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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애빌린 패러독스), 제리 하비, 엘도라도, 2014

햇살처럼-이명우 2020. 3. 23. 13:18

601.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애빌린 패러독스), 제리 하비, 엘도라도, 2014

 

인트로

1.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왜 그들은 애빌린으로 갔을까?

  원하지 않는 침묵의 결과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는 5가지 이유

  애빌린 패러독스에서 벗어나려면 알아야할 6가지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자세

  paradox 왜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가?

 

2. 현실에 길들여진 사람들

  케구리 연못에 숨겨진 31가지 진실

  케구리 연못에서 벗어나는 방법

  paradox 아직도 변화를 두려워 하는가?

 

3.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

  아브라함 이야기 : 관료주의의 탄생

  당신의 이웃에 아브라함이 있다.

  직장에서의 복종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

  새로 쓴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paradox 시키면 시키는데로 해라.

 

4.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

  아소 기장의 선물 : 진실이 용서를 낳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유머와 부조리 이해하기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 

  이타주의 실현의 기회

  용서가 주는 희망

  paradox 누구의 잘못인지 아무도 모른다.

 

5. 영혼을 파는 사람들

  아이히만 이야기의 교훈

  조직의 살인자와 공모자들

  무엇이 공모를 정당화 시키는가?

  아이히만 vs 덴마크인

  왜 악마와 거래하는가?

  조직 문제의 해결책

  paradox 가지를 자르면 나무가 죽는다.

 

6. 변명하는 사람들

  집단의 폭압이라는 환상

  서부영화로 배우는 건 스모크 현상

  자유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위험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선택은 무엇인가?

  paradox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

 

7. 서로 돕지 않는 사람들

  서로 돕는 것은 부정행위다?

  부정행위에 관한 새로운 정의

  엇갈린 주위의 반응

  평가의 딜레마 : 왜 시험을 보는가?

  낯섦에 대한 도전

  희망의 빛

  paradox 아름다운 협동, 커닝을 허용하라.

  감수의 글 : 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을까?

 

 

  '애빌린 패러독스'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아무도 원치않는 여행을 하는 그러한 성향을 말한다. 어느 조직이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게 되면, 그 조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경영이론 전문가들은 갈등관리가 조직이 직면한 가장 큰 난제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애빌린 패러독스의 논리에 따르면 합의관리를 하지 못함으로써 조직이 기능장애에 빠지는게 더 큰 문제다.

 

