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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17

햇살처럼-이명우 2023. 7. 30. 06:54

650.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17

차례
1.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2. 우주 생명의 푸가
3.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4. 천국과 지옥
5.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
6. 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
7. 밤 하늘의 등뼈
8.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
9. 별들의 삶과 죽음
10. 영원의 벼랑 끝
11. 미래로 띄운 편지
12. 은하 대백과 사전
13.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때 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未知)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코스모스는 너무 거대하여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길이 단위인 미터나 마일로는 도저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미터나 마일은 지상에서 쓰기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단위일 뿐이다. 천문학에서는 그 대신 빛의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거리를 잰다. 빛은 1초에 약 30만 킬로미터 또는 약 18만6,000마일, 즉 지구를 7바퀴 돈다. 빛은 태양에서 지구까지 8분이면 온다. 그러므로 태양은 지구에서 약 8광분(光分) 만큼 떨어져 있다. 빛은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약 6조마일을 간다. 천문학자들은 빛이 1년 동안 지나간 거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1광년(光年)이라 부른다. 광년은 시간을 재는 단위가 아니라 거리를, 그것도 엄청나게 먼 거리를 재는 단위이다.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에서 본다면 바다물결 위의 흰 거품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희미하고 가냘픈 덩굴손 모양의 빛줄기가 암흑을 배경으로 떠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것들이 은하다. 이들 중에는 홀로 떠다니는 고독한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은하단이라는 집단을 이루며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코스모스의 암흑 속을 끝없이 떠다닌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코스모스의 가장 거시적인 모습이며, 여기가 바로 성운들의 세계이다. 지구에서 80억 광년 떨어진 곳, 우리가 우주의 중간쯤으로 알고 있는 머나먼 저 곳이 성운들의 세상이란 말이다.
  은하는 기체와 티끌과 별로 이루어져 있다. 수십억개에 이르는 별들이 무더기로 모여 은하를 이룬다. 별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태양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은하 안에는 별들이 있고, 세계가 있고 아마도 각종 생명이 번성한 자연계가 있고, 지능을 소유한 고등생물의 집단이 있으며, 우주여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고도의 문명사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은하를 멀리서 바라보면 은하가 아기자기한 것들을 모아놓은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인다. 그것은 조개껍대기가 산호조각처럼 코스모스라는 바다에서 자연이 영겁(永劫)의 세월에 걸쳐 조탁하여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우주에는 은하가 대략 1,000억(10의11승)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개의 별이 있다. 모든 은하를 다 합치면 별의 수는 10의 11승×10의11승=10의 22승 개나 된다. 게다가 각 은하에는 적어도 별의 수만큼의 행성들이 있을 것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수의 별들 중에서 생명이 사는 행성을 아주 평범한 별인 우리의 태양만이 거느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별은 탐험가의 벗이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천문학>,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저자. 천문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철학자, 시인, 연극평론가, 수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이었다.
