지닌다. 정보는 알리려고 할 때 보다 덮으려 할수록 널리 전파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어하려 할수록 오히려 명예를 실추시킨다.

  누군가에게 비밀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해보라. 비밀이라고 하면 더욱 널리 전파된다.

 

  독자들이 많아지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들이 분노감을 가지고 과잉반응하게 만들라. 그리고 과소평가가 반대의 효과를 갖도록 활용하라.

 

  사회활동, 경제활동, 시장, 문화활동은 분명 인위적인 것이지만 스스로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 시스템의 구조가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관련없이 스스로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직을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의 단계에 도달한다. 이런 것들은 생물은 아니지만 복제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 생물과 닮았다. (예를들어 각종 소문, 사상, 기술, 비즈니스 등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세탁기 보다 고양이에 가깝지만, 세탁기로 잘못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 무생물의 차원을 뛰어넘는 구분을 해야 한다. 더 효과적인 구분은 복잡계(complex system)와 단순계(noncomplex system)로 나누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원인(cause)'이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가 수수께끼이다.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거나 실제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원인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신문을 무시하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은 인간을 메뉴얼에 따라 간단한 기계적 반응을 보이는 세탁기처럼 취급하는 현대생활의 한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용어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쉬는 동안에도 현대인들의 생활양시기을 구속한다. 금요일 밤의 오페라, 예정된 파티, 예정된 웃음 말이다. 다시말해 황금의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적을 지향하는 태도가 내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실존적 자아를 병들게 한다.

 

  삶은 무작위성을 띠는 자극으로 이루어지며, 좋든 싫든 간에 과업으로 여겨야 할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위험하다. 그러나 결코 따분하지는 않다.

 

  핵전쟁으로 지구상의 상당히 많은 생명체가 멸종되더라도 모든 생명체가 멸종되는 것이 아니라, 쥐나 박테리아가 어디선가 모르게 (어쩌면 심해에서) 나타나 인류가 없는 상태(물론 예산국 직원도 없다)에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갈지도 모른다.

  따라서  호르메시스는 개별 유기체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직접적인 손상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상황에 해당되지만, 진화는 손상이 개별 유기체를 사라지게 하고 혜택이 다른 유기체(살아남는 유기체와 미래의 세대)에게 이전되는 때 나타난다.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생각해보면 유기체 집단이 진화를 위해 손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박테리아를 손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살아남는 박테리아는 더 강해진다(완벽히 박멸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암 치료도 마찬가지다. 화학요법과 방사선 요법의 독성에도 살아남은 암세포는 더 빨리 증식해서 정상세포가 약해지며 생긴 빈자리를 차지해버린다.

 

  공학자이자 공학사학자인 헨리 페트로스키(Henrry Petroski)는, 타이타닉호가 그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형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큰 선박을 건조했을 것이고, 이 후 나타나는 재앙은 훨씬 더 비극적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원자로의 문제점을 깨닫고 더 큰 재항에 대비하도록 해준다. 비행기 사고도 시스템을 향상시켜 다음 비행을 더 안전하게 해준다. 그러나 경제위기는 그렇지 않다. 경제시스템은 프래질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를 한 수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그 이유를 찾기 보다, 자기 반성을 하지않고 실패를 활용하려고도 하지않으며, 당혹스럽고 방어적인 자세만 취하는 사람을 패배자(loser)로 규정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나쁜 상사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실패를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믿음이 더 간다. 또 시래(똑같은 실패는 아니다)를 여러 번 겪어본 사람은 실패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믿음이 간다.

 

  각각의 산업은 수많은 실패로부터 발전한다.

  레스토랑 주인들은 자신은 잘할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많은 레스토랑이 파산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성업 중인 레스토랑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리스크를 수용하는 것이 자신의 파멸을 부르기도 하지만 경제 전체로 봐서는 바람직한 것이다. 모두가 같은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리스크가 작고 국지적인 상황에서는 말이다.

  정부는 이런 모델을 붕괴시키면서 대기업에게 구제금융이라는 혜택을 제공한다. 다른 기업에 미치는 전염성을 막기 위해 대기업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구제금융은 리스크 수용의 건전성(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기업으로 프래질을 이전하는 것)에 역행하는 행위다. 사람들은 구제금융이 어느 누구도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마저 몰락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지속적인 실패만이 시스템을 보존해 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대부분 정부개입과 사회정책은 약한 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기존 세력을 강화시켜준다.