  대체로 합의관리를 하지 못하는 조직들은 다음 5가지 특성을 보인다. 첫째,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이 처한 상황이나 당면한 문제의 본질에 대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둘째,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요구나  생각을 서로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해서 서로가 조직의 상황을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셋째,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조치에 대해 '무언의 합의'를 한다. 넷째, '무언의 합의'에 동참하게 된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느끼게 되며, 그로 인해 친숙한 몇몇 구성원 사이에 집단을 형성하고 다른 집단을 비난한다. 애빌린 패러독서에 빠진 구성원들이 상급자를 비난하거나 서로를 탓하는 건 흔한 일이다. 다섯째, 만약 조직의 구성원들이 합의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끝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런 악순환은 계속 반복되면서 더 강해진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는 5가지 이유는 첫째,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애빌린으로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첫번째 지표가, 통상적으로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대개의 조직원들은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에 따라 실행 불가능한 연구 프로젝트를 추구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렇듯 그들은 불안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손실이나 조직의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무모한 선택을 한다. 이는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둘째, 부정적인 상상이다. 때로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는 것에 부정적인 상상을 하곤 한다. 이는 불안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불안감은 조직 구성원들이 자신이 소긴대로 행동했을 때의 결과에 대해 갖는 부정적인 상상에 의해 야기된다. 부정적인 상상은 상상을 한 사람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정적인 상상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취해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셋째, 실질적인 위험이다. 위험은 우리 삶의 현실이며 우리 존재의 조건이다. 이는 우리가 직면한 어떤 사건에 취한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뒤따른다. 간혹 그 결과가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운 상황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큰 위혐을 무시한 채 조직을 애빌린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넷째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조직의 행동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다른아닌 분리, 소외,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러 연구결과와 경험에 비춰볼 때 소외되는 것, 즉 추방이나 배척이 가장 두려운 결과이다. 독방감금의 가장 큰 위력은 신체적 고통이나 물리적 결핍에서 오는게 아니다. 애빌린 패러독스의 중심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위험감수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 두려움은 무의식적으로 표현되며 결국 조직의 자지 파괴적인 결정을 초래하는 집단기만의 원인이 된다. 다섯째,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 역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취한 행동 때문에 조직 내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할까봐 두려워 '무언의 합의'에 가담하게 된다. '충성심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조직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게 두려워 소신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분리와 소외가 두려워서 취했던 행동이 오히려 그토록 두려워하던 분리와 소외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상상 속에 존재했던 불확실한 가능성을 실제 발생한 확실성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러한 역전의 이유에 대해 앨빈 토플러는 "이들은 우리의 문화가 기술, 경쟁, 개인주의, 일시성, 이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외로움의 공포는 자주 경험하지만, 유대관계가 주는 만족감은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소외의 현실은 배웠지만 유대관계가 주는 호혜적인 기술은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이미 지구상에 멸종한 공룡들처럼 자기 파괴적인 결정을 하는 성향이 있는 조직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애빌린 패러독스에서 벗어나려면 알아야 할 여섯가지가 있다. 첫째,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 논쟁이다. 책임을 전가하거나, 남을 탓하는 행동은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진 조직이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증상이다. 대체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서로에게 떠 넘긴다. 이러한 역할 떠넘기기는 타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역기능도 우려된다. 왜냐하면 일단 기업이나 조직이 합의관리에 실패해 애빌린에 도착하게 되면 모든 조직구성원이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논쟁과 비난은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써야할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이다.

  둘째는, 공모의 상호작용이다.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공모(결탁)'는 애빌린 패러독스의 가장 기본적 요소다. 상사의 독재에 공모하는 부하직원이 없는 한 독재하는 상사는 나오지 않으며, 부하직원의 아부에 공모하는 상사가 없는 한 아부하는 부하직원도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애빌린으로 향하는 자멸적 조직의 각 구성원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동료, 상사, 부하직원과 공모해 위험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모든 구성원들에게는 조직이 애빌린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책임전가를 하기 위한 대상을 찾는 것은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합의를 무시해 곤경에 처하게 된 조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개인에게도 심리적 위한을 주지 못한다. 책임을 전가하는 소란은 위안은 커녕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 밖에는 되지 않는다.

  세째, 문제 해결의 책임전가. 애빌린의 함정에서 우리를 건져낼 책임자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는 또 다른 질문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사장이나 고위공직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애빌린 패러독스의 치명적인 영향을 제거할 힘은 그러한 현실에 대항해 생기는 위험을 감수할 결심만 한다면 누가 됐든지 조직을 애빌린 패러독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다.

  넷째, 현실인식과 그리고 대조. 조직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현실'과 구성원들의 '인식'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대조'란 여기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 관계를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조직이 처한 현실의 본질이 '합의'의 문제인지 아니면 '갈등'의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문제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조직이 미처 모르고 있으며 합의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 해결책을 찾는 것 외에, 이미 합의된 사안에 대한 또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것도 조직의 변화와 효율성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진짜 갈등과 가짜 갈등, 애빌린 패러독스를 분석해 보면 진짜 갈등과 가짜 갈등이 있다. 진짜갈등은, 확실한 이분법적인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진짜 갈등이 발생한다. 가령 "연구보고서를 읽어보니 이 프로젝트가 크게 성공할 것 같네요"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워터게이트를 도청해야 합니다" 와 "나는 반대합니다"와 같이 의견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연출되면 진짜 갈등이다. 가짜 갈등은 무엇일까? '무언의 합의'에 동참하는 것은 자신의 의사결정과는 상관없는 거짓행동이기에 가짜 갈등이다. 그 결과 발생하는 분노와 좌절, 희생양 만들기 등을 갈등이라 부르지만 의견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가짜 갈등이다. 처음부터 아무도 찬성하지 않은 결정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을 때 발생하는 방어적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여섯째, 집단 폭압과 복종, 집단 폭압에 따른 개인이 복종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압력의 강제효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사실 자신들이 잘못한 합의에 따라 행동했으면서도 마치 집단의 강제적 압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같은 경험을 집단의 폭력적인 압력으로 개념화 하고, 이에 스스로 반응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자신이 해야할 일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변명으로 이용된다. 그르므로 지금까지 집단의 폭력적인 압력에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조직내의 수 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집단행동의 표현이고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으로 새롭게 정의돼야 한다.

