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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조일전쟁,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햇살처럼-이명우 2020. 8. 10. 17:54

611. 조일전쟁,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역사만큼 재미있는 학문은 없다. 우리는 지혜의 보고인 역사를 통하여 과거에 일어났던 수 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사건의 처리과정과 결말을 보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고 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나라 역사건 왜곡과 윤색, 심지어는 조작이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작은 자랑은 부풀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사는 정의, 불의와 상관없이 승자에 의하여 쓰여지며 패자의 항변은 어디에도 없다. 승자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합리화 시키고 정당화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역사는 쓰여지는 순간부터 왜곡되기 마련이다.

  또 다른 역사 왜곡의 심각한 문제는 수 많은 멍청한 독자들이 치부가 가감없이 기록된 역사의 진실을 보기를 원치않고 치부가 윤색되고 감추어진, 그렇게 조작되고 상품화된 역사를 보면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려면 소설을 보지 역사책은 왜 보셔?

  이에 따라 책을 쓰는 역사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역사의 치부를 감추고, 대중 역시 치부 보기를 원치않아 역사학자와 영합하고 있다. 이렇게 둘은 역사 왜곡의 주범이자 공범이며, 이렇게 왜곡된 역사는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는 거기서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은 없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딱 200년째인 1592년에 있었던 사건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 수백년간 동양에서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대규모이자 격렬했던 동아시아 국제전인 조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3개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대 병력이 투입되었고, 현대전에서 쓰이는 거의 모든 첨단 무기가 동원되었으며, 전쟁의 결과로 20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희생된 조선인 총수는 거의 2백만명에 이른, 참혹하기 짝이 없었던 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육이오 전쟁)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있었던 전쟁 중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인데, 이런 대 전쟁에 대한 명칭을 왜란이라 함은 말이 안된다. 이 전쟁의 모든 정확한 정황은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 책임져야 하는 자들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서 모조리 왜곡되었다. 

 

  중년 이상의 독자들이 학교 다닐 때 배운 임진왜란은, 조선에 쳐들어 온 일본군의 신무기인 조총이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과는 상대가 안되는 첨단무기라 조선은 그냥 붙는데로 깨졌고, 그렇게 망해가는 나라를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함으로써 살려냈으며, 해전의 가장 큰 공은 거북선이 세웠다고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이순신하면 거북선의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설명 중 약 절반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이 초장에 박살이 난 원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골치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무능한 임금 선조(조선14대)와 당파 싸움에 코를 쳐 박은 한심한 신료들 때문이었다.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비겁하기 짝이 없었던 선조는 두 달만에 의주가지 도망쳐 명에 망명을 빌었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그렇게 아사리판이었던 조선을 살린 것은 명의 원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기의(起義)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 등 세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사실이 아닌 역사를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통치자인 비겁한 소인배 선조나 당쟁으로 썩어빠진 관료들의 계승자들이 전쟁이 끝난 후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야 했고, 또한 그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우기기 어려운, 딱한 우리 자신들의 쪽팔림을 덮어두기 위해서였다. 

 

  고교 교과서나 한 권 짜리 역사서에 실려있는 조일전쟁사는 역사라 볼 수 없고 그저 초등학생을 위한 동화 수준이다. 

 

  조일전쟁은, 동서양을 통틀어서 역사상 가장 문을 숭배하고 가장 무를 천시하여 허약해 빠졌던 조선과, 120년 간의 내전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무(武)를 숭배하여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일본의 격돌이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일본 육군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용맹하고 기율이 엄정하며 무장이 잘 된 군대로 세계 최강의 육군이었고, 조선 육군은 오합지졸이란 말 그대로 세계 최약체로 평가받을만 했지만, 조선은 다행히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근데 많은 독자들이 일본이 해양국가이니 당연히 해군이 강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당연히 육군이 강할 것이라고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요새 얘기고,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 120년 동안 해전을 치른 적이 몇 번 없이 계속해서 육전을 했고, 우리는 육전이 거의 없이 고려 때부터 왜구들의 침락을 방비하면서 성장한 수군이 막강했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였는고 하니, 전쟁이 터진지 겨우 20일만에 별 저항도 못해보고 수도인 한양이 점령당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정말로 쪽팔리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일 침공군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20일만에 도착했다는 것은, 당시 일반 여행자들이 별 문제 없이 그저 슬슬 걸어서 주파하는 시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즉, 오는 도중 걸리적거리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스토리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조일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지난, 약 40여년 후 일어난 조청전쟁(병자호란) 때는 수도가 점령 당하는데 단지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조선은 누구랑 붙기만 하면 그냥 터지는 동네북이었다. 이렇게 정신 못차린 조선은 조일전쟁이나 조청전쟁 때 아니면 역모로 진작 망했어야 될 한심한 나라였다. 애새끼라도 오기가 있으면, 딴 애에게 얻어터졌으면 이를 갈면서 태권도 도장이나 합기도 도장을 찾기 마련이다. 근데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침공을 당해 나라가 거덜나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어 '불구대천지수' 관계가 되었으면 '와신상담', '절치부심'을 해서 그 원한을 갚아야 옳지 어떻게 그냥 쳐먹고 놀다가 조청전쟁 때 또 거지가 되냐?

  이렇게 조선은 그 참혹했던 조일전쟁에서 결국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고 대비도 전혀 하지않아, 인구 800~900만이나 되는 나라가 겨우 50만~60만(이구)의 후금에게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깨져서 항복한 후 평소에 개돼지로 알던 후금의 속국이 되었으니, 한심한 정도를 넘어 참으로 불쌍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거기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조일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죽은 다음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조선 15대)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고 국방에 진력한 데다, 명청 등거리 외교를 펼쳐서 전후 조선이 안정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했고, 조금만 더 시일이 지나면 조일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나라로 거듭날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 판에 권력에 눈이 먼 개 같은 서인들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광해군이 쫓겨가고 선조보다 한 술 더 뜬 전형적인 등신이자 우유부단의 대명사 인조(조선 16대)가 즉위하는 바람에 개혁이고 나발이고 다 날아가 버리고 삼전도에서 청태종(청2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를 해가며 항복하는 치욕을 자초했으며, 그 이후 조선은 완전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조일전쟁의 전장터가 된 조선의 국토는 엄청나게 피폐해졌다. 전쟁 중 인구위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명이 전사 또는 아사, 병사했으며 전투에서는 전사자만도 거의 20여만명에 달했고, 약 10만명 내외의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쟁의 명칭을 '임진왜란', 명에서는 '만력의 역' 또는 '위안차오센(원조선)',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의 역'이라 불렀다. 특이하게도 유성룡은 저서 「징비록 」에서 조일전쟁을 '번리지전(울타리 전쟁)'이라 했다. 즉 명나라 요동 땅의 울타리인 조선이 치르는 전쟁이라는 의미였다.

 

2019.1.14. 일요일, 20km조깅운동 다녀와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