  어느날 거기서 그는 파피루스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남쪽 변방인 시에네(SYENE) 지방, 나일강 첫 급류 가까운 곳에서는 6월21일 정오에 수직으로 꽂은 막대기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짓날에는 한 낮에 가까이 갈수록 사원의 기둥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점점 짧아졌고, 정오가 되면 아예 없어졌으며 그 때 깊은 우물 속 수면위로 태양이 비춰보인다."  고 씌어 있었다.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잰 그림자의 길이에서 각 A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평행선을 제3의 직선이 지나면서 만드는 두 내각은 서로 같다는 기하학적원리에서 각A=각B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각A를 잼으로서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가 지표상에서 서로 7도 떨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쉽게 지나쳐버릴 관측보고였다. 나무막대기, 그림자, 우물 속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 태양의 위치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무슨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으랴? 그러나 에라토스테네스는 과학자였다. 그는 이렇게 평범한 사건들을 유심히 봄으로써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보면 세상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실험정신이 강한 학자였다. 그는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 수직막대를 꽂고 그 막대가 6월 21일 정오에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를 직접 조사하였다. 결과는 '그림자가 생긴다'였다.
  이에 에라스토테네스는 어떻게 똑같은 시각에 시에네에 꽂힌 막대기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데,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림자를 만드는지 자문(自問)해 보았다. 땅바닥에 고대 이집트 지도를 그려놓고 똑같은 길이의 막대기 둘을 구해다가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에, 다른 하나는 시에네에 수직으로 세워놓았다고 치자. 어느 때이든간에 각각의 막대기가 그림자를 전혀 드리우지 않는 시각이 있을 것이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건 그 때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서 비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두 막대기가 동시에 똑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면 그것 역시 평평한 지구에서는 말이된다. 태양광선이 두 막대기를 비스듬히 쪼이되, 그 비추는 각도가 똑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시에네의 막대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에라토스테네스가 보아하니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지구의 표면이 곡면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곡면의 구부러지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림자 길이의 차이도 클 것이다. 태양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에 다다른 태양광선에 대해 각기 다른 각도로 세워져 있는 두 막대는 서로 길이가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그림자 길이의 차이도 따져보니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는 지구 표면을 따라 7도 정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다시말해 두 막대의 끝을 지구 중심까지 뚫고 들어가도록 연장한다면 두 막대의 사잇각이 7도가 된다는 뜻이다. 지구 둘레가 360도이므로, 7도는 전체의 50분의 1 정도다. 에라스토테네스는 사람을 시켜 시에네까지 걸어가게 한 다음 그 거리를 보폭으로 재봤기 때문에 시에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략 800KM 떨어져 있다고 알고 있었다. 800KM의 50배이면 4만KM,이것이 바로 지구의 둘레인 것이다.
  제대로 나온 답이었다. 그 때 에라토스테네스가 사용한 도구라고할 만한 것은 막대기, 눈, 발과 머리 그리고 실험으로 확인코저 한 정신이 전부였다. 그 정도만 가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겨우 몇 퍼센트의 오차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00년 전의 실험치고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따라서 에라토스테네스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행성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관리감독자의 관찰노트가 중요하다. 관찰내용을 기록하자 -  