 

  영웅적 행동에 대한 존중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사회가 주는 보상이다. 그리고 기업가정신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행동으로써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심지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전문성의 개발을 강화하다보면 인식론적 바탕도 필연적으로 축적된다. 어떤 것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식(최고의 지식이다)을 알려주지만, 인정이나 신뢰를 받지는 못한다. 그는 타인게에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과정의 중심에 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기 과신으로 레스토랑을 열었다가 실패한 사람의 은혜를 잊고 살았다. 그가 참치통조림을 먹는 동안 나는 좋은 음식을 먹고 지내면서 말이다. 전사한 군인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사자 만큼은 아니지만, 실패한 기업가도 같은 논리에 입각해 존경해야 한다. (특히, 일본에서 실패한 기업가들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심정적으로 어주 힘들과 사회적으로도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더라면 성공한 요리사, 사이비 철학자, 시사 해설가, 컨설턴트, 로비스트, 경영학 교수가 될 수 없듯이,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싸웠다면 실패한 군인이란 없고, 마찬가지 이유로 실패한 기업가, 실패한 과학자도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나의 꿈(해법)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국가가 기업가의 날을 정하는 것이다.

 

  여러분 대부분이 실패하고 존경받지 못하고 가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경제를 발전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고 있다. 여러분들은 안티프래질의 원천이다. 국가가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장인, 택시운전기사, 매춘부(대단히 오래된 직업이다.), 목수, 배관공, 제단사, 치과의사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소들을 제대로 만들어버리는 크지 않은 블랙스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위험요소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안정적인 회사원은 그렇기 못하다. 그들은 인사팀이 주는 전화 한 통에 소득이 제로가 되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회사원에게는 위험이 숨어있다.

  기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무작위성 덕분에 일정 수준의 안티프래질을 지니고 있다. 작은 변화는 그들에게 적응을 요구하고, 주변 환경으로부터 배워서 끊임없이 변화하라고 압박한다. 스트레스는 정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선물을 받거나 놀랄만큼 좋은 소식을 듵거나, 공짜 옵션을 가질 기회도 생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고용주인 조지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 계속할 자유가 있다. 실제로 많은 택시운전기사들이 80살이 넘어서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하지만 50세가 넘어서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한 존은 그렇지 못하다.

 

  스위스에는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의 지갑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망명객들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에 정부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안정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없기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의미다. 스위스 사람들에게 스위스 대통령의 이름이 뭔지 물어보고 몇 사람이나 대답하는지 확인해보라. 그들은 대체로 프랑스나 미국 대통령 이름은 알지만, 자기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모른다. 스위스 화폐가 가장 안전하다고 하지만 중앙은행은 전체 경제규모에 비해 상당히 작다.

  이처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는 정치인들이 정부의 부재를 인식하고, 정부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스위스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 국가와 정치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고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스위스에 정부가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스위스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규모가 큰 중앙 정부가 없을 뿐이다. 스위스 국민들에 대한 통치는 전적으로 상향식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의 독립국가에 준하는 자치권을 지닌 작은 주들이 결합해 스위스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또 식수공급을 둘러싼 싸움을 비롯해 불쾌감을 주는 여러 논쟁에서 보듯이 주민들 간의 반목이 심해서 불안정한 요소가 많다.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이를 두고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독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어쨌거나 독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대한 사상은 그런 지적이라고 볼 수 없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상향식 독재는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그렇게 지적이지 않고 웅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완전히 별볼일 없다는 것은, 일요일 오후 제네바구, 시가지의 카페에서 얼마 간의 시간을 보내보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스위스가 이룩해놓은 위대한 업적에 대해 빈정거리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다른 나라가 훌륭한 제품을 생산하는 동안 스위스는 뻐꾸기 시계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스위스가 뻐꾸기 시계를 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멋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모든 측면에서(따분한) 안정을 제공해 준다.

 

  또, 제네바, 취리히의 일부지역, 그슈타드와 생모리츠의 스키 리조트처럼 소름끼칠 정도로 화려한 풍경은 스위스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도 아니고, 여기에 일정 역할을 담당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스위스가 추악한 부자들과 조세 피난처를 찾는 이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하면서 나타난 결과에 불과하다. 

  국민국가가 아닌 소규모 지방자치제이 연합의 형태를 띤 국가로써 주요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마지막 사례가 바로 스위스다.

