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하이데거, 살림, 2015.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 실존 철학의 대변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 그러나 자신은 존재의 사유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23년까지(여름학기) 그 곳에서 강의하다. 그 해 겨울학기부터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철학을 가르쳤다. 「존재와 시간 」으로 유명해진 그는 1928년에 후설의 자리를 이어받아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와 정교수로 취임했다.
「존재와 시간 」은 '존재'에 대한 전통 서양철학의 이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며 '존재'이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려 시도한 책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그것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존재'나 '있음'을 문제삼지 않고, 오직 '무엇'인가 만을 논의해 왔다. '있음'이나 '존재'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질문의 필요성 마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철학적인 독단이라고 공격하며 2500년 서양철학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말한다. 인간마저 사물의 일부로 취급하는 존재망각의 역사가 인간의 소외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인간' 대신 '현존재'를 사용하는 등 새로운 개념을 통해 전통 철학의 잘못된 범주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는 「존재와 시간 」은 2500년의 서양철학사를 새롭게 써낸 획기적인 작업이다.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철학은 흔히 알듯이 근본원칙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철학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이다. 철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그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앎 따로 삶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이 삶이고 삶이 앎인 그런 사람의 존재방식이 곧 '철학함'의 존재방식이다.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인간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가 속해 있는 삶의 세계에 내던져진 '세계-내-존재'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더 나은 공동의 세계를 함께 노력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기존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자신이 떠맡아야할 과제로 받아서 그것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실존'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이런 실존방식의 하나이다.
20세기 철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1889~1951), 루카치(1885~1971), 하이데거(1889~1976)라는 데에 별 이견이 없다. 언어분석, 논리 실증주의, 과학 철학의 기반을 마련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사회비판 이론과 같은 마르크스 주의의 활로를 놓아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 우리가 다르고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 20세가 철학을 결정지은 대작들이다.
실존은 한마디로 인간의 있음이 단지 사실적인 '눈 앞에 있음'이 아니라 '과제로 부여되어 있음'이기에 그 존재적 독특함은 곧 '존재해야 함'이며 그것도 각자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함'이다. 그래서 오로지 인간에게만 그 있음(존재)이 완성된 존재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은 존재하면서 바로 자신의 존재(있음)가 문제가 되고 있는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금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기를 결단내리고 있는가 하는 그의 '존재 가능'이 결정적이다. 인간은 그가 결정내린 그 '존재 가능'에 따라서 지금의 자신의 존재를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실적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떠맡아(현사실성) 자신의 죽음으로 앞서 달려가보아 자신의 존재 가능성 아래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해서 (기획투사) 결정을 내려 자기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존재 가능을 지금 여기서(결단의 순간) 실현해 나가며 존재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대개 결단을 내리지않고 남이 자신에게 전해주고 있는 '존재 가능'을 인수받아 거기에 맞춰 살아간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들(사람들)'이 지정해 주는 존재 가능을 아무 저항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존재양태를 '비 본래적 양태'라고 말한다. 인간은 대개 이러한 '그들의 세계' 속에서 안온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그 들'의 삶의 논리와 문법을 따라가며 살 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실존은 이렇듯 '그 들'의 세계(사회성)와 '나'의 실존적 세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존재감을 말한다. 사회 세계가 있을 수 없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간의 과제는 이러한 긴장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가 하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언제부터인가 과학의 논리가 삶의 문법을 지배하며 과학이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음을 꿰뚫어보고 그 전도된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과학중심적 태도는 과학을 통해서 보는 것만을 유일하게 타당한 시각으로 간주하여, 신적인 것을 내몰고 성스러움의 영역을 폐쇄하며, 예술을 사적인 감정의 영역에 가두어 놓고, 윤리도덕을 행위조절 기능으로 평가절하 하기에 이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은 삶의 문법을 과학의 논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삶을 과학의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삶이 간직하고 있는 다양한 차원과 풍부한 논리를 되살리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자신의 학문대상으로 삼는다. 그 전에는 철학도 자연을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철학은 자연을 자신의 대상으로 주장하기 위해 과학에 맞서 자신의 독특한 학문방법을 정당화해야 했다. 과학은 자연을 수량화시키고 계량화시켜 반복가능하고, 제작가능하고, 생산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경험적인 방법을 통해 검증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검증 가능한 방법을 확보하고 있는 학문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영역을 전부 자신들의 학문영격이라고 선언한다. 철학은 자연의 영역을 빼앗기고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권리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다른 대상 영역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심리 현실과 논리현실, 그리고 역사현실이다.
