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125. 록펠러가의 사람들, 피터 콜리어, 데이빗 호로위츠,

햇살처럼-이명우 2010. 3. 29. 17:56

125. 록펠러가의 사람들, 피터 콜리어, 데이빗 호로위츠,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4

 

  록펠러의 생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려는 지적호기심에 아내에게 부탁해서 이 책을 대출했는데 책 두께를 보고 기가 질린다.

 

"현대를 만든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두 사람은 록펠러와 비스마르크다. 한 사람은 경제에서, 한 사람은 정치에서, 개인의 자유경쟁을 통해 보편적 복지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깨뜨렸다. 그리고 독점체제와 관료제 국가를 이룩했다.  -버트란트 러셀 -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1810~1906) --- 일라이져 데이비슨(1813~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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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     윌리엄               매리언                 프랭클린                 프랜시스    

(1838~78)            |     (1841~1922)      (1843~1925)         (1845~1917)          (1845~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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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데이비슨   = 로라 셀레스티아 스펠먼

                  (1839~1937)      (1839~1915)

 

 

  클리블랜드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가는 대신 1855년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는 몇 주 동안 클리블랜드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는데, 단지 일자리가 전부는 아니었고, 자신의 큰 포부를 위한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는 남보다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철도회사, 은행, 도매상 등을 찾아 다녔다.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9월 26일, 그는 '휴이트 엔드 터틀'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되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유일한 유물은 '회계장부A' 뿐이었다. 그는 이 평범한 노트를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손에서 뗀 일이 없었다. 가늘고 섬뜩한 손가락으로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이 내역을 작성해 나갔다.

  록펠러는 휴이트 앤드 터틀 사에서 3년 간 일하며 약 800달러를 저축했다.

  창립 첫 해 클라크 앤드 록펠러사는 충 매출액 45만 달러, 순이익 4천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그 즈음 남북전쟁 만큼 큰 사건은 펜실베니아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최초의 유정을 발견한 것이다. 그 근처에는 큰 시내가 흘렀는데, 물위에 검은 기름띠가 떠다니므로 "오일 크릭(기름 냇물)"이라 불렸다. 그 기름띠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알려져 있었고, 초기에 정착민들은 골칫거리로 여겼지만, 인디언들은 오히려 그 기름을 약으로 쓰고 있었다. 록펠러가 휴이트 엔드 터틀사에 입사할 즈음에 작은 병에 든 석유는 록펠러의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변두리 의사들에게 중요한 만병통치약의 재료였다. 또한 그것은 가장 싸면서도 효율적이고, 오래가는 연료로 쓰였으며, 그리하여 1895년 "드레이크 대령의 타이터스빌"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 곧 '유전지대'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되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정유기술의 연구로 부산물인 파라핀, 윤활유, 바세린, 심지어 껌에 이르기까지 수십개의 산업용 제조기술이 파생되었다. 전구가 발명되어 조명연료로서의 등유를 쓸모없이 만든 바로 그 때, 현대산업의 에너지기반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국가간 석유확보와 공급을 둘러싼 이전투구가 벌어지게 한 '내연기관'이 등장함으로써, 스텐더드 오일의 부와 권력은 록펠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거의 광적일 정도로 낙천주의자였다.

펜실베니아의 대 유전인 브랫포드 유전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더욱 풍부한 리마 유전이 오하이오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스탠더드 오일이 개발을 맡았는데, 록펠러가 프랫과 로저스의 의견을 무시하며 고집을 부린 때문이었다. 그들 두사람은 리마유전의 석유는 유황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충분한 수준으로 정제될 수 없을 거라는 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유전개발에 반대했다. 그러나 3년 후 록펠러의 과학자들은 프래시 공법을 개발하여 그 석유를 정제할 수 있었다.

 

  랜디스 판결 후 스텐더드 트러스트는 해체되고,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이 거래되었는데, 오히려 주가는 급등했다.

록펠러의 재산은 주체할 수 없이 늘어만 갔다. 그의 참모 프레데릭 게이츠는 "회장님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불어나는 것보다 더 빨리 나누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눈덩이에 깔려죽습니다. 회장님은 물론, 자녀들까지 말입니다."

 

그때부터 자선단체를 설립하는데 첫째가 록펠러 의학 연구소이다.

 

2006.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