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 유발 노아 하라리, 김영사, 2019.
1. 인류의 의제
제1부 호모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3. 인간의 광휘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5. 뜻밖의 한 쌍
6. 근대의 계약
7. 인본주의 혁명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9. 중대한 분리
10. 의식의 바다
11. 데이터 교
한국 독자들에게
또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북한이 기술적으로 성큼 도약해, 예컨대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중앙집권화된 저개발 독재국가에는 이점이 있다. 남한에서 인간의 운전을 전면 금지하고 완전한 자율주행 교통체계로 전환하려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라. 남한 사람들이 소유한 자가용 자동차가 수백만 대에 이르는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와 재산을 잃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택시기사, 버스운전사, 트럭운전사, 심지어 교통경찰들도 반대할 것이다. 그들 모두 직업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파업과 시위도 잇따를 것이다. 또한 법적, 철학적 난제들도 이 계획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만약 자율주행 차량이 사고를 일으키면 누구를 고소해야 할까? 또 자율주행 차량이 기능 오동작으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고 무고한 다섯 명의 보행자를 그대로 치어 죽이는 것과 핸들을 꺾어 차에 탄 승객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 차량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남한 같은 자유시장 민주주의에서 이런 난제들에 일일이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떨까? 그곳은 차량이 많지 않고, 택시기사들이 시위를 벌일 수도 없고, 트럭운전사들이 파업할 수 없으며, 모든 법적 난제들이 어느 날 오후 펜놀림 한 번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곳이다. 딱 한 명만 설득하면, 그 나라는 하루 아침에 완전한 자동교통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시나리오는 북한이 인공지능과 생체공학을 이용해 조지 오웰이 상상한 디스토피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생체측정기기를 착용해야 할 것이고, 그 기기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할 뿐 아니라, 혈압과 뇌 활성까지 감시할 것이다. 소련시절 KGB는 국민 개개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고, 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KGB가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데이터와 연산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정권은 인간 두뇌에 대한 증가하는 지식과 기계학습의 엄청난 저력을 이용해 최초로 모든 국민이 매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벽에 걸린 김정은의 사진을 볼 때, 생체 측정기가 당신의 분노 징후들(혈압이 높아지고 편도체 활성이 증가하는)을 포착한다면, 당신은 내일 아침 강제노동수용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컴퓨터 기술과 진보가 북한의 대외 관계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사이버 전쟁에서 일어날 것이다. 남한은 북한의 사이버 공격 위협에 늘 직면하겠지만 남한의 입장에서 그런 공격을 단념시키거나 복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후진성 자체가 북한을 보호할 것이다. 만일 북한이 남한의 온라인 금융서비스를 붕괴시킨다면, 남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북한의 온라인 금융서비스를 붕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복으로 평양을 폭격할 것인가?
또한 인공지능의 부상으로 남북한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벌어지면 통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인공지능은 남한 사람들의 문화와 심리까지 바꿔놓을 것이고, 북한 사람들이 비슷한 혁명을 겪지 않을 경우 두 집단 사이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유투브, 인스타그램, 트위터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남한의 10대와, 거리를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할 북한의 10대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한 번 생각해보라.
결론적으로, 인류는 지금 전례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다가올 몇십년 동안 우리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 또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 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은 사람이 못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늙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 테러범,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다.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가뭄, 에볼라, 알 카에다의 공격으로 죽기 보다 맥도널드에서 폭식해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기아. 수천년 동안 인류 최악의 적. 고대 이집트나 중세 인도, 17세기 프랑스에서도 심한 가뭄이 들면 인구의 5퍼센트에서 10퍼센트가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식량은 동이 났는데, 교통수단이 너무 느리고 값비싸 충분한 식량을 수입할 수 없었고, 정부는 너무 무력해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에이즈가 인류에게 끔찍한 타격을 주었고, 말라리아 같은 오래된 감염병으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오늘날 전염병은 과거 천년 동안에 비하면 큰 위협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암과 심장병 같은 비감염성 질환으로 죽거나 단순히 노환으로 죽는다.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는 사망원인의 약15%가 인간의 폭력이었던 반면, 20세기에는 그 비율이 5%에 불과했고, 21세기 초에는 약 1%로 줄었다. 2012년 전세계 사망자 수는 약 5,600만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62만명이 폭력으로 죽었다.(전쟁 12만명, 범죄 50만명) 반면, 80만명이 자살했고, 150만명이 당뇨병으로 죽었다.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더 위험하다.
전쟁이 드물어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이 전쟁을 생각조차 못할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물질기반 경제에서 지식기반 경제로 탈바꿈했다. 전에는 부의 원천이 금광, 밀밭, 유전 같은 물질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이 부의 원천이다. 유전과 밀밭은 전쟁으로 정복할 수 있지만, 지식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없다. 지식이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전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기반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예컨대 중동이나 중앙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게 되었다.