  그 후 마젤란이 지구가 둥근 것을 증명했다. 항해를 통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고지도(古地圖)글 파는 떠돌이 도붓장수였다. 그는 옛 지리학자들에 관한 서적과 또 그들이 쓴 책들을 열성적으로 읽었다. 그 중에는 에라토스테네스, 스트라본,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려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그 긴긴 여정에서 배와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에라스토테네스가 예측한 지구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잔꾀를 부려 자기가 계산을 조작했다. 그의 계획을 검토했던 살라망카(SALAMANCA)대학의 교수들도 콜럼버스의 계산이 거짓이라는 검을 제대로 지적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구할 수 있는 책을 다 뒤져, 지구의 둘레로서 그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택했고, 아시아 대륙은 동쪽으로 가장 긴 것을 찾아낸 다음, 그 수치마저 늘렸던 것이다. 가는 도중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더라면 콜럼버스는 쫄딱 망했을 것이다.

COSMOS VS CHAOS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약 600년 동안 인류를 우주의 바다로 이끈 지적 모험을 잉태한 곳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PHAROS) 등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디옥시리보헥산(DEOXYRIBONUCLEIC ACID) 분자 DNA - 모든 지상 생명현상의 주인공

  DNA는 완벽한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형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일을 한다. 이와 더불어 핵의 DNA는 전달자(MESSANGER) RNA 라고 불리는 다른 핵산을 합성하여 세포의 신진대사 활동을 관장한다.
  전달자 RNA 는 핵 밖으로 이동한 후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효소의 생성을 조절한다. 결과적으로 효소가 하나 생성되고, 이 효소는 세포내 화학반응의 특정단계를 관리한다.
  인간의 DNA는 10억개의 뉴클레오티들 연결된 두 개의 나선이 이루는 매우 긴 사다리처럼 생겼다. 다시말해 DNA 분자는 가로대를 10억개나 가진 긴 사다리다.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 효소가 복제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요하네스 케플러 <꿈>, <우주형상의 신비>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1642년 크리스마스에 체중 미달이 될 미숙아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뉴턴은 1L 들이 컵에 넣어도 될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일생 동안 병약했고, 스스로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고 생각했고, 걸핏하면 남과 다투었으며, 성격마저 비사교적인 데다가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아이작 뉴턴이지만, 그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제일 가는 과학의 천재였을 것이다.
  1663년 스투어브리지(STOURBRIGE)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스무살이었던 뉴턴은 그 곳에서 "안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궁금해서" 점성술 책을 한 권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읽다가 도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삼각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각법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그 책의 기하학적 논의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원론(ELEMENTS OF GEOMETRY)을 구해다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의 뉴턴은 미적분학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1966년 스물세살의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 되었을 때 흑사병이 돌았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외딴 마을 울즈소프(WOOLSTHORPE)에 내려가서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1년의 세월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뉴턴은 그 1년 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뉴인력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해를 하나 더 찾는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MIRACLE YEAR)"라 불렀던 1905년 뿐이었다.
  누군가 뉴턴에게 어떻게 그리 놀라운 발견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것들은 그냥 생각하면서 해냈습니다."
  젊은 뉴턴이 대학으로 돌아온지 5년이 지나가 그의 스승 아이작 베로(ISAAC BARROW) 교수는 뉴턴에게 수학교수 자리를 물려주었다. 흑사병이 돌았더 최악의 해, 물리학에서는 최고의 해였다. 코로나 19가 창궐하는 2021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2021.8.20.

  1908년 6월 30일 이른 아침, 중앙 시벨리아 한 오지에서 거대한 불덩어리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것이 지평선에 닿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약 2,000제곱킬로미터의 숲이 모두 납작하게 밀렸고, 낙하지점 가까이 있던 수천그루의 나무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그 때 대기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지구를 두 바퀴나 돌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틀 동안은 미세한 고체 티끌 입자들이 대기 중에 하도 많이 떠돌아 다녀서 폭발지점에서 무려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런던에서도 한밤중에 신물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온 하늘이 산란광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의 제정 러시아 정부는 그런 사소한 일을 한가하게 조사할 여력이 없었다. 멀고 먼 시베리아의 오지, 미개한 퉁구스족(TUNGUS)이 사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현지의 상황을 조사하고 현장의 증언을 청취하기 위해 파견된 정부 조사단이 도착한 것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난 후였다. 이 놀라운 현상을 우리는 퉁구스카 사건(TUNGUSKA EVENT)이라고 부른다.

  퉁구스카 대폭발 사건의 원인이 된 물체도 아마 혜성이었을 것이다. 퉁구스카 사건은 지름 100미터, 무게 수백만톤, 초속3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달리던 얼음덩어리, 즉 혜성 조각이 지구와 충돌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지름이 100미터라면 미식축구 경기장 하나를 연상하면 되고, 초속 30킬로미터라면 시속으로 하면 거의 11만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엄청난 속력이다.    

  작은 얼음 덩어리가 행성이나 달과 충돌할 경우, 행성에는 이렇다할 상처가 남지 않는다. 그러나 충돌하는 물체가 더 크거나, 주성분이 얼음이 아니라 암석이라면 충돌지점에 대규모의 폭발이 발생하여 충돌구덩이 또는 운석공이라는 반구형 또는 사발모양의 거대한 구덩이가 파인다. 지구의 경우 운석공은 풍화작용이나 강수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사라지거나 다시 메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달과 같이 기상현상이 전혀 없는 천체에서는 새로 만들어진 운석공이 수백만년 또는 그 이상 건재할 수 있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T) 화성소설
존 카터의 바르숨(BARSOOM)여행. 바르숨은 화성의 거주민들이 화성을 부르는 이름.

