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 아미엘의 인생일기,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2006, 동서문화사
1846~1891 동안의 일기 기록, 35년 동안,
김재현 본부장님의 선물, 6개월 넘게 걸려서 읽었다.
아미엘(1821.9.27.~1881.5.11.) 60세에 세상을 떠남. 25세부터 세상을 떠나기 13일 전까지 일기를 썼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고, 본질상 심리적인 것이다.
차례
인생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정신에 대하여
정신에 대하여
사상에 대하여
남자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가장 아름다운 시는 인생이다.
짓는 데로 읽히고, 감흥과 의식이 맺어져서 서로 돕고, 스스로 작은 우주임을 알고, 우주적이고 신적인 시의 작은 후렴을 신 앞에 연주한다.
이중의 행복,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 기꺼이 나를 계발해주고 마법사의 책처럼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이 일기.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내부에는 언제라도 의논할 수 있는 신탁, 바로 우리 내부의 신인 의식 또는 양심이 있다.
처세의 길에서 습관은 격언보다 낫다. 습관은 살아있는 격언이 본능이 되어 체화된 것이다. 격언을 고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책의 표제만 바꾸는 것이다. 새로운 습관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삶의 실체에 파고드는 것이다. 삶은 바로 습관이 짜내는 옷감과 같은 것이다.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칠 줄 모르는 너의 가슴을 새벽 이슬로 채워, 더욱 높아지게 하라." 지당한 말이다. 하루하루의 새벽은 생활과의 새로운 계약에 서명한다. 아침 공기는 혈관과 골수 속에 새로운 밝은 기운을 불어 넣는다. 그날그날은 인생의 현미경적 반복이다. 아침은 모든 것이 유년시절처럼 상쾌하고 편안하며 가볍다. 대기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진리도 한결 더 투명해진다.
사실은 필요하지도 않고 의무도 아닌데도 우리의 운동을 방해하고 있는 수많은 필요와 의무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간섭과 방해를 받고 있는지 알고보면 놀라울 정도다. 깨끗하게 마무리 한다는 것은, 곧 깨끗하게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구별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깨끗하게 마무리 한다는 것은, 곧 깨끗하게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정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것들은 나중에 우리 앞을 버티고 서서 길을 가로막게 된다. 그러한 일들을 처리하고 마무리하여 다음에 올 날을 존중하기 바란다. 우리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마무리하는 것이 으뜸이다.
비밀의 법칙, 식물처럼 하라. 사상이든 감정이든 네 안에 싹트는 모든 것은 어두운 곳에서 보호하고, 완성된 뒤가 아니면 밝은 곳으로 꺼내지 말라. 성장하고 , 생활하고 싶다면 뿌리를 드러내지 말라.
친절은 임기응변의 원리이며 타인에 대한 존경은 처세술의 첫 번째 조건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 자기 혼자서만 양심을 지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여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의 교만을 꺾어라. 요령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허리를 낮춰라. 강해져서 그 여론을 극복하라.
한가로운 산책은 육체와 정신에 탄력을 회복시켜주는 목욕이고, 자유의 징표와 축제이며, 발랄한 향연, 들판을 누비며 꿀을 따는 나비의 향연이다. 정신이 곧 나비이다.
유년 시절에 나누는 최초의 대화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던가? 이 사명의 신성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나는 일종의 종교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와 유년의 마음은 신성하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 결실을 맺는 말을 뿌리는 아버지는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들을 종교와 기도와 무게로 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 신의 지배에 힘을 보태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흙에 떨어지든 마음에 떨어지든 씨앗은 모두 신비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심는 것이다. 때 맞춰 들은 한마디 말의 영향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계시이며 파종이라는 것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다.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본능을 다스리자. 기운을 차리고, 나를 믿자.
가장 아름다운 시는 인생이다. 짓는대로 읽히고, 감흥과 의식이 맺어져서 서로 돕고, 스스로 작은 우주임을 알고, 우주적이고 신적인 시의 작은 후렴을 신 앞에 연주한다.
오늘은 간밤에 잠자리에 든지 3시간 밖에 안되었는데 눈이 떠졌다. 어지간히 균형감각은 되찾았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이렇게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 감각이 다를 수 있는 것일까? 밤의 불빛과 아침의 불빛은 서로 다른 사람을 비추고 있다. 깨어 있는 것이 하루의 끝인지 하루의 시작인지에 따라 이렇게도 다르단 말인가! - 밤에 깨어있는 것은 흥분, 긴장, 상상, 정신의 다양하고 활발한 상태이며, 아침에 깨어 있는 것은 안정, 명상, 집중, 정신의 단순하고 고요한 상태이다. 하나는 뜨거움, 하나는 차가움, 한쪽은 생산하고 한쪽은 수용한다. 전자에 있어서는 살고, 후자에 있어서는 자신이 살고 있음을 느낀다.
어린이는 관상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유일한 부적은 중심에 집중된 힘, 즉, '의무'라고 부르는 빛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양심)이다. 이 불꽂이 우리 삶의 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만이 파도가 미쳐 날뛰는 광대한 바다 속에서 흔들이고 있는 우리의 방주를 인도하여, 우리에게 바다의 유혹과 괴물, 밤과 홍수로 불어닥치는 폭풍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게르만 민족은 명상한 다음에 느끼고, 남방인들은 느낀 다음에 표현하며, 앵글로 색슨은 의욕을 내어 실천한다. '안다, 느낀다, 실천한다' 이것이 독일, 이탈리아, 영국의 3부 합주이다.