1998년 르완다가 이웃나라 콩고의 풍부한 콜탄 광산을 점령하고 약탈한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콜탄은 휴대폰과 노트북 제조에 많이 쓰이는데, 콩고는 세계 콜탄 보유고의 80%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완다는 약탈한 콜탄으로 연간 2억4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가난한 르완다로서는 큰 돈이었다.
반면, 중국이 캘리포니아에 침입해 실리콘밸리를 점령했다면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그 전투에서 어떻게든 승리한다해도 실리콘밸리에는 약탈할 실리콘 광산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중국인들은 그렇게 하지않고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굴지의 첨단기술기업들과 협력해 그들의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고, 그들의 제품을 제조함으로써 수십억달러를 벌었다. 르완다가 콩고의 콜탄을 약탈해서 1년 동안 번 돈을 중국인들은 단 하루에 평화로운 무역을 통해 벌었다.
테러는 실질적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나약한 전략이다. 적어도 과거에는 테러리즘이 물질적 피해를 끼치기보다는 두러움을 확산시키며 효과를 보았다. 대부분의 테러범들은 군대를 격파하고, 나라를 점령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할 힘이 없다. 2010년 비만과 그 관련 질환으로 죽은 사람이 약 300만명이었던 반면, 테러로 죽은 사람은 전 세계에서 총 7,697명이었고, 그 대부분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보통 사람에게는 알 카에다 보다 코카콜라가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것을 제대로 평가할 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교훈은 바로 역사에는 공백이 없다는 것이다. 기아, 역병, 전쟁이 줄고 있다면 다른 과제가 인간의 의제에 올라와야 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율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호모사피엔스'를 '호모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죽음의 최후 - 불멸에 도전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우주에서 가장 신성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학교 교사들, 의회의 정치인들, 법정의 변호사들, 무대 위의 배우들까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은(현재 세계 헌법에 가장 가까운 것)은 '생명권'이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죽음은 이 권리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므로 인류에 대한 범죄이고,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전면전을 치러야 마땅하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이념은 생명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종교와 이념은 언제나 세속적인 존재 위의 어떤 것, 또는 그런 존재를 초월한 뭔가를 신성시 했고, 따라서 죽음에 꽤 관대했다. 오히려 몇몇 종교와 이념은 죽음의 사신을 대놓고 반겼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는 우리 존재의 의미는 내세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죽음을 이 세계에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요소로 보았다. 인간이 죽는 것은 신이 그것을 명했기 때문이고, 죽음의 순간은 의미가 폭발하는 신성한 형이상학의 경험이었다. 인간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은 신부와 랍비와 샤먼을 부르고, 생명의 잔고를 인출하고, 우주 안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죽음이 없는 즉, 천국, 지옥, 환생이 없는 세계의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한번 상상해보라.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삶과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이 둘은 죽음을 형이상학적 신비로 간주하지 않으며, 당연히 죽음에서 인생의 의미가 나온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에게 죽음은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이다.
인간은 어떻게 죽을까? 중세 동화는 모자 달린 검은 망또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죽음을 묘사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낫이 쥐어져 있다. 한 남자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고 있는데, 그 사람 앞에 갑자기 죽음의 사신이 나타나 뼈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가자!"고 한다. 그러면 그 남자는 간절히 애원한다. "안돼요! 딱 1년만, 한달만, 아니 하루만 더 살게 해줘요!" 하지만 검은 망또를 입은 자는 낮고 쉰 목소리로 "안돼! 당장 가야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죽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이 죽는 것은 검은 망또를 입은 자가 어깨를 툭툭쳐서도, 신이 죽음을 명해서도, 죽음이 우주적 규모의 거대한 계획의 불가결한 일부여서도 아니다. 인간은 어떤 기술적 결함으로 죽는다. 혈액을 펌프질하던 심장이 멈춘다. 대동맥에 지방의 찌꺼기가 쌓여 막힌다. 간에 암세포가 번진다. 폐에 세균이 증식한다. 그렇다면 이 기술적 문제는 무엇때문에 일어날까? 다른 기술적 문제들 때문이다. 혈액을 펌프질 하던 심장이 멈추는 것은 심장근육에 충분한 산소가 도달하지 않아서다. 암세포가 번지는 것은 우연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유전명령을 바꿨기 때문이다. 폐에 세균이 증식하는 것은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재채기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형이상학적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모두 기술적 문제이다.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법이 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험실의 괴짜 몇 명이면 된다. 과거에 죽음이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일이었다면 지금은 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인수받았다. 우리는 항암치료나 나노로봇으로 암세포를 죽일 수 있다. 폐에서 증식하는 세균들은 항생제로 죽일 수 있다.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면 약물과 전기충격으로 소생시킬 수 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새 심장으로 이식하면 된다. 물론 아직은 모든 기술들의 해결책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암, 세균, 유전학, 나노기술을 연구하는데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과학에 몸 담고 있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이제는 죽음을 대개 기술적 문제로 생각한다. 한 여성이 병원에 가서 "선생님, 뭐가 문제죠?" 라고 묻는다. 의사는 "음, 독감에 걸린 것 같군요." 또는 "결핵입니다." 또는 "암 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는 없다. 우리 모두는 독감, 결핵, 암이 기술적 문제들이며, 언젠가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거라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허리케인, 자동차 사고, 전쟁으로 죽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고, 막아야 했던 기술적인 문제에서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정부가 더 나은 정책을 펼쳤더라면, 지방자치단체가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군 사령관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렸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죽음은 거의 자동적으로 소송과 수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을까? 누군가 어디에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90세까지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 권리에는 만료일이 없다.