  인체를 구성하는 화학물질의 총 가치가 97센트라는 둥 10달러라는 둥 하여간 그 정도밖에 되지않는다는 주장의 글을 종종 읽을 수 있다.
  헤럴드 모로위츠(HAROLD MOROWITZ)가 한 때 재미있는 계산을 한 적이 있다. 사람 한 명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분자 물질을 화공약품 가게에서 구입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나 알아봤더니, 약 1000만달러라는 계산이 나왔다. 내 몸값이 이정도 나간다니 기분이 약간 좋다. 그러나 필요한 분자들을 다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병 안에 넣고 흔들어 섞는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 사람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거리를 다른 비유로 가늠해보자. 수정란이 나팔관을 지나 자궁에 착상할 시간이면 지구를 떠난 아폴로 11호는 달에까지 갈 수 있다. 수정란이 자궁에서 성장하여 아기로 태어날 즈음 바이킹 우주선은 화성에 도달한다. 인간의 수명은 보이저 우주선이 명왕성 궤도를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태양계 바깥으로 나설 때까지 걸릴 시간보다 길다.

  갈릴레오는(그리고 케플러도) 지동설을 지지하며 이를 주창했다. 그러나 그런 용기를 그 당시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교리를 따르는데 있어 비교적 광신적인 유럽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들어 1643년 4월에 데카르트가 쓴 편지를 보자. 당시에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도 최근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았고, 지구의 움직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단으로 단죄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입장을 차제에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의 논문에서 제가 밝혀 설명한 모든 것들은 지구의 움직임에 관한 가설을 포함하여 너무도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 하나가 틀렸음을 알면, 나머지 것들도 모두 그 논리가 어긋남을 어렵지않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소견이 명확하고 확실한 준거에 의거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만, 교회의 권위에 맞서서 이를 고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으며, '편히 살려면 남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라는 제 좌우명대로 지금껏 조용히 지내왔습니다. 원컨대 앞으로도 조용히 살기를 바랍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기원전 6세기의 폴리크라테스아 동시대 인물이다.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공과 같이 둥글다고 추론한 역사상 첫번째 인물이다. 달이나 태양의 유사성에 주목했거나, 아니면 월식이 일어날 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가 원형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지구가 둥글다고 추론했을 것이다. 또는 사모스 섬을 떠나는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 시야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부분이 돛대라는 점도 지구가 구형이라는 추론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로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기원전 6세기는 놀랍게도 지구 전체가 지적, 정신적으로 요동하던 시기였다. 이오니아에서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와 그 밖의 철학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였고, 이집트에서는 당시의 파라오인 네코의 명에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일주하는 항해가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특별한 시기였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중국의 공자와 노자, 이스라엘,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예언자들, 그리고 인도의 석가모니가 활약하던 종교의 황금기였다. 이러한 활약상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예수회 사람들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우주관을 중국에 소개하여 당시이 중국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유클리드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검열한 후 태양중심 우주관을 속이도 덮어두는데 온 신경을 썼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에서였다. 과학이 인도, 마야, 아즈텍 문화권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것도 이오니아에서 과학이 쇠퇴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만연된 노예경제의 병폐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대(정치적) 제3세계의 커다란 문제는 고등교육의 기회가 주로 부유층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하며 무엇을 만든다든가, 또는 기존의 지식체계에 도전한다든가 하는 일을 매우 어려워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런 나라들에서 과학이 뿌리내리기는 지극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사회에서 편히 살던 인물어었다. 그들은 노예제도의 부당성에 괴로워하기보다 오히려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지를 폈으며, 전제 독제군주를 섬겼고,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가르쳤다.(노예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다.) 그들은 또 사상과 물질을 별개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책도 태워버리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불멸의 영혼이나 불멸의 신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데모크리토스가 무한개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식 전체를 73권의 책에 집대성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저작물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전해오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데모크리토스의 가르침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내용의 것들 뿐이다. 그것도 주로 윤리학에 관한 내용이고 한 다리 걸쳐 전해진 간접적인 기술에 근거하고 있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기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과학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고, 신비부의를 용인하고, 노예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과학탐구의 이오니아적 접근방법이 신비주의에 눌려 긴 잠을 자는 동안 탐구의 도구들은 하릴없이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가, 그 일부가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의 학자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면서 재발견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서양세계에 두 번째 깨달음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실험위주의 연구방법과 탐구정신이 다시한번 존경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잊혀졌던 고대의 저술과 단편적 지식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레오느르도 다 빈치, 콜럼버스, 코페르니쿠스 등은 고대 그리스 전통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이러한 전통을 독자적으로 재조사하기에 이러렀다. 종교와 정치분야은 그렇지 못하지만 과학분야에서는 이오니아의 자유로운 탐구정신에 뿌리를 둔 바람직한 면면을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 출생)는 태양이 행성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소실되었다. 그는 월식 중에 달의 표면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을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옳게 추론했다. 그 다음에 따라올 결론은 뻔하다. 그는 태양처럼 큰 물체가 지구처럼 작은 물체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추론했다.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이와같은 생각은 우리가 '코페르니쿠스'하면 떠올리게 되는 생각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태양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한 사람"이라고 기술했지 태양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 사이에 있었던 1800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행성의 배열을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이미 기원전 280년 경에 완벽하고 명확하게 밝혀졌던 것이다. 지동설은 아리스타르코스의 동시대인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낙사고라스, 브루노, 갈릴레오 등에게 던져졌던 외침들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타르코스를 불경죄로 처벌하라는 아우성의 강도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를 적대시 하려는 생각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일종의 지구중심 우주관에 사로잡힌 우리는 아직도 일상적으로 "해가 뜬다"하고 "해가 진다"한다. 아리스타르코스 이후로 2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의 말투는 여전히 지구가 돌지않는 듯하다.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고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바깥세상이 어떠한지 알아내는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지구상의 해변이란 해변 모두에 깔려있는 모래알들보다 우주에 있는 별들이 훨씬 더 많다.

