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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 맨 얼굴의 중국사 4, 백양, 창해, 2005

햇살처럼-이명우 2019. 7. 29. 07:55
551. 맨 얼굴의 중국사 4, 백양, 창해, 2005
제24장. 11세기
  1. 송과 요의 화해 ~ 왕안석
~
제29장. 16세기
<유가 학파의 인간 분류표>
총제    구분      표현단어
인간    군자      정인(正人), 정직, 강직, 충성, 광명정대, 허심탄회, 과묵
인간    소인      간사, 위험, 비열, 편벽, 오염, 기만, 술수
국립대학(국자감) 총장은 처음에는 판국자감사라 불렀고, 나중에는 옛날 이름인 좨주(祭酒)를 되찾았다.
국자감에는 '국자학'과 '태학' 두 학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국자학은 귀족들의 학원으로 7품 관직 이상 관원의 자제들만 입학할 자격이 있었다. 태학은 이와 달리 8품이하 하급관원의 자제나 평민 자제도 입학할 수 있었다.
국립대학 외에 서원(書院)이라는 사립대학이 있었다. 국립대학은 한 곳 뿐이었지만 사립대학은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규모가 때로는 국립대학을 넘어설 정도였고(......) 빅록동 서원의 경우는 12세기가 되면서 학생이 1만명에 육박하여 마침내 유가 학파의 주류, 즉 도학(이학)의 총 본부가 된다.
1040년 위대한 조판가의 한 사람인 필승(畢昇)이 활자판을 발명했다. 그는 진흙 위에 글자를 새긴 다음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들었는데, 그 형태는 아연으로 만든 글자와 다를 바 없었다. 
소식蘇軾, 소동파는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많은 재주를 가졌고, 백성들으르 아끼고 사랑했다. 정치판에서는 그의 낭만적 기질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 부, 사, 문장, 변체, 회화, 서법, 각종 형태의 예술 작품에 정통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 왕안석(王安石)
황제 조욱, 구당의 우두머리 사마광, 신당의 우두머리가 된 왕안석
범중엄과 사마광은 개혁의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문제의 소재를 알고 해결책도 알고 있었지만, 실행에 옮길 의사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은 악한 세력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릇된 신념에 구속된 도덕적이고 위선적인 군자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개혁과 진보의 걸림돌이었다.
사마광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했다. 이 역사책은 기원전 403년부터 기원후 959년까지 중국 정치를 상세히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 대략 600만 자에 이르는 거대한 저작이다.
12세기 <주희(朱熹)> <논어>를 맹자의 언론집인 <맹자> 및 <예기> 중의 두 편 <대학>,<중용> 과 함께 이른바 '사서(四書)'로 규정지어 버린다.이렇게 해서 사서는 오경과 함께 '사서오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 뒤 점점 오경의 자리마저 빼앗아 중국 지식 분자들의 유일한 경전이 되었다.
1140년~1142년, 송나라 장수 악비, 금나라의 침공, 간신 진회, 황제 조구, 황제 조구의 사주를 받은 진회의 모함에 걸려 악비는 39세에 죽었다. 역사의 심판은 냉엄하다. 진회는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공소시효가 없는 역사의 법정에서 영원히 심판을 받는다.
  훗날 사람들은 항주 서호에다 악비의 무덤을 만들고 무덤 앞에 쇠로 만든 진회, 진회의 아내 왕시, 심판관이었던 만사설과 장준, 이렇게 네 명의 상을 무릎 꿇려 앉혀 놓았다. 여행객들은 일부러 이들 얼굴에다 오줌을 누고 침을 뱉거나 뺨을 때리는 등 화풀이를 대신 했다. 이 때문에 이 철상들은 계속 새로 주조해서 그 자리에 둘 수 밖에 없었다.
누구 못지않게 명성을 자랑하던 알렉산더나 샤를마뉴 등과 같은 서방세계 제왕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죽고 난 뒤 천신만고 끝에 영원한 제국이 바로 와해되었다. 그러나 테무친의 죽음은 성장 중인 몽고제국에 어떤 충격도 주지 않았다. 이는 기적과 같았다. 조직의 귀재였던 태무친의 재능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1229년 테무친의 세째아들 오고타이가 2대에 대극한(태종太宗)으로 즉위했고, 
<원곡(元曲)> 희극 몬학의 하나로 '사(詞'가 진보된 것
유명한 元曲 왕실보의 <서상기>, 곽한경의 <두아원>, 마치원의 <한국추>는 서한 왕조의 황제 유석과 궁녀 왕소군의 이야기, 백박의 <오동우(梧桐雨)>는 당현종(이융기)과 양옥환(귀비) 이야기, 시혜의 <배월정>, 고명의 <비파기> 등이 있다.
몽고의 중국 통치는 기층부터 엄밀하고 철저한 통제.
20家를 1甲으로 편성, 그 우두머리를 '갑주甲主'라 했고, 몽고인이 맡았다. 이 몽고인이 20가의 관리인이었고, 20가는 이 몽고 총관의 노예였다.
목고 제국은 1264년에 북경으로 천도한 뒤 1381년 운남이 함락되기 까지 총 118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명시조 주원장, 대도살, 개국공신들까지 모조리 도살했다.
300면 동안의 퇴보, 원흉, 주원장의 <조옥詔獄(범죄날조)>과 정장廷杖(곤장 등 고문)
왕수인(양명), 양명동陽明洞이란 동굴을 뚫고 학문을 연구한 적이 있기 때문에 陽明先生이라 불렸고, 그 학설은 陽明學이라 불렸는데 두 가지 큰 주제를 포괄한다. 
  1. 치양지致良知
  2. 지행합일知行合一
  치致란 실행을 말한다. 양지良知란 심리상, 정신상의 자각을 말한다. 즉 정신적 자각을 행동에 옮긴다는 뜻이다. 왕수인은 이 이치를 알았으면 바로 이 이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이치를 실행하는 것, 이것이 자로 지행합일이다. 스스로 안다고 해 놓고 실행하지 않으면 진짜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인성이 파괴되는 주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실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국문학 : 시경-초사-한부-당시-송사-원곡-소설
소설 3부장 나관중의 <삼국연의 >, 시내암의 <수호전>, 오승은의 <서유기>
2014.5.3.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