행복은 추한 것을 없애고,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있게 한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젊은 아가씨의 뺨에 사랑의 장미가 피어나는 것이나 투명한 눈길 속에 첫사랑의 빛이 눈뜨는 것을 분명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조차도 이 기적을 당할 수가 없다.
세상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매력이 있지만 위험하다.
'사람'에게는 얼굴이 셋 있고, 따라서 입도 셋 있다. 첫 번째 입은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선언하고는 관습이라 불리며, 두 번째 입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선언하고는 여론이라 불린다. 세 번째 입은 '사람'이 아름답다거나 선하다는 것을 선언하고는 유행이라 불린다.
어떤 일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도대체 그것을 왜 하는지, 그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하기 전에 해버리는 편이 나은 경우가 자주 있다.
한 없이 전주만 구상하고 있다가는 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 일기는 300쪽짜리 씩 총 46권의 많은 수의 서적에 해당하는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나 비평가는 그 정신을 파악하고, 얼마간의 전문적인 지식과 겸손함을 가져야 할 것이다. 확실히 이런 장점은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명쾌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명한 사람도 자기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으면 그 총명함을 잃는다. 자기를 비평하지 못하는 비평가는 참된 비평가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은 비판하는 것보다 4배나 어럽다. 비판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은 의견을 기술하는 것에 머물지만, 이해한다는 것은 일 자체의 다양한 사건 속으로 객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구는 한 알의 모래에 불과하지만, 한 알의 모래는 작은 세대이다. 보는 방식에 따라 여러가지가 된다.
하나의 전체는 단지 부분의 집합일 뿐 아니라 또 다른 것이 더해져 있다. 개개의 부분에 없는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관계, 조직, 종합, 조합문자, 분해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각각의 세 음을 듣는다 해도 화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남이 되어 갈라선 남자와 여자는 부부의 반이 아니다. 화음에는 3분의 1이 없으며, 부부에게는 반이 없다.(000000)
거울이 부서러진 분말은 거울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사물의 분쇄는 사물을 설명하는 예비적 방법에 불과하다. 썩고 파괴된 정신은 세부적인 것에서 헤매느라 나무의 전모를 바라보지 못한다. 하물며 숲이 표현하는 아륾다움을 느끼겠는가? 본해적인 미세측량 방법은 사유과 철학의 사멸이다.
찬미는 숭고한 위대함에 바쳐야하는 것이지 편집적인 완강함에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소의 영광을 전부 얻기 위해 구소의 불행까지 이어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실행보다도 신성하다고 보았다.
예술은 나타내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
사물이나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나, 있을 수 있는 모습을 보는 것, 응당 있어야 하는 모습을 보는 것, 올바른 비평가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행하고, 이 세 능력을 하나로 융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단 그 사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사로잡혔다가 풀려나고, 환각과 환멸, 심취와 실망이 필요하다. 아직 매력을 받지 않는 것도, 매력에 걸리지 않은 것도 그 자격이 없다. 일단 믿은 다음에 비판을 가한 것이 아니면 올바른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해하려면 자유를 가져야 한다. 더구나 한 번은 자유를 잃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연애에 대해서나 예술에 대해서도, 종교에 대해서도, 애국심에 대해서도 참이다. 동감은 비평의 첫째 조건이다. 이성과 정의는 먼저 감동을 전제로 한다.
'일기'의 주요한 효용은 정신의 보전과 양심의 균형, 즉 내면적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분석적 정신을 날카롭게 하고, 표현기술을 기르는데는 지극히 좋은 방법이다.
인간은 어느 시기에 사물을 가장 올바르게 볼까. 노년에 들어선 뒤이고, 갖가지 병이 인간을 박약하게 하거나 쉽게 화내게하기 이전임이 틀림없다. 고대 사람들은 진정한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같은 감정을 갖고 있고 욕심이 없는 노인은 관조한다. 그 관조야말로 사물의 상대적, 비례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사물을 가장 올바르게 볼 것이 분명하다.
세 번 검열한 뒤가 아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라. 최초의 검열에서의 비관과 두 번째 검열의 낙관을 신용하지 말라. 뒤이어 상반되는 두개의 지나침을 제거하고 진상에 도달하라.
행복이란 것의 참된 이름은 만족이다.
독일의 격언은 말한다. "정직함이 가장 오래 몸을 지킨다."
사물을 기다린다.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면 정력을 소모하게 되지만, 사물을 상대로 하게되면 기력이 회복된다.
우리의 것도 아닌 미래를 깊게 고민하여 평생을 그늘지게 한들 무엇이 되랴.
행복을 맛보자. 봄을 느끼자.
내일의 100보다 오늘의 50. 그 곳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나머지는 이내 다가올 미래마저도 신에게 맡기자.
18세 때부터 60세까지 1만5천쪽의 일기.
2014.11.9. 일요일 중앙마라톤을 포기하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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