 

  이러한 애빌린 패러독스는 '대조'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 조직이 애빌린으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면 각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러한 상황의 근원적인 이유가 '합의관리의 실패'인지, 아니면 '갈등관리의 실패'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적극적으로 대조해야 한다. 이 대조는 집단을 배경으로 했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애빌린 패러독스가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공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해결책 또한 집단의 맥락에서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애빌린 패러독스로 이끈 각 개인 또는 하위집단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문제와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꼭 필요한 구성원들을 회의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회의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회의를 소집한 사람, 즉 대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다른 참석자들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설명을 통해 참석자들은 대조를 주도하는 사람이 조직원의 바람과 반대되는 결정을 할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자세.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높은 곳까지 바위를 밀고 올라가는 형벌을 받았다. 산꼭대기에 바위를 밀어올리는 순간 바위가 떨어지고, 다시 밀고 굴러 떨어지고, 영원히 되풀이 되는 형벌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작품에서 '전혀 무의미한 부조리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대개의 직장인들은 회사 안에서 시시포스처럼 하릴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카뮈가 지적했듯이 시시포스는 바위에서 손을 뗀 뒤 그것이 산 아래 원래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잠시나마 자기 운명의 불리함을 깨닫고 결국 그 행위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맞서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불합리한 합의에 맞서는 행동은 시시포스가 수동적이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수용하면서 얻었던 깨달음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맞섬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던 바위 밀어올리기를 잠시 멈추고 조직이라고 불리는 불합리한 삶 곳에서 찰스 스노우가 말한 "우리 스스로 해낸 인생의 승리"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나요?

 

  만일 아무 거리낌 없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그 조직의 수퍼스타이거나 이미 조직을 떠난 사람일 것이다.

 

  대부분 조직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조직의 문제와는 상반되는 행동을 취한다. 아니, 이것에 대해 별다른 표현을 하지 않는다.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또 그것에 따르는 것은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어떤 불안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조직생활을 해보지 않았거나 조직의 생리에 대해 아주 무지한 사람이다. '애빌린 패러독스'는 조직을 경험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진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조직의 압력 때문에 자신들이 진정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조직 속에서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는 일차적 이유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분명히 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거나 또는 조직이 자신이 의지와 관계없이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경우 이런 상황은 아주 쉽게 일어난다. 자신이 스스로 그런 역설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조직원들은 알지 못한다. 위에서 시키는 것을 그냥 따라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에게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흔히 말하는 "다른 대안이 없다"라는 말은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졌다는 것을 가장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증거다. 이런 경우 그들은 원하는 결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애빌린 패러독스'는 '합의관리'의 실패현상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합의'를 해주는 상황 말이다. 실패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랜 관행(케구리 연못)에서 벗어나는 방법 (케구리 vs 사람들)

  - 승진, 해고, 보수, 업적 등은 제로섬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평가하라. 제로섬의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항상 제로로 평가한다. 다시 말해 '네가 이기면 나는 지는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로섬이 아닌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관계의 결과를 그렇게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둘 다 승자가 될 수 있으며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시너지 효과에 힘입어 3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삭이 다가오는 조직의 구조개편과 인사이동에서 자신의 역할도 모른 채, 자신의 '해고 통지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다시말해 이삭은 해고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7절에(창세기 21장) 이삭이 "아버지, 나무와 부싯돌은 있지만 제물로 쓸 양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는 대목에서는 이야기가 더 복잡해집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아들아." 하지만 이 대답은 명백한 기만이며 거짓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미 누구를 제물로 쓸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감원을 걱정하는 부하직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상사가 하는 대표적인 거짓말입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걱정하느라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은 모든 조직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 이유는 용서하는 과정이나 절차,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서함으로써 조직의 구성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시도하며,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면서 커뮤니티를 구축해야 한다.