이러한 과학중심주의를 실증주의라고 말한다. '실증주의(Positivismus)'라는 낱말에는 라틴어('Positum.포지툼)'이 들어있다. '포지툼'은 주어져 있는 것 또는 정립돼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주어져 있는 것'은 감각에 주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즉 감각적인 경험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경험에 주어져 있는 것만 인정하는 것이 실증주의다. 감각에 주어져 있는 것만 감각적인 경험에 의해서 검증이 가능하다.
'문제가 있는 곳에 철학이 있다'고 한다. 즉, 문제가 꼬이고 꼬이는 곳에서 위대한 철학자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철학의 문제는 다륾이 아니라 철학이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언어의 논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해서 언어의 논리를 따르기만 하면 철학의 문제는 저절로 해소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는 것이다." 즉, 철학의 문제는 애당초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무엇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늘 좋아했다. 딜타이(1833~1911)나 하인리히 리케르트(1863~1936)등과 같은 동시대의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딜타이가 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가 자연과학의 인식방법과 인문과학의 인식방법 사이의 구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설명하는 것(하나는 다른 것에서부터 귀결되어 나온다)'이로 인문과학의 방법은 '이해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방법이 의미의 연관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 과학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의 차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학은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철학에 의존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물리학적인 방법을 가지고 무엇이 물리학인지 말할 수 없다. 무엇이 물리학인지는 오직 철학적인 물음의 방식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비난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이 가지고 있는 내적구조의 확인일 뿐이다."
죽음과 인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간의 심리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경험할 때 조차도, 죽음을 타인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즉 자기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 인간은 죽음을 삶 속에서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셈이다. 인간은, 그가 비록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 수 없을지라도, 그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죽음이 너무나 확실하지만, 가능한 한 그러한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나날의 삶 속에서 죽음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염려하는 시간적인 존재로서,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떠맡아 자신의 있음을 창조해가는 존재로 파악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태에서 출발하여 현상에 기초해서 존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면,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현상에 대한 탐구없이 이들의 탐구결과를 확정된 것으로 수용하여 그들의 이론을 탐구주제로 삼았을 뿐이다.
'인간'이라는 낱말 속에는 떨쳐낼 수 없는 선입견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생물학적인 전제인데, 그것은 곧 '이성적 동물'이라는 전제이다. 고대 그리서어로 조온로곤에콘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이 라틴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animal rationale(이성적 동물)이라고 변형해 버린 것이다. 본래 그 그리스 말의 의미는 '언어능력이(말할 수) 있는 생명체'이다. 그리스어 생활 세계가 라틴어의 생활세계로 넘어오는 가운데 삶의 문법이 달라지면서 말도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개념(낱말)이 그 후 서구의 2500년 역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 '떠맡음'에 있다. 즉 인간은 그가 얼마만큼 그의 '내 던져져 있음'을 '떠맡는가'에 따라 그의 위대함이 측정될 수 있다. '내 던저져 있음'을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고, 그 운명에 굴복하는 사람은 그저 운명이 이끄는대로 살고 만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떠맡음'의 사건이 그 사람에게 얼마만큼 처절하게 일어났었는가에 달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떠맡음'은 '불안'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떠맡음'의 사건을 자기가 살아가야 할 존재의 과제로 삼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 피어오르도록 그대로 놔두라고 권고한다. 불안 속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가장 보기 싫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을 다니다가 문득 그 '나'와 맞닥뜨릴 때, '나'는 소스라쳐서 돌아서려 한다. 이 때 온 몸을 섬뜩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불안이다.
불안을 그 자체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 곧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갖는 사람은 자신을 대면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자기가 매달려 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아무것도 아님이 곧 '무(無)'인데,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가 그간 매달려 왔던 것드리 다 부질없는 것으로 무화(無化)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비로소 나는 그들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나 자신을 대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스스로 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결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단을 계속 유보한다. 하이데거는 안절부절못함을 불안의 표식이라 하면서 이제 안절부절못함을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안절부절 못함 속에서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본성에 따른 자연존재에서는 탈은폐의 사건을 찾을 수 없다. 플라톤은 이 점을 이데아와 누우스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로 표현하였다. 은폐된 자연에 진리의 빛을 밝히는 존재가 곧 인간존재이며, 이러한 진리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인간의 참여 없이는 진리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주.
하이데거의 핵심용어 'Desein'을 '거기-있음'으로 번역, 현재까지는 '현존재'로 번역
2019.1.1.저녁에.
동네 황금산 해맞이를 가족과 함께 하고 일품정에서 무료로 매생이 떡국을 먹었다. 저녁은 갈비탕으로 먹고 기분 좋은 새해 첫 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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