  빛 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예를들면, '생각의 속도' 같은 것인데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 뇌의 신경전달 신호는 당나귀가 수레를 끄는 것과 같은 느린속도로 뉴런 사이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상대성 이론을 궁리해 낼 정도로 영리하기는 하지만 그리 빠르게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 컴퓨터의 전기회로 속에서는 전기신호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젊은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낸 곳이 토스카나였다. 이 도시는 400년 전 또 다른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 곳에 살았다. 토스카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토스카나의 언덕을 뛰어오르거나, 또는 언덕 높을 곳에서 아래에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보기를 즐겼다. 레오나르도는 토스카나의 자연경관, 마을의 모습, 그리고 성채의 위용 등을 조감도에 담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언덕에 올라가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을의 모습을 그림에 옮겨담았던 것이다.

  어떤 우주선이 1G의 가속을 받으면서 비행을 적정시간 동안 계속하여 목표의 중간지점에 도달했을때 비행속도가 거의 광속과 같아졌다고 하자. 거기서부터는 가속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야 할 것이다. 즉 -1G의 가속을 받으며 지금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만큼 더 비행하면 목표 천체에 도달할 것이다. 이 우주선은 여정의 상당부분에서 거의 광속과 비슷한 속도를 유지했으므로, 우주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렀을 것이다. 행성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바너드의 별(BARNERD'S STAR)은 태양에서 약 6광년 떨어져 있다. 당신이 우주선을 타고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 별을 향해 달린다면, 약 8년 후면 이 별에 도착할 수 있다. 여기서 8년은 우주선에 실린 시계로 잰 당신의 시간이지, 우주여행의 장도에 오르는 당신에게 손을 흔들며 환송했던 사람들의 시간이 아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은하수 은하의 중심까지 가는데 21년이 걸리고 안드로메다 은하에는 28년이면 도착한다. 그렇지만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우주여행객의 21년이 무려 3만년에 해당하는 장구한 세월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을 마중나온 환영인파 중에서 환송의 손을 흔들던 사람은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소수점 여러자리까지 광속에 가깝게 접근한다면 이론상으로 단 56년이면 우주를 한 바퀴 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하건데 여기서 56년은 우주선에서의 시간이다. 지구인의 시간으로는 수백억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사실 우주 여행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지구 자체가 없어졌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까맣게 타버린 숯덩이로 변해있을 것이며, 태양은 아주 오래 전에 빛의 방출을 멈추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상대론적 우주여행은 고도로 앞선 문명에게는 우주 전역에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마련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우주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만 실현 가능한 방안이다. 우주여행객이 제한된 시간 안에 이렇게 우주 구석구석을 전부 돌아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도 문제는 남아있다. 지구에 있는 가족에게 그 어떤 정보도 광속 이상의 속력으로 보낼 수 없다는 문제 말이다.