 

  사과의 기술 - 아소 기장, 자신의 행위 인정. "당신네 미국인들 말대로 내가 멍청한 짓(fuck-up)을 했소."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 "권한은 위임할 수 있지만, 책임은 위임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잘못에 대한 처벌이 엄격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더 높아지며, 심지어 누구의 잘못인지 잘 모르도록 꾸민다. 따라서, 자신의 잘못에 의해 실패한 프로젝트란 결코 없다. 단지 상황이 나빴을 뿐이다. 가능한 모두의 책임이거나 또는 누구의 책임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은 잘못과 실패가 계속 일어나지만 왜 일어나는지 조차 모르고 악순환만 반복되기 십상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거나, 가능한 과거에 해 왔던 일을 고집하는 현상은 모든 조직에서 항상 지적되는 문제다. 변화, 혁신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없다. 실수에 대한 걱정은 조직원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잘못을 용서하는 과정이, 절차, 정책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용서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조직 속에서 진실을 이야기 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하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집단의 폭압이라는 환상

  현대에는 집단 폭압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집단폭압이란 대부분 행동과학자들과 경영이론가들이 우리가 집단에서 도덕성을 잃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을 탓할 때 사용하라고 제공하는 핑계라고 본다. 다음의 두 가지는 이를 뒷받침 한다. 첫째, 불안감, 부정적인 상상, 실질적인 위험, 소외에 대한 두려움,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인 역전 등이 작용해 조직이 개인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집단행동, 즉 애빌린 패러독스를 행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조직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애빌린으로 가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다시말해 모든 참가자들이 아무도 원치않는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 있으며, 각 개인은 집단의 강요가 없는데도 자신의 행동이 집단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집단폭압과 복장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여주는 심리학적인 실험의 결과들을 검토하는 것에 바탕하고 있다. 실제로 집단에 의해 복종을 강요받은 개인과 관련된 연구는 없다. 다만 고전적인 애시(솔로몬 애시)의 실험이 집단의 압력이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심리연구로 간주될 뿐이다.

  애시의 실험에는 7명이 참가한다. 그들은 한 줄로 앉았고, 실험자들은 실험이 매우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기준선이 있고 다른 선 3개가 그려져 있는 카드를 한 번에 두장씩 12세트 카드를 보게 한다. 피 실험자들은 비교선들 중에서 기준선과 길이가 같은 것을 고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실험은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간단해 보인다. 너무 쉬워서 장님이 아닌 이상은 틀릴 수가 없을 것 같다. 여기에서 '눈으로 보기에는'이라고 말한 까닭은 여섯명의 피실험자가 한 명의 진짜 실험자를 속이기 위해 실험자와 비밀리에 협조하기 때문이다. 이 실험공모자들은 사전에 어떻게 대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가짜 피실험자 여섯명의 대답을 다 들은 후, 제일 마지막에 진짜 피실험자가 대답할 수 있도록 순서를 짰다.

  애시는 처음부터 피실험자들 중에 약 절반은 맞는 답("기준선은 'B'와 같습니다")을 이야기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진짜 피실험자를 속이기 위해틀린 답(예컨대 "기준선은 A와 같습니다")을 얘기하도록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진짜 피실험자들은 갑자기 자기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와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의 눈은 '기준선의 길이가 B와 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데, 다른 실험자들은 "기준선은 A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 상황에서 자신의 눈을 믿고 대답해야 하는가? 아니면 귀를 믿고 대답해야 하는가?