 

  인간은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은 수천명의 죽음보다 옆에서 우는 한 명의 아이에게 더 쉽게 흔들린다. 하나의 통계에 불과하지만, 다른 하나는 비극이다. 인간의 감성에너지는 그럴듯한 사건을 맞이해 맹목적이기까지 한다. 미디어는 자극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우리의 감성에너지를 이용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매 7초마다 한 명이 당뇨병으로 죽어간다. 그러나 뉴스는 허리케인으로 집이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만 다룬다.(우리나라 2018년 총사망자 298,200명, 2분마다 1명씩 사망한다. 당뇨병 사망 19,000명, 하루에 두 명 사망)

 

  우리는 칠면조 이야기에서 최악의 실패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지식인 사회의 만연한 실패이자 사회과학에 바탕을 둔 실패로, 해악이 되는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오인하는데서 비롯된 실패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사랑하고 경제적 · 정서적 안정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안정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매년 새 학년이 되면 백신 주사를 맞는다. 면역력이 생기도록 하려면 약간의 독성물질을 주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은 정치와 경제영역으로는 이전되지 않고 있다.

 

  의원성 질환(iatrogenics, iatros는 그리스어로 의사를 의미한다)

  과학의 발달과 병원의 등장이 민간요법을 대체하자 사망률이 급증하게 되었는데, 주로 병원 내의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하는 병원티푸스(hospital fever)가 그 원인이었다.(19세게 후반에 최고점에 이른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병원을 '죽음의 온상(seminaria mortis)'이라고 불렀다. 사망률이 증가하게 된 증거를 병원의 등장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환자들이 한 곳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다른 곳에 있었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어갔다.

 

  교훈, 진실을 밝히는 대가로 월계관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멜 브룩스(Mel Brooks)의 영화 <제작자들(The Producers)>

 

  네덜란드 드라흐텐(Drachten) 시가 보여준 역발상, 시 당국은 모든 표지판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탈 규제는 안전을 증진시켰고, 리스크에 대한 경계심과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집중력에 내재된 안티프래질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도로표지판이 눈에 띄게 많지 않다.

 

  꾸물거림이 무조건 나쁘지는 않다.

  라틴어 속담 '급할수록 돌아가라' 로마인들은 자발적인 태만을 존중했다. 중국 노자도 수동적 성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무위(無爲)'의 정신을 설파했다. 꾸물거림은 상황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활동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마음을 바꿀 기회를 준다. 그리고 물론 구성원들은 스탈린 정권이나 이와 비슷한 정권의 실패와 공포를 보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꾸물거림의 장점은 의료절차에서도 나타난다. 꾸물거림으로서 자연에게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어 과실을 방지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자연이 과학자들보다 실수를 덜 저지른다는 불편한 사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불합리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와 경제학자들은 생명이 위태롭지 않을 때에만 꾸물거린다는 인간의 본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침실로 들어오는 사자를 보거나 이웃집 서재에서 발생하는 화재를 볼 때는 꾸물거리지 않는다. 또 크게 다쳤을 때도 꾸물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의무와 절차 앞에서는  꾸물거린다. 한 번은 등이 아파서 척추 수술을 해야 하는데 계속 미룬 적이 있다. 그리고 알프스로 휴가를 갔다오고 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난 뒤 통증은 씻은 듯이 나았다.

 

  꾸물거림은 정보를 잘 걸러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해준다. 

 

  누군가의 죽음을 재촉하고 싶다면 그에게 주치의를 붙여라. 무능한 의사를 붙여주라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직접 의사를 선택하도록 하고 비용만 지급하라. 어떤 의사라도 괞찬다.(그 사람을 합리적으로 죽이는 방법) 이것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의사들은 월급만큼 값어치를 해야하고, 직업윤리를 확인시켜줘야 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어설픈 개입과 의원성 질환으로 죽는다.

 

  기업과 경제부문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데이터에 의존하다 보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오늘 날의 데이터는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그 양이 방대하다. 또 데이터를 모으는데 열을 올리다 보면 잘못된 데이터를 얻게 될 가능성도 높다. 사람들이 데이터에 관해 잘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데이터는 양이 많을 때 유해하며, 심지어 적당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데이터를 자주볼수록, 당신은 유의미한 신호보다 잡음을 더 많이 보게 된다. 따라서 신호 대비 잡음의 비율이 더 커진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의 소용돌이를 설명하면서 촉매를 원인으로 잘못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당신은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예측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더 많은 리스크와 문제를 갖고, 어쩌면 파산까지도 할 수 있다. 예측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예측에 프래질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에서는 지혜가 지식보다 실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프래질에 맞서기 위해 세네카가 제안하는 실천적인 방법은 재산을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손실이 발생하더라고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즉, 고행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이는 손실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황이 잘 돌아갈 때 재산을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수양에 몰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가 수양이 가장 요구되는 순간이다. 나는 가끔 세네카의 방식대로 고생스러운 여행을 실천한다.(배가 난파되는 상황에서도 있어야할 물건만 챙긴다. 당시에는 여관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에서 잠을 자기 위해 담요가 필요했고, 1~2명의 시종도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스토아 철학은 감정을 제어하기 보다 길들이는 쪽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식물로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 스토아 철학이 추천하는 현대적, 현인은  두려움을 침착함으로, 고통을 정보로, 실패를 시작으로, 소망을 실천으로 바꾸는 사람일 것이다. 