  별들의 일생에 비한다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단 하루의 무상한 삶을 영위하는 하루살이들의 눈에는, 우리 인간들이 아무것도 하지않으면서 그저 지겹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한편,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일까? 아주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지극히 단단한 규산염과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공 모양의 땅덩어리에서 10억분의 1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

  책은 씨앗과도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

  자연에는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테오프라스토스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거나 있지도 않은 거짓 지식에 의존하려거나,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마음 속에 그리는 사람은 자신을 미신에 맡겨 헛된 위안을 얻으려는 자이다. 그들은 세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비겁함의 소유자들이다. 진정한 의미의 용기는 자신의 편견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고 또 찾아낸 결과가 자신의 희망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코스모스의 조직과 구조를 끝까지 탐구하고 그 깊은 신비를 밝혀내려는 이들의 것이다.

  인류 전체가 눈부신 과학문명에 큰 희망을 걸 수 있었던 시기가 역사에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일이었다. 이오니아 문명의 수혜자들이었던 고대의 최고 지성들은 수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문학, 지리학, 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알렉산드리아에 구축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바로 그 핵심 성체였다. 오늘날의 학문도 당시에 이루어진 연구에 아직 그 바탕을 두고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리스인 왕들의 지원을 받아서 건립됐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중에서 이집트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왕조가 바로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되어 파괴되기까지 7세기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 사회의 심장부요 두뇌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출판에 관한한 지구 전체의 수도 역할을 했다. 당시는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손으로 한 권씩 베껴서 만들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책은 매우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문헌 비평과 편집기술도 이곳에서 발명되었다. 이 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복사본을 만들어 보관하던 장소였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엄청난 왕실의 재산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그리스 책은 물론, 아프리카, 페르시아, 인도, 이스라엘 및 세계 곳곳의 작품들을 사 모았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비극작품의 원본 원고나 국가가 복사해 만든 공식 판본을 아테네에서부터 빌려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아테네인들에게는 영국인이 애지중지하는 셰익스피어의 육필원고나 첫번째 이절판과 같은 전통 문화유산이었으므로, 아테네인들은 이러한 작품들이 잠시라도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3세로부터 엄청난 반환 보증금을 현금으로 받아놓은 다음에야 이 희곡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빌려주기로 합의해 주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희곡작품들을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보증금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하고 작품이 적혀있는 두루마리 원본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물같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내놓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은 무척 화가 났지만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계면쩍은 듯이 내놓은 복사본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 국가가 지식추구에 이렇게나 '게걸스럽게' 힘을 기울인 적은 인류사에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의 지식을 수집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연구를 적극 장려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많은 지식을 새로이 창출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괄목할만 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지구의 모습을 지도에 담았고,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파르코스는 별은 태어나서 수 백년 동안 서서히 움직이다가 결국 사라진다고 추측했다. 이러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는 최로로 별의 등급과 위치를 기록한 도표를 만들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교과서를 썼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그 후 23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 갈레노스(GALENOS)는 치료와 해부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내용이 의학분야를 르네상스 때까지 지배했다. 그 외에도 수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서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시였다. 많은 지성들이 세계 곳곳에서부터 이곳으로 몰려와서 같이 생활하고 서로 배우면서 교유(交遊)하였다. 알렉산들이아의 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상인,학자, 여행객들로 넘쳐났다. 그리스, 이집트, 아라비아, 시리아, 히브리, 페르시아, 누비아, 페니키아, 이탈리아, 갈리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각 지방의 상품과 사상을 교환했다. 