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징비록의 그림자, 이희진, 동아시아, 2015.
이 책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쫒아 조령을 지나가다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 지킬 숭 몰랐으니 신 총병도 참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라고 하렸다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 생각해 상세히 적어둔다. -유성룡 「징비록 」 중에서
이 책을 다 읽고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니 표현이 역겹다.
영웅만들기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 '탄금대 전투'를 깊이 살펴볼 기회가 생겼고(......) 이 문제를 다른 형식을 빌려서라도 구체적으로 다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 많다는 점이야 다른 전적지들도 마찬가지 였으니까.(......) 그런데 그 왜곡된 정도가 너무 크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 역사 학계에서 이전까지 가장 왜곡되어 왔다고 여겼던 황산벌 전투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그 보다도 더 결정적인 원인은 왜곡이 방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탄금애 전투에서 왜곡된 사실 대부분이 현장 지휘관인 신립에게 패전의 책임을 씌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막을 수도 없었고, 막는데 집착해서도 안되었던 조령을 막지 않았다는 비난, 또 조총을 우습게 보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비난 등 신립이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 않는 것들이 그를 '무능한 장수'로 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립이라는 인물을 조사해보니 그가 용맹스럽고 우직하며, 정치적인 잔머리와는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장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신립을 '무능한' 장수로 몰아가기 쉬운 빌미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왜곡시킨 사실들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몰아가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묵묵히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을 통솔하는 지도자 그룹의 중요성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지도자들도 이들 없이는 국가 사회를 이끌어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대우 받는 것 같지는 않다. 뒤집어보면, 지도층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적당히 실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권력만을 유지하려는 것 같다. 가면 갈수록 국가 사회이 생존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쪽이 바로 묵묵히 자기 책임을 다해왔던 실무자 그룹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기들이 해 낸 일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대부분이 자신의 손으로 진행한 과정을 역사에 남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즉, 역사는 그 사회이 기득권층이 남긴다는 점을 의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변명을 남길 수 없는 위치의 실무자들에게 떠넘겨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짓이 정치의 고전(古典)이라는 점도 역사에서 상식에 속한다. 이런 짓이 정치의 고전(古典)이라는 점도 역사에서 상식에 속한다.
「징비록 」 역시 여기에서 완벽하게 예외일 수 없다. 「징비록 」은 역사적 기록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의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인물의 성정이나 인격에 따라 얼마든지 양질의 기록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 우리 학계에서 「징비록 」은 약질의 기록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저자인 류성룡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시키거나 남이 했던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도 하는 등, 사실과 다른 기록을 많이 남겼다는 시각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일부 연구에서 이미 나온 바도 있지만, 필자가 직접 확인한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많겠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를 지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역사, 특히 조선시대를 다룰 때 문제가 되는 '문중사학(門中史學)'이다. 힘 좀 있는 문중에서 내세우는 인물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의 금기처럼 되어 있다. 이런 금기를 어기면, 이단아 취급을 받거나 소송까지 걸리는 차원의 비난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웬만해서는 섣불리 불편한 진실을 들추고 싶어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잘못 알려지거나 심지어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왜곡시킨 사실이 역사로 둔갑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이 영화나 드라마 같은 역사 콘텐츠에 반영되면, 그야말로 기정 사실이 된다.
이런 와중에 힘 있는 인사가 벌여놓은 참극의 책임을 뒤집어 쓰는, 애꿎은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희생자의 대부분이 조용히 자기 할 일에 충실했던 실무자들이다. 신립은 이런 일에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로 느껴졌다. 이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비슷한 꼴을 당해야 할 수 많은 신립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이 그런 분들에게 바쳐지는 작은 위안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제1장 무르익는 전쟁의 기운
북방 영토를 지키는 전쟁의 신
일본에서 일어난 전쟁의 먹구름
가도가도 제자리
제2장 전쟁전야
어긋난 첫 단추
통신사가 파견되었지만
전쟁을 막을 희망은 사라지고
제3장 예고된 비극
첫 희생양들
뒤늦은 수습
임무를 위하여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신립장군은 왜 조령을 막지 않았나 - 290쪽
임진왜란과 「징비록 」 그 진실에 관한 몇 가지 - 296쪽
2019.1.14. 일.
운동을 마치고 들어와~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12. 왜 아빠와 여행을 떠났냐고 묻는다면, 안드라 왓킨스, 인디고, 2017 (0) | 2020.08.25 |
---|---|
611. 조일전쟁,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0) | 2020.08.10 |
609.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하이데거, 살림, 2015. (0) | 2020.07.29 |
632.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어크로스,2020. (0) | 2020.07.28 |
608. 천년만에 밝혀진 안시성과 살수, 성헌식, 지샘, 2010. (0) | 2020.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