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어크로스,2020.
'갑질사건'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데서 출발한다.
프롤로그
1부.인간이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구원
사람은 어떻게 흑화되는가
아무도 미끼를 물지 않았다.
악의 낙수(落水)효과
의심하라,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시시한 인생, 인간마저 시시해지면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지더라도 개기면 달라지는 것들
인간이라는 성냥개비로 지은 집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데려다 줄 것이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센서등을 깜빡일 때
2부. 어둠 속, 갑자기 불이 켜지면
애 늙은이와 늙은 애들의 세상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좀비공정
그 동안 당신은 어디 있었나
나의 디폴트 값은
편견이라는 미세먼지
이 상상은 특정 사실과 관련이 없습니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현실의 헌법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것
3. 사람에 대한 예의
악이 승리하기 위한 필요조건
살던대로 살기 싫어지는 순간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하찮아 지느니 불편해 지려고 한다.
배신해도 괜찮아
현실주의의 세 가지 원칙
싸가지 좀 없으면 안되느냐고, 싸가지 있게 말하는
작은 진실들이 깜빡거리는 캄캄한 밤에
4. 각자도생이라는 거짓말을 넘어서
우릴 소름끼치게 하는 것들
스스로 착취하라 말하는 시대에 산다는 것
가위와 풀로 오려붙인 '요제프 K'
동선을 조사할 때 보이는 것들
국기에 대한 맹세가 싫은 이유
환멸이 가져오는 효과
모두가 행복한 '화양연화의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멀쩡한 사람 웃음거리로 만들어서 되겠느냐고요?
반응으로 본 나의 인생 이야기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에필로그. 즐거운 모험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믿는 순간 편견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지고, 믿는 순간 편견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고, 믿는 순간 맞은편 차량과 추돌한다. 한 고비 돌 때 마다 가능한 길게 클랙션을 울려야 한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어찌할 수 없는 사고도 있다. 맞은 편에서 돌진해오는 그것이 애써 눈여겨 보지 않았던 나 자신의 어떤 이면이라면, 그러니 다만 기도할 뿐이다.
오너나 상관 앞에서는 자기 간이라도 빼줄듯이 살갑게 굴다가도 직원들 앞에만 서면 못잡아 먹어 안달이지. 오너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고?
이보게 친구, 그들은 다 알고 있네. 알고도 모르는 척 할 뿐이지. 왜냐고? 그게 편하거든. 말 잘듣는 '나쁜 놈' 하나가 분위기를 휘어잡으면 오너 자신은 품위있게 우아하게 웃고만 있으면 되거든. 그 '나쁜 놈'이 조직을 망가뜨릴 지경이 되면 다른 '나쁜 놈'으로 대체하면 되고......
다른 자의 죽음은 슬퍼하면서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게 이 세상이라네. 착하게 살면 비웃음 거리로 만드는게 이 세상이라네. 세상이 자네를 평가해주기 않는다고 울상짓지 말고, 자네가 세상을 평가해 보게. 계속 웃을 자와 웃지 않을 자를 선택할 권리는 자네에게 있네. 코메디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니까.
"나를 성폭행한 소년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사실은 1000퍼센트 확신하는데 용서가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낡아빠진 이데올로기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합의하고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고, 가해자에게 "반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누구의 편인가.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피해자는 얼마나 불행한가.
악의 낙수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살아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 보존이랄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이 불특정 다수다.
멱살잡이, 주먹다짐을 한다.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한국 사회에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가 넘쳐나는 이유 중 하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에서 분노를 배설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폭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 외부에서 부정적인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순응해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는 의욕을 잃는다. 의욕의 문제만이 아니다. 스스로 상황을 바꾸려해도 바꿀 수가 없다.
두려움은 노예제의 작동원리입니다. 한 없이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이 노예를 지배하는 방법입니다. 낙오하면 어떻게 하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 망하는 거 아니야? 이런 불안감은 실은 별게 아닐 때가 많습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면 우리 뇌는 0 × 의 이분법에 빠지고 말지요. 죽느냐, 사느냐의 패닉 속에서 제대로 판단 한 번 못한 채 주눅들고, 복종하게 되는 겁니다. '노예의 마음'으로 살지는 말자는 얘기입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지말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말고, 나의 가치와 나의 원칙과 나의 취향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덜 후회하게 됩니다.
나는 나인 것이다.
싸우자. 이기자. 지더라도 개기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만이 아니다. 실패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도 빛나는 트로피다.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네, 아니요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일 뿐입니다."
'나를 지키며 산다'는 건 소중하고 절실하다. 때론 자존감(自尊感)이 인간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애늙은이'와 '늙은 애'들의 세상
업무일지가 한 조직의 일기장이라면 일정표는 조직들 간에 공유하는 '교환 일기장'이다. 명함은 그 일기장에 주요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입장권이다.
'좀비 공정' 공식적인 작업공정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위험한 공정을 말한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좀비의 특징은 세 가지다. 1.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2. 살아있는 것은 뭐든지 물어 뜯는다. 3. 생각을 하지 못한다.
