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道에 딴지 걸기, 장자와 노자, 강신주, 김영사
道, 즉 길을 찾지 마라.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남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엇보다 국가와 통치자에 자신의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제국을 소유하려면 통치자가 무위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장자는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연못 물 같은 맑은 마음, 즉 선입견이 전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렇게 해야만 풍속이 다른 공동체에 가서도 그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영교과서를 여러 권 읽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수영을 어린아이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수영을 배우려고 물과 소통할 때, 수영교과서는 오히려 물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물의 운동과 흐름에 맞추어 조절한다. 물과 소통한다는 것은 내가 물 속에서 수영한다는 것이지, 수영교과서가 수영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생각하면 수영교과서도 누군가가 물과 소통한 뒤 쓴 것이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소통은 항상 매개 없이 이루어진다. 이런 무매개적이라는 성질을 함축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이름 뿐인 허구적 소통일 뿐이다.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으면, 타자와 공생하는 삶은 결국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타자성에 근거해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주체가 타자를 삶의 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스님이 자연을 사랑한다면 또는 자연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오히려 조용히 암자를 허물고 그곳을 떠나야 한다. 1년도 되지 않아 꽃은 폐허가 된 암자의 이곳저곳에서 피고 싶은 데로 피어날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처음 보는 진드기도 생길 것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곤충의 먹이 사슬도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멀리서 바라 본 내면 속의 풍경처럼 아름답지도, 조화롭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을 소재로 삼은 동양화는 거의 모두 관념화에 지나지 않는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아무리 아름답게 그려도 그것은 살아있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홀로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신다. 종이를 꺼내 기개있게 난을 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매개된 외면일 뿐이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차이의 인정과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담론에는 강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타자는 내면과 외면이라는 동일성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타자(他者)다.
<제물>편에 나오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은 걸어간 뒤에 생기는 것이다."
<노자>의 저자 노담. 주(周)나라의 문서관리 책임자 또는 역사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유가이념을 생각해보면, 노자가 권하는 내성의 방법이 지닌 고유성이 잘 드러난다. 유가 철학이 자신(身)의 확장이 집(家)이고, 집의 확장이 국가(國)이며, 국가의 확장이 전체 세상(天下)이라는 연속성을 주장한다면, 노자는 자신의 작동원리, 집의 작동원리, 국가의 작동원리, 전체 세상의 작동원리는 각각 고유한 원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가 철학에서는 자신, 집, 국가, 전체 세상의 작동원리가 서로 구조적인 유사성(structural similarity)을 가지고 있다면, 노자는 이 각각의 작동원리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자 철학은 부족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남음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남음이 있는 사람은 그 남음을 자신만의 소유로 삼을 수도 있고 재분배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할까? 역설적이게도 남음을 자신만의 소유로 하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 보존할 수는 있지만, 끝내 부족한 사람들의 저항을 받아 모두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마저 위태롭게 된다. 그러나 남음을 재분배 하려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에게 남음을 줌으로써 오히려 더 커다란 남음을 확보할 수 있다.
노자에 따르면 강과 바다에 물방울이 하나하나 모여드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강과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주가 자신이 가진 것을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피통치자에게 재분배 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위해 도입한 비유다.
노자가 권하는 무위(無爲)정치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관계가 활발해져서 백성이 더 이상 수탈을 폭력이나 강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무엇을 뇌물로 주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선물로 착각해서 그 대가로 반드시 무엇을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결국 노자의 무위정치는 통치자의 처지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인 통치다. 이것은 피통치자의 '자발적 복종(spontaneous submission)'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가 재분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피통치자는 그 대가로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친다거나 국가가 세금을 거두기 전에 알아서 세금을 낸다. 피통치자는 그렇게 하면 그것이 반드시 자신을 위해서 재분배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국과민'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통치자가 행해야 하는 세 가지 정책이다.
1.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2. 백성이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거주지를 옮기지 않게 하라.
