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 신, 만들어진 위험,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2021.
2021년 생일선물로 청산님이 선물로 사준 책.
차례
1부 신이여 안녕히
1. 너무나 많은 신
2.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까?
3. 신화와 그 기원
4. 선한 책
5.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까?
6. 우리는 무엇이 선인지 어떻게 판단할까?
2부 진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7. 분명히 설계자가 있을거야
8.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로 가는 단계
9. 결정과 직소퍼즐
10. 상향식인가, 하향식인가?
11. 우리는 종교적 성향을 가지도록 진화했을까? 우리는 친절하도록 진화했을까?
12. 과학에서 용기를 얻자
여러분은 신을 믿는가?
어떤 신을 믿는가? ~ 나는 신 중 누구도 믿지 않는다.
THEIST 유신론자. 신 또는 신들을 믿는 사람
ATHEIST 무신론자. 'A'는 '아니다'라는 뜻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
POLYTHEIST 다신론자. 동시에 많은 신을 믿는다.(THEOS는 '신', 'POLY'는 '많은'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보탄(오딘)은 북유럽인의 최고의 신이었다. 그 밖의 유럽의 신들로는 발드르(미의 신), 토르(강력한 쇠망치를 들고 다니는 천둥의 신)와 그의 딸 스로드가 있다. 스노트라(지혜의 여신), 프리그(어머니 여신), 란(바다의 여신) 같은 여신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도 다신론자였다. 그들의 신들도 북유럽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정과 감정을 지닌 매우 인간적인 존재였다. 12명의 그리스 신과 여신은 같은 일을 한다고 알려진 로마의 신들과 짝을 이룬다. 예를들어 신들의 왕인 천둥,번개의 신 제우스(로마의 신은 유피테르), 그의 아내 헤라(유노), 바다의 신 포세이돈(넵투누스),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베누스),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날아다니며 신들의 전령 노릇을 한 헤르메스(머큐리),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쿠스)가 있다. 지금까지 존속하는 주요 종교 중 힌두교도 수천명의 신을 섬기는 다신교이다.
수많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자신들의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신들에게 기도하고, 동물을 제물로 바쳤으며, 행운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감사하고, 일이 잘못되면 그들을 탓했다. 그런 고대인들이 틀렸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알까? 왜 지금은 아무도 제우스 신을 믿지 않을까?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대부분은 그 오래된 신들에 관한 한 '무신론자 ATHEIST'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한 때 로마인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유피테르나 넵투누스, 또는 그 부류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요즘 우리는 그 말을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여러분도 그럴거라고 예상하지만 나는 유피테르, 포세이돈, 토르, 베누스, 큐피드, 스노트라, 마르스, 오딘, 아폴로를 믿지 않는다. (호루스는 예수나 세계 곳곳의 많은 신과 마찬가지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하다드, 엔릴, 아누, 다곤, 마르두크 같은 고대 바빌로니아 신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안야누, 마우, 응가이, 아프리카의 태양신들을 믿지 않는다. 또한 빌라, 그노위, 왈라, 우리우프라닐리, 가라우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이 섬기는 태양의 여신들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아일랜드의 태양의 여신 에다인, 달의 신 엘라하 같은 켈트신화의 수많은 신과 여신 중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나는 중국의 물의 여신 마주, 피지의 상어 신 다쿠와카, 히타이트의 바다의 용 일류얀카를 믿지 않는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하늘의 신, 강의 신, 바다의 신, 태양 신, 별의 신, 달의 신, 날씨의 신, 불의 신, 숲의 신 중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 밖에도 믿지 않는 신은 너무도 많다.
그리고 나는 유대인의 신 야훼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유대인, 그리스도인, 또는 이슬람교인으로 자랐다면 야훼를 믿을 가능성이 꽤 높다. 그리스도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은(아랍식 이름인 '알라'로) 유대인의 신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고대 유대교의 분파이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첫 번째 부분은 순수하게 유대교의 경전이고, 이슬람교의 성서인 <코란>은 유대교 경전들에서 일부가 유래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묶어 흔히 '아브라함' 종교라고 부르는데, 세 종교 모두 신화 상의 족장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시조로도 추앙받는다.
특히, 미국과 이슬람국가들에서 무신론자에게 겨눠지는 아주 괴상한 비난 중 하나는 무신론자들이 사탄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무신론자는 선한 신을 믿지않는 만큼이나 악한 신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는 초자연적인 것은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종교인들만이 사탄을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면에서 봐도 다신교에 가깝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분이 한 분이요, 한 분이 세 분'(삼위일체론)으로 묘사한다.
