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 천년만에 밝혀진 안시성과 살수, 성헌식, 지샘, 2010.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깃들어있거늘, 모습이 얼을 잃고도 모습만으로 우쭐댈 수가 있겠는가! 바른 길로 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얼을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음이라. 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할까?"
"오호 슬프도다! 부여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 한족이 쳐들어와 점령해 버렸고, 고려는 고려대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 몽고가 쳐들어와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 때에 이 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있었다면 한인은 자기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얼마 전에는 잠.청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뒤덮었다. 남생이나 발기 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 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벼린 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 나나에는 역사가 있어야만 되고 그 모습을 가지려면 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라. 신시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행촌 이암 선생 <단군세기> 서문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의 식민사학이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어 그 폐해가 실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주인의식 없는 거지 근성으로 남에게 의지나 하려는 우매한 식민지 백성을 만드는 역사 교육이 아직도 학교와 기관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민족정기는 쇠퇴해지고 날로 국가관이 흐려지며, 오로지 금권만능의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만 팽배해져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날이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식민사학이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만든 거짓의 역사이다. 그 주 내용이란 단군신화나 반도사관에다가 예로부터 조선은 기자와 위만의 한사군 즉, 이민족에 의한 식민지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이기 때문에 일제가 우매한 조선민족을 식민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왜 일제가 그토록 우리 고대사를 말살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옛 조선의 역사가 너무도 위대했고 찬란했고 장엄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를 후손인 조선인들이 모르도록 내용을 조작하여 민족혼을 말살한 것이다.
2008년 중국 현지 답사이 주 목적은 우리 역사의 핵심인 '안시성'을 찾아 보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안시성인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 동북 70리에 있는 청룡산에 가보고는 실망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곳은 사서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 곳으로 안시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각종 재료를 인터넷으로 찾던 중 백이 ·숙제의 묘와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곳이 산서성 남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산서성 지도로 도상 지형정찰을 하면서 그 곳이 확실하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산서성 남부로 가게 되었는데 막상 산서성에 가보니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단군 조선과 부여와 대진국(발해)의 역사까지 우리 고대사의 모든 것이 그 곳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산서성에 답사를 가서야 그 동안 묻혀 있었던 우리 역사의 실체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금성과 고구려의 평양성, 국내성, 안시성과 환도산성, 광개토태왕의 염수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지명을 밝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유적인 요서군(遼西郡)의 백이 ·숙제의 묘까지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적들을 모두 사진에 담고 동영상으로 찍으면서 "아!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한반도에서 산서성 황하까지로 이토록 광활했기 때문에 결국 중국과 일제에게 역사말살을 당한 것이구나!"라는 사실을 느끼며, 중국이 찌그러뜨리고 일제가 군화발로 짓밟은 우리 역사를 모두 원상회복시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와 당 태종이, 등장하는 경극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이다. 특히, <분하만>과 <어니하>라는 경극 제목에서 보듯이 당태종이 빠진 어니하가 안시성 앞을 흐르는 현 분하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경극들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쫒기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대사는 중국인이 쓴 대사이지 한국인이 쓴 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상황이 축소되었으면 되었지 확대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태종이 울부짖는 소리가 눈 앞에 선하다.
"조상님이시여! 나 이세민을 가엾게 여기시옵소서.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가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당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노라.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가 그의 신하가 되겠노라."
사서의 기록으로 본 안시성은 어디인가?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결정적인 사서의 기록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에서 <자치통감>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현토군은 유성과 노룡 사이에 있다. <한서>의 미수산은 유성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토성을 쌓다."라는 기록의 토성(土城)이 당태종이 안시성 앞에 쌓은 토산(土山)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위 기록에서의 토성의 위치가 <신당서>와 <한서지리지>에서 말한 안시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룡은 백이 ·숙제의 묘가 있는 곳으로 요서군의 비여(肥如)이고 유성은 요서군에 속한 현이므로 위 기록은 요서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시는 요동군이면서도 요서군일수도 있어 요동과 요서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산서성 남부 운성시 신강현 서북 40리에 있는 마수산에 있는 안시성, 마수산 동남쪽에 토산이 무너져 내린 곳이 그대로 남아있다. 토산 아래 쪽에 돌산의 하단이 보인다. 안시성은 100% 돌산이다.
