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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 감정수업, 강신주, 민음사, 2014 ​

햇살처럼-이명우 2019. 7. 29. 07:56
552. 감정수업, 강신주, 민음사, 2014
강 지훈이라는 친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군복무를 하다가 고성 산불 진화 작업 중 화상으로 국가 유공자가 된 친구인데 이 친구의 독서량도 장난이 아니다. 우편 원격교육 과정개발을 하는 자신의 업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양의 독서를 소화해내는 멋진 친구다. 이 친구의 소개로 이 책을 읽는다.
  이 책은 '어떤' 편집자 노처녀가 제안을 했고, 그녀는 또 <중앙선데이>, <S매거진>(중앙일보 주말판)에 격주로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연재되도록 주선했고, 그녀 덕분에 45회 연재로 마무리 했다.
  "연재하는 도중에, 48가지 감정들에 해당하는 작가와 작품을 고민하는 몫은 문학소녀였던 그녀가 전적으로 감당했다. 편집자 덕에 나는 격주로 한 번씩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고 작가는 애필로그에 쓰고 있다. 문학 작품들을 인간의 감정과 연결시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멋지다. 편집자의 생각이 더 멋진 것은 그녀가 문학 소녀였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48가지의 인간의 감정을 나열하고, 문학작품 중에서 이 감정을 주제로 쓴 작품을 인용하고,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정의를 연결시키고, 나중에는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기획이 매우 참신하고(편집자의 아이디어) 어떤 부분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부분도 있을 정도로,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다. 나도 여기에 소개된 책들을 오늘부터 독서목록으로 정해 읽기 시작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읽어보아야겠다.
머리말
차례
프롤로그
본론
1부 땅의 속삭임
2부 물의 노래
3부 불꽃처럼
4부 바람의 흔적
'롤리타 신드롬'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에서 유래된, '아동에 대해 성욕을 느끼는 정신질환', 주인공 험버트의 고백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라는 소설의 첫 구절.
  모든 사람의 저주를 감당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했던 주인공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분명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을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나 그녀의 삶에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감정은 용수철과도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발력을 갖기 마련이니까. 어느 순간 감정은 마치 자신이 혁명가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위에 군림하려던 이성을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게 된다. 이것이 비극의 순간일까? 아니다. 모든 사회적 통념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지키겠다는 결단은, 주인공을 통념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만드니까. 사랑을 부정하면 자신을 보정하게 되고, 반대로 사랑을 긍정하면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마침내 주인공은 알게 된 것이다. 롤리타에 대한 감정 그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 감정을 적대시 한다면 언젠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mmanuel Kant)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를 무모하게 막아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긍정하고 지헤롭게 발휘하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의 이성 말이다. 철학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스피노자 만은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에 주목한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스피노자가 피력했건 감정의 윤리학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슬픔 중 어느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들의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 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 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준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48가지 감정들은 네 개의 부로 배치했다. 이는 인간의 상상력을 네 가지 물질적 상상력으로 설명했던 '가스통 바슐라르'를 따라 구성한다. 땅, 물, 불, 바람, 작고 귀여운, 그리고 기초적인 감정들은 대지에 피는 새싹과 같고, 변덕스럽지만 때로는 격정적이기도 한 감정들은 굴곡과 고도차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소리를 만드는 시냇물을 닮았으며, 화려하지만 곧 쇠락하기 쉬운 감정들은 모닥불의 가녀린 떨림을 연상시키고, 마지막으로 차갑고 허허로운 감정들은 들리지 않는 차가운 바람소리를 연상시킬 것이다.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야심에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다. 더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다양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깊어서 주변의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 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 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인간과 관련된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다."(마르크스)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등이 가려운 것 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을 수도 있다. 
  헨리 제임스 <여인의 초상(1881)>, 멜빌의 <모비딕>, 대니얼 호손 <주홍 글씨> 19세기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고유한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이런 고뇌의 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 욕망하는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 보아야만 한다. 실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나의 것이었는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법대에 간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입학하자마자 우리에게는 "이제 시작이다. 멋지게 살아가야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반면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었다면,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이제 완성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아우라' 성스러운 사람의 머리 뒤편에 생기는 후광
 꽃은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 나무는 매년 기적처럼 새로운 꽃을, 작년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신선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만 동경하고 있느라 올 해 필 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과거에 피웠던 꽃망울에 대한 동경일랑 접고, 지금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햇빛도 있을 것이고, 뿌리를 뽑을 것 같은 비바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당당히 맞설 때에만, 삶의 절정은  또 다시 찾아온다.
  사랑은 언제 우리를 떠나는가. 상대방이 더 이상 내 삶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 가능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한 때는 주인공이었던 사람이 이제 익숙한 풍경처럼 평범해지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느낌, 경험, 이럴 때 우리는 불행히도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실제보다 과대한 평가를 내리리 마련이다. 그래서 애인이 배가 나왔다면 그를 푸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랑은 두 사람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어쩌면 과대평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루먼 커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불안한 사랑 vs 불행한 안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랑수아즈 사강
시어도어 드라이저 <미국의 비극>
  니체는 선과 악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는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2014.5.25.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