  이 실험에 참여한 진짜 피실험자들은 '기준선의 길이가 B와 같다'는 정보가 보이는데, "기준선은 A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눈을 뜬 상태에서 정답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틀린 답을 말하는 피실험자들의 행동을 애시와 기타 학자들은 "개인이 자신의 지성과 정서적 정직성을 버리고,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애시의 실험을 비롯해 그 후 실시된 실험들을 신중하게 살펴보면, 지시를 받은 집단의 피실험자들은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모를 했던 여섯명의 피실험자들은 진짜 실험아에 협박이나 유혹, 조록, 추방, 모욕, 위협, 비하 등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며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피실험자가 느끼는 집단에서의 '분리에 대한 공포'나 의존성 우울증과 쇠약증을 피하려는 본능적이고 실존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공포를 공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내적 공포의 표현은 조직이 구성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외부압력이라고 소개 됐었다. 또한 실험실 밖에서는 이 실험의 결과를 잘못 분석하여, 10대 비행 청소년들에게 가해진 또래 압력의 영향("그 아이들은 본래 착한데, 또래 아이들의 압력 때문에 은행을 턴거예요")에서부터 피그스만 침공(Bay of Pigs.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약 1,500명의 반 카스트로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의 피그스만을 침공했다가 실패한 사건)에 따른 미국의 재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원인으로 이용됐다. 이 외에도 주요 정책 입안자들이 다른 집단 구성원의 압력으로 자신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분리공포에 따른 행동을 어째서 우리는 끊임없이 복종압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걸까? 이는 집단 폭압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허용하는 부정적인 상상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실존하는 무서운 분리위험의 경험에서 우리를 풀어준다.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집단사고의 부정적인 압력 때문에 직원회의 도중에 논쟁이 되었던 문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고, 또래 아이들의 압력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비행을 저질렀다고 확신한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사실 거의 모든 중죄와 사소한 과오에 대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압력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단 압력의 환상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면한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현장에서 작업자들도 종종 애시 실험의 피실험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우선 눈을 통하여 현장의 안전시설과 안전조치등의 시각정보들이 들어온다. 안전시설이 기준과 다르거나,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풀어 놓았다. 관리자들의 지시사항은 귀를 통하여 청각정보로 전달된다. "안전수칙은 반드시 준수하세요" 이런 서로 다른 정보를 받아들인 작업자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작업하고 있는 동료작업자와 함께 작업을 해야 한다면 애시의 실험조건과 딱 맞아 떨어진다. 현장 순회 점검하는 관리자가 이를 발견하고 지적을 한다면 그 작업자는 필시 집단폭압에 의한 결과라고 자기 행동책임을 부인할 것이다. 이때 관리자는 집단폭압의 환상이 사실이 아님을 설득하는 것 보다, 작업자가 자기 행동책임을 부인하는 것을 질책하는 것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작업자가 받아들이는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를 일치시켜주는 일이다.

 

  아담과 이브처럼 우리도 선악과 나무에 열린 사과를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집단의 압력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용기없음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과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조직이 많은 지원과 자유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과를 먹기 위해서는 어렵과 위험한 도덕적 선택을 제시하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가령 일단 새로운 사과를 먹고 나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킨 10대 청소년은 "내 친구가 훔치라고 했단 말이에요"라는 핑계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또 "직원회의에서 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회사중역도 "모두가 그 의견에 찬성하는 것 같아 보였단 말입니다."라고 집단 사고 알리바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학살에 왜 가담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나치 장교에게도 집단압력은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쉽게 댈 수 있는 핑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회과학자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도덕성 마취제가 들어있는 사과를 계속 제공하도록 격려하고 지원한다. 우리에게는 복종에 대한 압력은 물론 집단적인 폭압과 폭도들의 압력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사과가 필요하다.

 

  우리는 최선의 현실적인 예측의 한계내에서 일어나는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 빠르다고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강하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시험은 왜 보는가?(평가는 왜 하는가?)