로마 가톨릭교도에게 마리아는 실질적으로 여신이다. 그들은 마리아가 여신임을 부인하면서도 여전히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었다고 믿는다. 그게 무슨 뜻일까? 가톨릭교도는 우리 모두가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아기는 죄를 짓기에는 너무 어린데도 말이다. 어쨌든 가톨릭교도는 (예수처럼) 마리아는 예외였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모든 사람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를 물려받는다. 사실 아담은 실존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지을 수도 없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그런 사소한 사실에 굴할 사람들이 아니다. 또한 가톨릭 교도는 마리아가 우리처럼 죽는 대신 영혼과 더불어 육체도 '승천'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마리아를 머리 꼭대기에 작은 왕관을 얹은 '천국의 여왕'으로(때로는 '우주의 여왕'으로까지) 묘사한다. 이쯤되면 마리아는 적어도 수천명의 힌두교 신 중 어느 하나 정도 되는 여신으로 (힌두교도들에 따르면 그 수많은 신은 단지 유일 신의 서로 다른 버전일 뿐이다) 묘사한다. 고대 그리스인, 로마인, 북유럽인이 다신론자였다면 로마 가톨릭교도도 그렇다.
로마 가톨릭 교도는 성인들 개개인에게도 기도한다. 성인은 특별히 거룩하다고 여겨져 교황으로부터 '시성된' 죽은 사람을 일컫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483명의 새로운 성인을 시성했고, 지금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하루에만 적어도 813명을 시성했다. 많은 성인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며 그런 능력 때문에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람 또는 특정집단의 사람이 그들에게 기도한다. 성 안드레아는 생선장수들의 수호성인, 성 베른바르도는 건축가들의 수호성인, 성 드로고는 커피숍 주인들의 수호성인, 성 굼마로는 나무꾼들의 수호성인, 성녀 리드비나는 스케이팅 선수들의 수호성인이다.
그 다음에는 천사들이 있다. 천사들은 다양한 계급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치품천사가 있고, 대천사를 거쳐 여러분의 개인적 수호천사로 내려온다. 이번에도 로마 가톨릭교도는 천사가 신 또는 반신반인임을 부인할 것이고, 자신들은 성인에게 실제로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신에게 잘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슬람교도 천사를 믿는다. 그들은 '진JINN'이라 불리는 귀신도 믿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믿는 종교로 꼬리표를 붙이는 습관이다. '가톨릭교도 어린이', '개신교도 어린이', 이슬람교도 어린이' 처럼 말이다. 종교적 견해를 갖기는 커녕 아직 말도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그게 '사회주의자 어린이', '보수주의자 어린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해보이고, 실제로 아무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무신론자 어린이'라는 말도 쓰지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소문과 가십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위대한 작가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진실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말은 지구 반 바퀴를 돌 수 있다" 고 말했다.
<요한의 묵시록>은 더 나중에 정경에 추가되었고, 어쨌든 추가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요한이라 불리는 어떤 남자가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꾸었고, 그걸 기록했다.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많은 꿈이 상당히 기이한 내용이다. 내 꿈은 거의 항상 그렇지만 나는 그걸 적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그런 꿈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만큼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요한의 꿈은 웬만큼 이상한 꿈이 아니었다. (거의 마약에 취한 것 같다) 그 꿈은 어쨌거나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예언으로 여겨져 미국의 극성 설교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다윗왕의 직계자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사이의 조상들은 두 책에서 완전히 다르다. <마태오 복음서>의 경우는 25명이고, <루가의 복음서>는 41명이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는 처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여겨지므로 그리스도인인 요셉이 다윗왕의 직계 자손임을 이용해 예수가 다윗왕의 자손임을 입증할 수 없다.
마테오가 인용한 '동정녀'라는 단어는 이사야가 사용한 히브리어로는 알마 ALMAH 였다. '알마'에는 동정녀라는 뜻이 있지만 '젊은 여인'이라는 뜻도 있다. 영어단어 'MAIDEN'과 비슷한데, 이 단어도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번역본인 <<70인 역>>에서 - 아마 마테오도 이걸 읽었을 것이다. - 알마는 ''파르테노스 PARTHENOS'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실제로 '동정녀'를 뜻한다. 요컨대 단순한 번역 오류가 세계적인 '성모마리아' 신화를 낳고,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마리아를 일종의 여신, 즉 천상의 여왕으로 숭배하게 만든 것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비범한 주장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이건은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 라플라스에게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라플라스는 "비범한 주장에 필요한 증거의 무게는 그 주장의 이상함에 비례해야 한다."
<<성경>>에서 다른 것은 읽지않더라도 <전도서>와 <아가 SONG OF SONGS> 두 권은 추천한다. 하지만 꼭 킹 제임스판으로 읽어야 한다.
