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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유학의 변신은 무죄, 공자 & 맹자, 강신주, 김영사, 2014​

햇살처럼-이명우 2019. 8. 2. 08:23
556. 유학의 변신은 무죄, 공자 & 맹자, 강신주, 김영사, 2014

공자의 '서恕'의 원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남이 먼저 하도록 해주는 윤리적 배려의 행동'은 일생 동안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가르쳤다.
공자가 2,000여 년 전 육체적 형벌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은, 얼핏보면 진정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자가 피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통치자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는 이상적인 방식을 모색했던 인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그가 진정한 휴머니스트 였다면 통치자와 피통치자, 즉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적 위계질서 자체를 문제 삼았을 것이다. 공자는 가장 효율적인 통치 방법과 신분 사회의 확고한 질서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안정되고 질서 잡힌 사회는 피통치자들이 '도덕적 수치심 恥'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공자는 이를 위해 먼저 주례를 잘 지켜야 한다고 통치자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한비자와 공자의 정치철학, 즉 '법에 의한 통치 法治'와 '예에 의  통치 禮治'는 타율적 복종인가, 아니면 자율적 복종인가 하는 차이점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자로에게
"유由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그 것이 앎知이다."
  공자의 자기 반성이 결국은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을 낳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아론唯我論은 단순히 '나만 존재한다'는 식의 좁은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면화 된 공동체의 행위 규범이 유일한 행위 규범이다.'는 식의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좁은 의미의 유아론 보다 넓은 의미의 유아론이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후자의 유아론 속에는 자신이 믿는 행위 규범을 공유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자 」의 '소용돌이치는 물(단수湍水)와 「맹자」의 물(水)
  고자가 말했다.
  "본성은 '소용돌이 치는 물(단수湍水)'과도 같아서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흘러간다. 사람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과 서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맹자가 말했다.
  "물에 진정 동서의 구분은 없지만 위아래의 구분도 없겠는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없다. 지금 물을 쳐서 튀게 하면 이마를 지나가게 할 수 있고, 세차게 밀어 보내면 산 위에도 있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외적인 힘(勢)이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사람을 선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본성은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맹자>><고자(告子) 上>편
  순자荀子(B.C 298?~238)는
  '본성(性)의 영역'과 '인위(僞)의 영역'을 구별하는 것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본성의 영역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인위의 영역은 우리의 의지와 실천에 의해 변경 가능한 영역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맹자가 예를 사단이라는 형식을 통해 본성의 영역 안에 포함시킨 것과는 달리, 순자는 그것을 인위의 영역 안에 포함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순자는 성악설을 통해 예를 외재성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의 성인들은 주체적인 의지와 노력, 즉 인위에 의해 예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에 만들어져 있는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예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학습해야만 했다. 결국 순자가 본성의 영역과 인위의 영역을 구분했던 이유 역시 예의 외재성을 회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욕망을 부려도 채워지지 않으면(그것을 끝없이)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욕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분수와 한계가 없으면 서로 다투지 않을 수 없고, 서로 다투면 사회는 혼란스럽게 되며 혼란해지면(한정된 재화가) 바닥이 나고 만다. 선왕은 이러한 혼란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예의를 제정하여 사람마다 분수를 정하고, (이 분수에 따라) 사람의 욕망을 정도에 맞도록 길러주고, 사람의 욕구를 채워 주었다. 이 욕망이 결코 재화를 바닥 내는데 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고, 재화가 욕망 때문에 바닥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이 둘(욕망과 재화)이 서로 연관되어 발전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순자荀子에 의하면 예는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그것을 충족시켜줄 재화의 유한성이라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외적인 공권력과 사회규범이 없다면 인간의 욕망과 부족한 재화는 모순 관계에 빠지고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 상태에 빠질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질서를 해칠 가능성에 있다는 荀子의 비판은 바로 이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현실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순자, 예론(禮論)편>
  순자荀子는 인간의 욕망과 재화의 모순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예보다 더 훌륭한 사회 규범이 존재한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순자의 체계는 비판에 열려 있는 철학 체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순자의 문하에서 한비자라는 법가사상가가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비자가 자신의 스승 순자荀子와 다른 점은 무한한 욕망과 부족한 재화 사이의 모순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가 아닌 법法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정이(程頤 1032~1107,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의 스승, 정주학의 창시자)
  중국 북송의 유학자, 형 정호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라고 일컬어지며,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기이원론'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성리학性理學
성리학자들은 불교이론 자체에 유학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차이점    (유학) : 측은지심 등 네가지 도덕 감정을 인간의 본성으로 봄, (불교) : 맑고 깨끗한 마음 상태를 인간 마음의 本性으로 봄
공통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을 갖추고 있음, 내면을 살펴보는 수양 방법이 유사함
불교佛敎가 모든 외부적인 사태를 마음으로, 나아가 불성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맹자도 유학의 가치 덕목인 인의예지를 사단이란 형식을 통해 마음의 본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분명히 달랐다. 불교가 '맑고 깨끗한 마음 淸淨心'을 인간 마음이 지닌 본성으로 보았다면, 맹자는 측은지심 등 네 가지 도덕감정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수양의 방법에서는 동일한 모습을 보였다. 불교나 맹자는 자신의 마음이 지닌 본성을 내성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본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자신도 함께 물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를 못 본 척할 수 있다. 이 경우 측은지심(단순한 동정심)이 생겼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을까? 정약용에 의하면 그것은 측은지심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택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주희가 우리의 마음에 측은지심을 일으킨 본성이라는 내적 원인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켰다면, 정약용은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외적방향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다. 결국 정약용에게 인의예지는 마음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덕목들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의 결단, 혹은 의지의 작용이다.
  정약용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세 가지 특성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본성의 측면이고, 둘째는 권형(저울질한다)의 측면이며, 세째는 행사(실천한다)의 측면이다. 이 중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은 본성 부분이다. 그 스스로 본성의 논의가 불교적이라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용이 말한 본성의 의미는 주희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주희는 마음 속 깊숙이 내재한 인간의 본질 또는 세계의 본질을 본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약용는 본성이 인간만이 가진 도덕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본성을 '기호嗜好'라고 정의한다. 다시말해 본성은 사태 또는 타인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도덕적 감정일 뿐이다. 때문에 그의 본성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항상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도덕 감정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저울질 한다'는 뜻의 권형은 주체의 선택과 결단, 즉 주체의 의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실천한다'는 뜻을 지닌 마음의 셋째 측면인 행사는 주체가 직접 몸을 움직여서 자신이 선택한 것을 행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마음의 세 측면을 측은지심의 사례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이가 물에 빠지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아이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성이 기능하는 측면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우물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아이를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이 과정이 바로 우리 마음의 권형이 기능하는 측면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측은지심을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일방적으로 따라야만 한다면 주체의 결단과 의지는 정약용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결심을 했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우물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행사가 기능하는 측면이다. 물론 행사라는 실천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어린 아이를 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실패할 수도 있고, 우리마저도 함께 우물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유自由' 스스로에 근거한다.
2014.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