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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 나와 마주서는 용기, 랄프 왈도 에머슨, 배진욱 편역, 리더스 북, 2015

햇살처럼-이명우 2020. 4. 29. 17:39

579. 나와 마주 서는 용기, 랄프 왈도 에머슨, 배진욱 편역, 리더스 북, 2015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 79세.

  - 목사 집에서 출생, 하버드 신학부 졸업

  - 1829년 보스턴 제2교회 부목사 서임

  - 1832년 목사직 사임,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다니엘 호손, 토마스 칼라힐과 교분

  - 1834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정착. 저술, 강연활동, 

     사람들에게 인생을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전하면서, 정신적 자아가 물질적 존재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초절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 1882년 콩코드에서 폐렴으로 사망


  '통일성 속의 다양성' 또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미국문화의 특징이 바로 에머슨의 사상에 그대로 녹아있다. 지금도 에머슨은 미국문화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나 자신을 믿어라.', '인간은 홀로 설 수 있고 홀로 서야 한다.',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밖에 없다.' 등의 가르침은 미국인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에머슨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 이래, 그는 모진 가난, 허약한 체질로 인한 잦은 병치레, 형제들의 죽음, 신학상의 회의, 첫번째 아내와의 사별, 자식의 죽음 등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나 에머슨은 닥쳐올 운명을 피하지 않았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머슨은 삶의 순간들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시간을 채우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네 인생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에머슨은 현재의 생활과 일을 충실히 수행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시대정신

  그대 자신을 믿어라.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의 강철과 같은 현이 울릴 때마다 감동한다. 신이 그대에게 맡긴 일, 그대와 동시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세상사의 연결고리를 받아들여라. 현명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그들은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시대정신에 맡기고, 자신의 절대적인 신념을 드러내고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을 다스렸다. 인간은 가장 고결한 마음으로 초절적 운명에 순응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나약한 존재. 큰 변화의 물결 앞에서 도망치는 비겁자가 아니다. 이 세상의 혼돈과 어둠과 갈등을 헤쳐나가는 인도자, 구원자이다.


  아이들은 부끄럼을 많이 타든 대담한 성격이든 상관없이, 장차 우리 어른들을 매우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어른들은 마음이 나뉘어 갈라져 있고, 자신의 목적에 어긋나는 힘과 수단을 철저하게 따져서 생긴 불신으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본성에서 나온 법칙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아주 쉽게 변하고 바뀔 수 있는 이름에 불과하다. 오직 하나 옳은 것은 내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오직 하나 그릇된 것은 내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반대의 소리를 무릅쓰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덧없고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듯 자기를 신뢰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직급과 이름, 큰 조직과 형식적인 기관에 굴복하는 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고매하고 품위있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나를 해치고 마음을 들쑤셔 놓는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몸을 똑바로 하고 마음을 강건하게 하고 씩씩하게 나아가 거칠 것 없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나는 속죄를 바라지 않으며 살고 싶다. 내 삶은 화려하지만 불안정한 삶보다는 진실하고 평온한 삶이 더 좋다. 나는 긴장이 덜한 삶을 살고 싶다. 나의 삶이 건강하고 유쾌하기를 바라며, 식이요법으로 병을 다스리고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기억하라.

  대중의 불만스러운 표정에는 아무 의미없는 나긋나긋한 미소와 마찬가지로 깊은 뜻이 없다. 마치 세상의 동향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신문 기사처럼 오늘은 이런 표정을 지었다가 내일은 저런 표정을 짓는 것 뿐이다. 


나의 가치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알고 만물을 발 아래 두어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곳저곳을 몰래 엿보거나 요리조리 숨어 다녀서는 안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화려한 궁전, 대리석으로 조각 된 위세 당당한 인물들의 동상, 값비싼 책을 볼 때면, 아주 값비싼 고급 자동차를 보는 것처럼 자기와는 인연이 없는 낯선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가치를 초라하게 여기고 가치 있는 것을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것들이 "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라고 묻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원래 당신의 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갈망하고 있다. 머지않아 당신은 능력을 발휘해서 그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그림도 내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이 나에게 명령할 수 없으며 나를 지배할 수도 없다. 그림이 가치가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것은 '나'이다.   


지금 이 순간

  과거에 집착하는 인간은 소심하고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을 뿐 더 이상 강건하지 않다. "나는 이렇다." 또는 "내 생각에는"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대신 어느 성인이나 현자의 말을 인용한다. 그들은 풀잎이나 활짝 핀 장미 한 송이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내 창가에 핀 장미는, 예전에 피었던 장미나, 더 아름다운 장미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 장미는 있는 그 대로 그저 피어 있을 뿐이다. 바로 오늘 신과 더불어 존재한다. 장미에게는 시간이란 것이 없다. 단지 장미로 존재할 뿐이다. 장미는 존재하는 매 순간 완벽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언가를 미래의 일로 미루거나 과거를 돌아본다.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애석해 하고, 지금 자신이 누리는 풍요로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고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 한 인간은 굳세게 살 수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다.   


  "신의 숨은 뜻은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 용기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신이다." <본두카> 존 플레처


  진리와 마주하면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소신이 아니라 진리임을 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진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나와 세계의 관계에서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안다. 계속해서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면서 완벽하게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안다.


  학교는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더라도 숙련이 아닌 창조를 목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의 연설을 들을 때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불충실하거나,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한 것을 보고 그가 얼마나 다양한 삶을 경험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돌들이 채석장에서 나오듯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삶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학문에 힘쓰는 방식이다.  


부자

  부자는 소득이 많고 지출도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소득을 초과하는 지출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이 부자다.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직관을 붙잡아라. 우리는 그 직관이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자주 가볍게 여겼던가!


  자연은 한 눈 파는 것을 싫어한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곧잘 말한다. "얘들아, 그만 떠들과 조용히 밥이나 먹으렴." 이것이 바로 자연의 참 뜻이다.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모든 해로움과 악함은 은혜로운 것이 된다. 우리는 칭찬을 거부하고 비난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리어 힘을 얻는다.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적의 손에 던진다.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적에게 입은 상처는 아물어 죽은 피부처럼 쉽게 떨어진다. 그래서 적들이 승전의 기쁨을 만끽할 때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2016.9.20.(화요일)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