세계 각지의 수천가지 창조신화 중 유대인의 창조신화가 그리스도교 성서인 <<성경>>에 포함된 것은 단순히 두 가지 역사적 우연 때문이었다.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 것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것이다.
신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를 시험하는 아주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이 어릴 때, 어느 날 아버지가 여러분을 깨우며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보라. "날씨가 좋구나. 나와 함께 시골길로 산책가지 않으렴?" 여러분은 아버지의 제안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래서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아버지가 길을 멈추더니 장작을 모은다. 아버지는 그것을 쌓아올리고 여러분은 모닥불을 즐길 생각으로 그 일을 돕는다. 하지만 모닥불에 불을 붙일 준비를 마쳤을 때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아버지가 여러분을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올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른다. 아버지가 나를 모닥불에 올려놓고 구울 작정인가?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아버지는 칼을 꺼내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치켜든다. 여러분은 이제 확신한다. '아버지가 저 칼로 나를 베겠구나. 나를 죽인 다음 몸에 불을 붙이겠구나. 내 아버지, 어릴 때 침대맡에서 이야기 들려주고, 꽃과 새의 이름을 알려주고, 내게 선물을 주고, 무서운 밤이면 괜찮다고 위로해주던 아버지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멈춘다. 그리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마치 머리 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듯 하다. 아버지는 칼을 거두고 여러분을 풀어준 다음 방금 벌어진 일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버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는 여러분을 이해시킨다. "모두 신이 한 일이었다. 신이 너를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 내가 신에게 충성하는지 시험한 것이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의 명령이라면 자식을 죽일 각오까지 되어있음을 신에게 증명해야 했다. 귀여운 자식보다 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여러분의 아버지가 정말로 신을 명령대로 하려는 걸 보자마자 신이 늦지 않게 가로막았다. "알았어! 장난이야!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어때, 장난치고는 그럴듯하지 않았어!"
누군가를 데리고 장난치는 방법으로 이것보다 더 나쁜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이한테 평생 상처를 남기고 부자관계를 영원히 망치는 고의적인 장난, 하지만 신이 그렇게 했다고 <<성경>>에 적혀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전체 이야기를 읽어보라.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아이는 그의 아들 이사악이었다.
<<코란>> (37장99절-111절)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아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한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어머니가 다른)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다. <<코란>>버전에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꾼다. 꿈만으로도 알라가 뭘 원하는지 알아들은 그는 아들의 의견을 묻는다. 놀랍게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또 다른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코란>>에는 이 버전이 없다. - 세이탄(사탄)이 이 끔찍한 행동을 하지말라고 아브라함을 설득한다. 이것만 보면 악마가 선한 역할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꿈을 따르기로 하고, 돌을 던져 악마를 쫓아낸다. 이슬람교도들은 매년 열리는 '이드 EID' 축제 때 이 돌팔매질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사악(이스마엘)이라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현대에 일어난다면 아브라함은 끔찍한 아동학대죄로 감옥에 갇힐 것이다. 재판정에서 한 남자가 "저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호소한다면 판사는 뭐라고 말할까? "누구의 명령입니까?" 그 남자는 "재판장님, 제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렸습니다." 또는 "꿈을 꾸었습니다."라고 답변한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충분한 변명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브라함을 감옥에 보내겠는가?
왜 신은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구약>>의 어느 부분을 보면 신은 도무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거의 날마다 모세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신에게 소식을 듣는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정신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 자체가 그 오래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가?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을 당장 죽여라. 남자와 동침한 적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민수기>31장 17절~18절"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인종청소와 아동학대라 부른다.
신학자들은 <<구약>>의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라는 증거를 현대 고고학과 학문이 찾아내지 못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신학자들은 많은 끔찍한 이야기가 역사라기 보다 상징을 담은 신화, 이솝우화 같은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둘러댄다. 좋다. 하지만 여러분은 폭력적 살인충동, 레벤스라움을 위한 전투, 대학살과 인종청소, 여성과 소녀를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해 강간하고 성노예로 이용하는 것에 관한 끔찍한 이야기들 중 어디에서 교훈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속죄란 잘못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신이 우리를 용서하고 싶었다면 왜 그냥 용서해주지 않았는지 여러분은 궁금할지 모른다. 하지만 신이라는 인물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이왕이면 고통스릅과 치명적이면 더 좋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도 없다."<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9장 22절)
사도 바울로는 그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고린도전서> 15장3절)고 설명했다.