3. 문자를 사용하지 않게 하라.
새로운 국가는 힘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그 국가가 지속되려면 은혜라는 이름으로 민중에게 원활하게 재분배를 계속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더 많이 욕망하도록 만든다. 인간에게 선천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소비대상이 다양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소비대상이 팔려야 하기 때문에 은밀히 인간 욕망을 길러내는 것이다.
노자의 '밝지만 미묘한' 전략은 은행의 투자 전락에 비유 될 수 있다. 은행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행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지 결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피통치자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는 것은 그 이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지 피통치자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국가는 재분배가 아니라 항상 수탈을 먼저 수행한다. 국가는 먼저 수탈해서 피통치자의 삶에 결핍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서 재분배를 시행함으로써 그 결핍을 채워준다.
'빼앗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는 노자의 테제에는 매우 중요한 뜻이 하나 더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빼앗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사실 매우 간단한 경제학 공식이다. 재분배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니체<도덕의 계보학>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저지능력이다......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교할 수 있다......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심리학의 명제다.
서양의 커뮤니케이션과 동양의 소통
중국에서 소통은 철학적 핵심 범주로 쓰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 개념은 치수(治水) 사업이나 동양 전통 의학과 관련해서 많이 쓰였다. <<수경주(水經注)>>(권4) <하수(河水)>편을 보면 '疎通'은 치수 사업을 할 때 '물길을 터서 疎' '연결한다. 通'는 의미로 쓰였다. 또 <<유경(類經>>(권20)<기항(奇恒>편을 보면 인체의 병증과 관련해서 '막힌 기를 터서 疎' '연결한다 通'는 의미로 쓰였다.
서양에서의 Communication 이라는 말은 'communis'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코뮤니스(communis)'라는 말은 '공유된, 일반적인,', 공적인' 이라는 뜻이다. 이 라틴어의 반대어가 '개별적인', '사적인' 의미의 '프로프리우스(proprius)'이다.
결국 'communication'은 개별적인, 사적인 개체를 '어떤 공동체에 편입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서 'communication' 개념에 들어있는 폭력성이 은근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와 적절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라기 보다는 타자를 '자신의 공동체'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성은 '파문'이라는 뜻을 가진 'ex-communication'에 잘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타자를 공동체에 편입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면, 서양에서는 타자를 '공동체 community' '밖으로 ex' 내쫒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동양의 소통과 서양의 커뮤니케이션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서양에서는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한 반면, 동양에서는 '트다'라는 의미에 집중했다. '연결되기 通' 전에 먼저 서로 '트임 疎'이 있어야 한다는 동양의 생각. 장자는 <인간세>편에서 멋진 비유를 한다. 타자와 소통하는 것은 '날개 없이 나는 방법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 친숙한 세계를 버리는 것은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다.
기존의 친숙한 세계를 해체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마치 기존의 물줄기를 새롭게 터야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동양의 '트림 疎'이라는 소통원리는 장자의 '비움 虛'을 의미한다. 먼저 터서 비워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타자와 '연결될 通'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단순히 말로만 타자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정말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물을 때 '비움 虛'과 '트임 疎'의 중요성 내지는 '비운 虛'과 '트임 疎'이 얼마나 힘든 자기 수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자의 '虛舟'와 '바다새 이야기' 를 , 두 가지 소재로 에피소드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
2014.7.12. 토요일 아침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57. 오즈의 마법사 1~14권, 프랭크 바움. (0) | 2019.09.09 |
---|---|
556. 유학의 변신은 무죄, 공자 & 맹자, 강신주, 김영사, 2014 (0) | 2019.08.02 |
554.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민음사, 2012 (0) | 2019.08.02 |
553. 위대한 개츠비(Great Gatsby), F 스캇 피츠제럴드, 민음사, 2007 (0) | 2019.08.02 |
552. 감정수업, 강신주, 민음사, 2014 (0) | 201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