  시험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는 기회다.

 

  부정행위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기관이 부정행위를 "다른 학생들과 도움을 주고 받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타적인 행동이 비도덕적이며 불명예스럽고 추한 행동이 된다. 남을 돕는 행위를 부정행위로 정의함으로써 서로 돕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 학문적 명예와 정직성을 지키는 일인가? 부정행위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타주의와 공동체 형성, 시너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리더십과 팔로워십 능력의 핵심이 '요령'과 '눈치'라고 하면, 드러내지 않더라도 모두 어느 정도는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영학 책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공감하며 항상 경험하는 것인데 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까? 모두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왜 이것에 대한 경영학 이론이 없는 것일까? 모두들 알고 있지만 조지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속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조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때로는 구성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구성원의 경험은 항상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거나 또는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 조직 속에서 사람들이 불합리한 것에 대한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든다.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진행된다. 모두들 안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한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무기력한 상황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직접 입 밖으로 내기는 쉽지 않다. 용감하게 나서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라고 하고 싶지만 그것은 바로 죽음의 키스라는 것을 안다. 마음 속에 꾹꾹 담아두었다가 술자리에서나 "그 바보같은 프로젝트"를 하려는 사장이나 임원, 팀장을 안주삼아 푸념이나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안다. 

 

 

  항상 '경영'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조직에서는 '성과관리', '팀빌딩', '변화관리' 등의 단어로 사람은 관리와 변화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육되지 않고, 함께 성장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리더십과 팔로워십 능력의 핵심이 '요령'과 '눈치'라고 하면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공감할 것이다. 조직에서 벌어지는 리더십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리더십의 역설을 체험한다. 개인적으로 영웅적이고 훌륭한 리더십을 본받고 싶은데, 실제로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한숨만 쉬게 된다. 나와 너무 다른 영웅적인 사물과 나의 간격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조직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리더의 역할을 하기는 커녕 자신이 속한 팀이나 조직은 자신이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굴러간다고 느끼기 쉽다.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진행되기도 한다. 모두들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 한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무기력한 상황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직접 밖으로 내기는 쉽지 않다. 용감하게 나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고 싶지만 그것은 바로 죽음의 키스라는 것을 안다. 마음 속에 꼭꼭 담아 두었다가 술자리에서나 '그 바보 같은 프로젝트'를 하려는 사장, 임원, 팀장을 안주 삼아 푸념이나 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안다.

 

  항상 경영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정작 조직속에서는 '성과관리', '팀빌딩', '변화관리' 등의 단어로 사람은 관리와 변화의 대상이 되고만다.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다양한 추상적 단어나 키워드를 잘 아는 것이 조직 속의 인간행동 문제나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인간이 조직속에서 일하는 동기의 핵심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조직 구성원의 동기를 촉진시키기 위해 조직의 성과를 잘 내기 위해서는 팀 빌딩 교육, 리더십 훈련, 변화관리 기법 또는 조직문화 변화 세미나가 아니라, 매일 자신이 접하는 사람과 항상 접하게 되는 일반적인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조직속에서도 개인은 얼마든지 스스로를 성장, 발전시킬 수 있고, 조직이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면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조직에서 그냥 '사육(Feeding)'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을 통해 '성장(Growing)' 하는 구성원이 많아서 우리 조직이 정말 월요일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가득 찬 조직이 되기를 희망하며, 나도 그런 노력을 게을리 않겠다. 

 

  제리 하비가 1988년에 쓴 책을 2018년에 지금 읽고 공감한다. 애빌린 패러독스(The Abilene Paradox)를 이해하고, 원칙에 근거한 진정한 용기를 내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월요일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가득 찬 우리들의 조직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The Abilene Paradox), 제리 하비, 엘도라도,2014

 

*제리 하비가 1988년에 쓴 책을 2018년 지금 읽고 공감한다.

 

2018.10.7.일요일 아침, 어제 태풍 '꽁레이' 때문에 취소한 명현동호회 라운딩을 출발하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