속죄 개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공식 신앙을 전하고 있을 뿐이니 나를 탓하지 마시라) 그러니까 신은 인류의 죄, 무엇보다 인류가 물려받은 (존재한 적도 없는) 아담의 죄를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간단했고, 너무 뻔했다. 누군가는 희생으로 용서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인류의 죄는 너무 엄청나서 평범한 희생으로는 불가능했다. 신 자신의 아들인 예수의 고문과 고통스러운 죽음말고는 무엇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수가 땅으로 내려왔다(내려왔다고?). 매맞고, 박해받고,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 속에 죽고, 그럼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치를 수 있도록. 오직 신 자신 -예수는 인간 모습을 한 신으로 간주되므로- 이 치르는 피의 희생만이 인류의 목에 걸린 무거운 죄값을 충분히 치를 수 있었다.
영국의 뉴캐슬대학 멜리사 베이트슨 교수 실험 '양심상자'
그녀는 자신이 재직하는 뉴캐슬대 과학학부에 학과 사람들이 매일 먹는 커피, 차, 우유, 설탕에 값을 지불하는 '양심상자'를 배치했다. 판매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격표는 벽에 붙여놓았고, 각자 양심껏 적당한 액수의 돈을 상자에 넣으면 되었다. 누군가 보고 있을 때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것은 실험해 보지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혼자 있다면? 여러분이라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도 상자에 돈을 넣겠는가? 나는 여러분이 그러리라고 확신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양심적이지는 않다. 이 실험은 바로 그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멜리사는 매주 가격표를 붙였다. 그리고 매주 그 종이 윗부분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꽃을 그려넣기도 했다. 항상 같을 꽃은 아니었지만 여러 송이를 그렸다. 다른 주에는 한 쌍의 눈을 그렸다. 매번 다르게 생긴 눈을 그렸다. 실험결과는 흥미로웠는데, 가격표 위에 눈 그림이 있던 주에 사람들이 더 정직했다. 양심상자에 들어있던 돈이 꽃들만 지켜보고 있던 '대조주간' 보다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눈이 진짜 스파이 카메라였다면 설명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 눈이 종이 위의 잉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누가 지켜보고 있으니 정직하게 행동하는 게 좋아" 같은 이성적인 계산이 아니었다. 비이성적이었다. 이는 어쩌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유전자가 우리 뇌에 심어놓은 반응인지도 모른다. 2022.3.29.
물론 십계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수 천년 전, 남성이 자신의 아내를 소유하고 가장 중요한 소유물이 노예였을 때 쓰였다는 이유로 <<성경>>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치 않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그 시대에 있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도덕, '옳고 그름', '해야하는 것과 하지말아야 하는 것'을 <<성경>>에서 얻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성경>>에서 얻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에 일했다는 이유로, 또 다른 신을 섬겼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돌로 쳐죽이고 있을 것이다.
다윈의 위대한 점은 인간 선택자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자연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수 억년 동안 해왔다.
DNA는 몸의 발생을 감독하고, DNA는 다시 수 세대에 걸쳐 자연선택의 '감독'을 받는다. 따라서 자연선택은 간접적으로 몸의 발생을 감독하는 셈이다.
DNA는 컴퓨터 코드처럼 디지털 코드이다. 그리고 DNA는 부모의 디지털 정보를 지식과 그 뒤의 수많은 세대로 전달한다. 하지만 전달되는 그 정보는 청사진이 아니다. 그 정보는 어떤 의미로든 아기의 지도가 아니다. 부모의 몸을 스캔한 것이 아니다. 유전학 실험실에서 그 정보를 읽을 수 있지만 아기를 출력할 수 없다. 인간의 DNA 정보를 아기로 바꾸는 방법은 DNA를 여성의 몸안에 넣는 방법 뿐이다!
DNA가 아기의 청사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기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시세트로, 청사진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오히려 케이크를 만드는 레시피와 비슷하다. 또는 명령을 순서대로 따르게 되었을 때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과학적 진실은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도 진실이다.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도 진실이었고, 우리가 멸종한 뒤에도 진실일 것이다.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어떤 기적은 믿고 어떤 기적은 믿지 않는가? 성서에 등장하는 신이라는 인물은 정말 선한가? 마지막으로, 성서에는 좋은 말도 있다고(그건 사실이다) 항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묻는다.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을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그런 판단 기준이 있다면 성서가 왜 필요한가?
2022.4.4. 월요일.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54.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 한빛비즈, 2021. (2) | 2023.09.09 |
---|---|
653. 일차원적 인간, 마르쿠제, 차인석 옮김, 삼성출판사, 1989. (0) | 2023.08.23 |
651. 세상을 여는 지혜의 황금열쇠, 발타자르 그라시안,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옮김, 강희진 옮김, 새론북스, 2009 (0) | 2023.08.20 |
650.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017 (0) | 2023.07.30 |
649.일취월장, 고영성,신영준,로크미디어,2019. (0) | 202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