  세네카는 작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인생을 잘 다스리고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완벽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예를들어, 로마의 스토아주의자가 하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분노와 정당한 행위를 구분하고 나중에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는 방법은, 벌을 주기 전에 최소한 하루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때에는 사려깊지만 유독 이런 상황에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하인의 눈을 찔러 버리는 하드리안 황제와 비교해보라. 하드리안 황제는 분노가 가라앉고 나서는 깊이 후회하지만, 하인의 상처를 돌이킬 수 없다.

  재산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좋은 행위, 즉 미덕의 행위는 그렇지 않다.

 

  세네카는 재산이란 현인의 노예이고, 바보의 주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스토아식으로 재산을 약간씩 잃으면서도 상승국면을 계속 유지했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라. 최선의 경우는 스스로 알아서 잘 관리된다.'

 

  나는 일을 할 때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집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맑은 정신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을 선호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이 덜 고통스럽다. 일본 사람들처럼 잠을 줄여가면서 오랫동안 사무시리에 앉아 지루하고 비효율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메인 요리와 디저트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20세기 다작소설가로 유명한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은 1년에 60일만 글을 썼고 나머지 300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200편이나 넘는 소설을 썼다.

 

  목적론적 오류

  이제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과거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성공했던 사람들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었다는 환상을 목적론적 오류라고 부르자.

  합리적인 산책가는 여행가와는 달리 일정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사람이다.

 

  여행가는 목적론적 오류에 빠져들 수 있다. 계획의 완벽함을 가정하고 자신을 수정불가능한 프로그램에 가두어 버린다. 반면, 산책가는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실패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일본인들은 실패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가 되었든 원자력발전이 되었든 리스크를 숨기려 한다.

 

  창조적 파괴-슘페터(Joseph schumpeter)

 

  행동가는 글을 쓰지 않는다. 행동할 뿐이다. 새들은 날아가고, 새들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새들의 이야기를 쓴다. 따라서 역사는 시간이 있고, 학자로써 보호받는 자리에 있는 패자들이 기록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경영대학에서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어떻게 가르치든 간에, 규모는 때로 당신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한다. 따라서 어려운 시절에는 규모를 키우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코끼리, 보아뱀, 매머드 처럼 덩치가 큰 동물은 빨리 멸종되는 경향이 있다. 덩치가 큰 동물은 작은 동물에 비해 충격에 프래질하다.

 

  실패의 확률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효과만 계산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돌팔이들은 잠깐은 분명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잊혀지면서 사라지게 되는 , 순식간에 떠오르는 방법에 잘 속아 넘어가는 우리의 성향을 이용하면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조언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무식한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것과 같다. - 알리 빈 아비 탈레브 - 

  

  물리학처럼 믿음이 가는 분야는 통계적 방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반면, 정치학이나 경제학처럼 주목할만한 것들을 결코 만들어낸 적이 없는 분야는 정교한 통계적 방법과 증거로 가득 차 있다.(그리고 그런 연기를 걷어 내고 나면,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과학에서 이런 상황은 가장 많은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탐정소설과 비슷하다.

   

  고전을 읽어라. "과거가 없는 자는 미래도 없다"는 아랍속담이 있다.

 

  고대의 일화에 의하면,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the Emperor Hadrian)는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주치의라고 외쳤다고 한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어느 스파르타인에게 장수하는 비결을 물었다. "의사를 무시하라."

  고대 그리스 풍자작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의사는 없다. 또한 도시의 평화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군인은 없다" 고 했다.

 

  누구에게든 의견, 예상, 자문을 얻으려 하지 말라. 단지 그들으 포트폴리오에 무엇이 들었는지만 물어보라.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의사에게 묻지말라. 차라리 그에게 당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무엇을 하겠는지를 물어라. 아마 당신은 그 차이에 깜짝 놀랄 것이다.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결과에서 이기려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논쟁에서는 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당신과 내가 정글 속에서 표범이나 다른 맹수와 마주쳤다고 하자.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허약체질이 아니라면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도망가기로 결정했다면,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맹수가 아니라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 즉 가장 비겁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죽도록 내버려두고 겁쟁이가 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알 무라나비, 아랍 시인, <말, 밤, 사막, 펜, 책>

 

2020.5.4.월. 특별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