뇌에서 생각하는 영역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백의종군'
이순신은 자신이 백의종군 하겠다고 한 적이 없어. 백의종군은 조선시대 군대에 처벌이었거든. 제 3자가 이런 말을 쓰는 건 몰라도 당사자가 "백의종군하겠다"고 떠들 일은 아니지.
결과가 좋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은 거니까. 얼마나 해야 '열심히' 인지는 자로도, 저울로도 잴 수 없으니까.
그의 문장은 청유형이었지만 명령형 보다 더 격렬하게 행동을 요구한다. 이럴 때는.
글을 보면 사람이 드러난다. 내 글에 보이는 주저흔(躊躇痕)이 그의 글엔 없다. 그것은 이용마가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원칙을 지키려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침묵의 문화는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란, 굳건한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시간을 늦출 뿐이다. 침묵하는 자도 희생될 수 밖에 없다. "악이 승리하려면 선한 자들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영화 <갱스터 스쿼드>) '침묵은 금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해치는 흉기다!'
우리는 선에게서 배워야 한다. 침묵하면 그 다음은 내 차례란 것을, 내가 침묵하면 나 자신도 꼼짝없이 금 밟은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당신과 나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진짜 금 안밟았어. 내가 다 봤어."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왕따 당하고 마녀사냥 당하는 이를 위해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변호한 적이 있는가.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할 자신이 있는가.
히포크라테스 선서, 동료를 형제처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신약성서의 에피소드 하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성을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운다. 율법에 따라 이 여자를 돌로 쳐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함정이다. 예수가 "돌로 치라"고 하면 자신들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된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역시 예수다. 인간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말씀이다. 다만, 그 때 예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물음부터 던졌다면 어땠을까?
"저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남성 중심의 도덕율은 해체되어야 한다.
전언통신문, 제목 '취업비관 자살'
다음 날, 가족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우리 아이는 취업문제를 비관한 적이 없다.
사람이 왜 죽는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까. 죽음의 이유를 딱지 붙이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 아닐까?
한 변호사의 말. "머리 좋고 사악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판사, 검사를 보면 알 수 있어. 그 좋은 머리로 억울함을 풀어주는게 아니라, 유죄추정의 구멍을 메워서 기소하고, 유죄 판결하는 걸 보라고, 그 죗값은 어떻게 치르려는건지......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 직업에 맞추는 게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 살아야 한다.
재판없는 처형은 어처구니 없다는 규범을 법률가들이 따랐다면, 동의 없는 수술을 없다는 규정을 의사들이 받아들였다면, 노예노동 금지를 기업가들이 지지했다면, 살인과 관련된 서류작업의 처리를 관료들이 거부했다면, 나치 정권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행위를 실행에 옮기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 <폭정:20세기의 스무가지 교훈>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직업윤리의 핵심이다.
자기 기준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간혹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일순 기준이 무너진다해도 괴로워하며 그 기준을 일으켜 세운다. 자기 기준이 없는 사람은 늘 정리되지 않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상황에 맞춰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다. 자기가 한 행동에 기준을 맞춰갈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는 건 큰 병을 앓았거나 내면이 부서지는 좌절을 경험했을 때다.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졌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된다. 그 동안은 마주치지 못했던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같은 편이 아니다. 진짜 나쁜 놈들은 따로 있다. 우리의 적(敵)은 비인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다. 적은 우리가 우리 편이었던 사람과 싸우기를 원한다. 같은 편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걸 보면서 마음 편히 즐기고 싶은 거다. 그들이 어떻게든 배신자를 만들어 내려는 이유다.
기자들 사이의 노하우 중 '70퍼센트 룰(rule)'이라는게 있다.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는 취재한 것의 70%만 쓰라는 것이다. 나머지 30%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항의가 들어오거나, 법적문제가 생겼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100% 기사화하는 건 위험하다. 120,130%로 부풀려 쓰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자기를 안다는 건 또한 스스로를 객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까지 객관화해서 볼 수 있어야 진짜 전문가다. 전문가는 몰입하되 매몰되지 않는다.
모든 혁명가는 원칙의 방패와 현실의 칼로 무장한 철학자다.
법정에서 법률가들이 다투는 팩트라는 것도 실은 확률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보게 하는 것, 낯선 눈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문학이 지닌 힘이라고 믿습니다.
'긱 이코노미'가 무서운 건 스스로를 착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를 고용한(임시적인 일) 사용자도 나고, 내가 고용한 근로자도 나다.
인생은 운(Luck)에 좌우된다. 영화 <매치 포인트>
운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엔 어쩔 수 없는 빈틈ㄷ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빈틈들이 운을 만들어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벌처럼 쏜다는 건 한 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벌의 입장에서 보면 일생일대의 도박이다. 오직 한 점(點)에 온 몸을 더지는 모험이다.
2020.7.23. GS리테일 강의가 있는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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