세계시민이란 뜻을 가진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라는 단어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 곳도 바로 여기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융성하던 전 시기를 통하여 과학자들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주장이나 가정에 도전했다는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의 영구불변성은 의심했지만, 노예제도의 정당성에 대해서 단 한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과학적 발견과 과학지식은 일부 기득권층만의 소유물로 남아있었다. 그 위대한 도서관에서 벌어지던 새로운 발견들이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발견은 일반 대중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발견의 내용과 의미를 대중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연구결과가 대중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다. 기계와 증기공학의 발견들은 오로지 무기의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이용되거나, 아니면 왕의 흥미를 자극하고 미신을 부추기는데 쓰였을 뿐이다. 과학자들은 기계가 언젠가는 사람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대에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들의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 읽혀지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렇게 됨으로써 과학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다. 지적 발전의 정체, 비관주의의 확산, 신비주의에의 비참한 굴복 등에 길항(拮抗, 일하고 겨룸) 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기제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폭도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소장품과 장서를 약탈해갔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붕괴할 시기까지 알렉산들이아에서 활동하던 여성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나중에 신 플라톤학파의 비조로 불리는 철학자 '히파티아'였다. 그녀는 철학자인 동시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였다. 어느 시대에서든 평생에 걸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낼 수 있는 학자라면 그는 보통의 범주를 크게 벗어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히파티아야말로 이러한 범주에 드는 인물로서 3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지배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뭇 남성의 구혼을 모두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미 멸망의 그림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노예제도가 고대문명의 생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상태였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 채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막강한 이 세력들의 진앙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루스(CYRILUS)가 그녀를 혐오할만 했다. 그녀가 로마 총독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이 혐오의 첫번째 이유였다. 두번째 이유는 히파티아가 바로 이교도 과학과 학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이교도의 사상이라고 폄훼했으니 키릴루스의 혐오감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가르치고 글로 발표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터로 가다가 키릴루스 교구 소속의 광신 폭도들이 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 때가 415년이었다. 폭도들은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벗기고 전복껍대기로 만든 무기로 그녀의 살을 뼈에서 발라낸 다음, 남은 시신과 그녀의 저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해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키릴루스는 나중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한 때 영화도 이제는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히파티아가 죽고 얼마되지 않아서 도서관에 남아있던 마지막 책들 마저 모두 파괴되었다. 인류문명은 잘못된 뇌수술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총체적인 망각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사상 그리고 지식추구의 열정이 모두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손실을 어떻게 숫자로 계량할 수 있겠는가? 파괴된 작품 중에는 작품의 제목만이라도 감질나게 알려진 운 좋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목도 저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소포클레스가 썼다는 희곡작품이 이 도서관에 123점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단지 7편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일곱편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 왕>이다.  이 도서관에는 아이스킬로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도 소포클레스의 경우와 비슷할 정도로 많았ㄷ고 한다. 비유를 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햄릿>, <리어왕>, <맥베스>, <줄리우스 카이사르>,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고, 이 작품들이 당대에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코리올라노스>와 <겨울 이야기> 단 두 편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고 애석한 일이겠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영화를 한창 누리던 시절에 이 도서관에 소장됐던 작품들로서 현재까지 두루마리 형태로 남아있는 고문서는 단 한 점도 없으며, 이 도서관의 진가를 알고있거나 인정하는 사람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찾아보기는 거의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이 도서관에 관하여 자세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뿐 아니라 그 전 수천년 동안 번성했던 이집트 문명의 진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오늘날 이 도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보다 근세에 있었던 큰 사건이나 절박한 여타의 문화적 요구가 우리 관심의 우선순위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2021.11.11. 목요일 밤에. 춘천 숙소에서 세탁기를 돌리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