안시성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자 필자는 즉각 답사를 가보기로 결정했다. "연인원 50만명의 당나라 병사들이 2개월간 쌓을 정도의 토산이라면 쉽게 없애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아직도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직접 가 보니 작은 흔적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이 아직도 그대로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유주의 요서군을 밝히는 백이 ·숙제의 묘와 고죽성(포주고성)이 발견되고, 요동군에 속한 안시성의 위치가 정확하게 드러남으로써 우리 고대사의 주 무대는 산서성 남부라는 것이 100% 증명되었다 할 것이다. 고구려는 물론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도 산서성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고대 중국은 우리의 위대했던 단군조선과 웅대했던 고구려에 밀려 섬서성과 황하주변의 하남성 일대에서 조그맣게 웅크리고 살았던 것이다. 중국은 산서성이 오천년 중국역사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위대한 단국조선과 고구려의 역사 강역을 자기네 것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국은 역사 왜곡을 위한 지명조작을 통하여 고대 중국의 땅은 대대로 지금의 만리장성 안쪽이라는 역사왜곡을 했다. 그러나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도 산서성 최남부 황하변 중조산에 있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중국이 저지른 지명조작의 실체가 낱낱이 파헤쳐짐으로써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이론인지 이미 밝혀졌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것이다.
지금까지 일제가 만들어놓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이론으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온 강단 사학계는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일제의 만행 중 가장 흉악한 짓이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역사왜곡으로, 단군을 신화로 만들어 칠천년의 우리 역사를 잘라내 버리고 대륙을 지배했던 웅장한 역사를 한반도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몰아넣은 반도사관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행촌 이암 선생이 쓴 <단군세기>의 새로운 해설
조선(朝鮮)은 B.C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세워져 2096년간 47분의 단제(檀帝)에 의해 다스려졌던 나라이다. 지금부터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의 영토를 살펴봄으로써 단군조선이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 나라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번역문은 임승국 교수의 <한단고기> 주해서를 인용했으며 각 단군별로 원문 뒤에(해설)을 붙였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
B.C1733년 오성취루(五星翠樓)가 있었다. 오성취로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일직선상에 늘어서는 천문현상으로 계산상 250~300년에 한 번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히 보고 기록할 수 있는 천문현상이 아니다. 이 기록은 단군조선에서 수백년에 걸쳐 줄곳 천체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문학자 박창범 전 서울대 교수는 이 오성취로가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논문에서 발표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사분오열의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연나라와 제나라와 관련된 기록은 <사기>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조선을 북융(北戎), 산융(山戎), 동호(동호(東胡), 흉노(匈奴), 숙신(肅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제나라가 국경을 직접 맞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은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주 무왕이 제후로 영구(營丘)에 봉해진 땅으로 그 곳은 황하북부 하남성 위휘현(衛輝縣)일대이다. 다음은 <중국백과사전>의 자료이다.
"강태공의 고향흔 하남성 신양시 위휘현 서북 12km에 있다. <죽서기년>에 따르면, 강태공의 서거는 주 강왕 6년 10월 20일로 139세였다. 장례는 위휘현 태공촌에서 치렀다. 지금의 태공촌 경내에는 강태공 묘, 강태공 사당, 강태공 여망표 등이 있다." 그 곳에 있는 강태공의 묘를 보면 제나라가 어디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강태공은 <사기>에 동해군(東海郡)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군의 치소는 지금의 하남성 범현(范縣)에 있었으며,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신양시 위휘현도 동해군에 속해있었다. 여기에서의 동해는 바로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대야택 즉 발해(渤海)이며, 당시 <사기>에 기록된 제나라의 동쪽 경계 역시 동해(발해)로 제나라의 활동무대는 하남성이었다. 그런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의 영토에 대해 맹자가 역사왜곡인 것이다. 제나라의 종주국인 주나라의 영토에 대해 맹자가 "하나라와 은나라와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종주국인 주나라의 도읍은 섬서성 서안이었는데 어떻게 대야택(=발해=동해) 건너 산동성이 제후인 제나라의 영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왜곡인가? 아니면 맹자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강태공의 고향인 황하북부 하남성 신양시 위휘현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역사 유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시황 만리장성의 민간설화로 유명한 맹강녀곡장성(孟姜女哭長城)이다. 중국은 위휘현에 있는 맹강녀의 사당을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에 옮겨 놓았는데 이는 산해관 장성이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라는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을 하기 위함이다. 진시황 때 쌓았다는 장성은 주로 연나라 장성과 제나라 장성을 보수하여 연결한 것이다. 그 제나라 장성을 쌓는 공사장에 맹강녀의 남편이 동원된다. 멀리 고향(서안)에서 노역장을 찾은 맹강녀는 장성 안에서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대성통곡을 하고 만다. 마침 진시황이 지나가다가 맹강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랜 후 장사를 후히 치르게 하고, 청혼을 하나 맹강녀는 거절하고 높은 산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그 장성이 바로 강태공의 고향인 하남성 위휘현에 있다. 게다가 맹강녀의 이름을 딴 맹강녀하(孟姜女河)가 황하북부 하남성 위휘현 근처를 흐르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제나라는 황하북부 하남성 에 있던 나라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제나라가 어떻게 지금의 산동성 임치에 도읍을 둘 수 있단 말인가!
맹강녀의 슬픈 전설이 있는 제장성은 원래 하남성 위휘현에 있었는데, 중국은 역사 왜곡을 위해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으로 옮긴다. 고향 서안에서 산해관까지(당시의 여건을 고려해볼 때) 여자 혼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58년
B.C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
수유(須臾)는 기자의 휘(諱)로 그가 살던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자가 살았고, 그 후손들이 수유후(須臾侯)로 살던 지역은 산서성 최남부 또는 황하북부 하남성 서쪽 일대이다. 왜냐하면 배구가 수양제에게 "고려(고구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四郡)으로 나누었습니다."고 했는데, 기자의 봉지이며 백이 ·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의 땅이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 영제시 일대이기 때문이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사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그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제나라 환공 23년에 북방의 만족(蠻族)인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공하자 연나라는 곧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고 그것을 응낙한 환공은 연나라에 출병하여 멀리 만족과 산융은 바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기>의 기록에 제나라 환공은 여러 나라들의 회맹(會盟)을 주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미 남으로 소능(召陵)까지 원정하여 웅산(熊山)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山戎), 이지(離枝), 고죽(孤竹)까지 토벌했다.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토벌코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 즉 당시 제나라의 북쪽은 고죽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 운성(運城)시의 일부인 영제시 일대이며, 남쪽인 소능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 밑에 있는 탑하(漯河)시 이다. 이처럼 제나라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에 있던 나라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중국은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어불성설의 역사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B.C424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수명을 1,908세로 기록한 이유는 B.C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된 조선이 B.C425년 구물 단군에 의해 대부여로 국호가 바뀐 것을 마치 조선이 없어진 것으로 여겨 단군의 수명을 1,908세라 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제천의식의 하나인 부여의 영고가 언급되고 있다. 단군조선이 신화라는 이유로 우리 역사를 삼국시대로부터 보는 식민 사학자들은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여 경배하니 첫번째 절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서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 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백관을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三六大禮)라고 한다.
영고를 (동)부여의 제천의식으로 말하고 있으나, 영고는 대부여(단군조선) 때의 제천의식이었다. 삼육의 대례란 천제를 지낼 때 하는 예법인데, 절하는 것을 배(拜)라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고(叩)라고 한다.
B.C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장장 2,096간 47분의 단제(檀帝)에 의해 다스려졌던 조선(朝鮮),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하,은,주나라 역시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다는 것과 그들의 상국이었던 단군조선과의 역학관계, 이처럼 단군조선은 광활한 영토를 지닌 장엄했던 나라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근세에 들어 힘을 키운 일제에 의해 그 역사를 말살당한 것이다. <단군세기>의 새로운 해설과 같이,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을 산서성에 놓고 역사기록을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아들어감을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의 식민 사학계는 이처럼 정교한 <한단고기>를 몇 마디 문구가 이상하다는 핑계로 전체 내용을 위서로 몰아붙이고 있다. 실상은 자기들의 이론이 순 거짓말인데도 말이다......
이들이 있는 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적은 한반도 북부를 중국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며, 황국사관의 주목적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가 반도사관의 이론을 계속 주장하다가는 언젠가는 중국과 일본에게 한반도 마저 빼앗기게 된다. 그 명분을 현재 식민학자들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이 나라를 망치는 매국노인 동시에 민족 반역자들인 것이다. 그들 때문에 이 조그마한 한반도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
비록 광활했던 옛 영토를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장엄했던 옛 역사라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의 역사를 되찾으면 내일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기 되살아나 미래의 비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학생 때부터 잘못된 역사를 배워 "단군은 곰의 신화이고, 중국인이 와서 세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고조선이며,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한반도 북부에 설치해 수 백년 간 이 땅을 지배했다"고 알고 있다. 즉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민족에게 지배당한식민지로부터 시작된다고 씌어 있는 것이 대한민국 국사교과서로, 이는 일제와 조선왕조가 조작한 허구의 이론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배 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을 우민(愚民)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민족혼 말살 정책을 폈다. 그 일환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고 20만권이 넘는 사서를 수거해 불태우고 <조선사 35권>이라는 역사이론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세뇌교육 시켰던 것이다.
<신당서 열전 145-동이>에서 고구려 지형을 설명하는 기록으로부터 도읍인 국내성과 환도성과 평양성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고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역할을 한다.
즉 압록수 옆에는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위치해야 위 <신당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길림성 집안, 평양성을 대동강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러다보니 국내성은 압록의 북(집안)에 위치하고, 평양성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평양)에 있고, 안시성은 요녕성 요하 강변에 위치하게 되어 이 지리비정은 <신당서>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런데 위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이 아닌 산서성 분하(汾河)에다 적용하면 <신당서>의 기록이 그 곳 지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12.30.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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