구글벤처스(2015, 노년학자 오브리 드 그레이, 세계적 석학이자 발명가 레이 커즈와일)는 2050년에는 몸이 건강하고 은행잔고가 충분한 모든 사람이 불멸을 시도할 거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한 번에 10년씩 죽음을 따돌리는 것이다. 커즈와일과 드 그레이에 따르면, 우리는 대략 10년 마다 한 번씩 병원으로 달려가 개조시술을 받을 거라고 한다. 그 시술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화하는 조직을 재생하고, 손,눈,뇌의 성능을 높일 것이다. 다음 시술일 무렵에는 의사들이 새로운 약물, 성능, 장치들을 발명해 놓고 기다릴 것이다. 커즈와일과 드 그레이의 말이 맞는다면, 거리에서 당신 옆을 지나쳐 가는 누군가는 이미 불멸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신이 걷고 있는 거리가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5번가라면 그럴 확률이 있다.
행복할 권리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시간낭비이고, 사후세계는 없으며, 행복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설파했다. 고대 사람들 대부분은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거부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기본 전제가 되었다. 내세를 의심할 때 인류는 불멸이 아니라 세속의 행복을 좇게 된다. 비극만 계속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생명추구권, 자유추구권과 함께 행복추구권을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세 가지 권리로 규정했다. 그런데 미국 독립선언문이 보장한 것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토머스 제퍼슨이 국민의 행복 보장을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는 단지 국가권력에 제한을 두려 했을 뿐이다. 즉 국가의 감시를 받지 않는 사적 선택의 영역을 개인들에게 보장하려 한 것이었다. 메리보다 존과 결혼해야 더 행복하다면, 솔트레이크 시티 보다 샌프란시스코에 살아야 더 행복하다면, 낙농업자 보다 바텐더가 되어야 더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그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간섭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지난 몇 십년 동안 입장이 바뀌었고, 벤담의 비전이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백년도 더 전에 국력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방대한 제도들이 이제는 개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살지않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산다. 원래 국가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기획된 행복추구권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행복할 권리로 바뀌었다. 마치 인간은 행복할 자연권이 있고, 우리를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것은 전부 기본권 침해이니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인류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조상들보다 훨씬 만족스러운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높은 수준의 부, 안락, 안전을 누리는 선진국의 자살률이 전통사회들 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가난과 정치불안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 페루, 아이티, 필리핀, 가나에서는 매년 10만명당 다섯명이 안되는 사람들이 자살한다. 반면, 스위스, 프랑스, 일본, 뉴질랜드 같은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들에서는 매년 열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85년에 한국은 비교적 가난한 나라였고, 전통에 얽매여 있었으며, 독재체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경제강국이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985년에 10만명당 9명 정도의 한국인이 자살한 반면,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0만명당 36명이다.
석기시대 사람들은 하루 평균 약 4,000칼로리를 사용했다. 이는 음식 뿐 아니라, 도구, 의복, 예술활동, 모닥불을 마련하는데 투입된 에너지까지 포함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인은 하루 평균 22만8천 칼로리를 사용한다. 이는 배를 채우는 에너지 뿐 아니라, 자동차, 컴퓨터, 냉장고, 텔레비전을 가동하는 에너지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렇듯 미국인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 보다 평균 60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미국인이 60배 더 행복할까?
생물학적 수준에서 보면, 기대와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는 불쾌한 감각에서 벗어나 유쾌한 감각을 느낄 때 행복하다. 제레미 벤담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자연이 인간을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주인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모든 행동, 말, 생각을 결정하게 했다고 말한다. 벤담의 후계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이란 고통없이 쾌락을 느끼는 상태일 뿐이고, 쾌락과 고통 외에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과 악을 다른 어떤 것(예를들면 신의 말씀이나 국익)에서 연역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
에피쿠로스 시대에 이런 발언은 신성모독이었다. 벤담과 밀의 시대에 이런 발언은 급진적 체제전복이었다. 하지만 21세기 초에는 과학적 정설이다. 생명과학에 따르면, 행복과 고통은 단지 그 순간에 어떤 신체감각이 우세한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할 뿐이다. 사람들은 실직해서, 이혼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신체감각이다. 우리는 수천 가지 이유로 화를 내지만, 화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화는 항상 열이나 긴장 같은 감각을 통해 일어나고, 그런 감각이 화를 솟구치게 만든다. 우리가 '열불'난다는 표현을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거꾸로, 과학에 따르면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승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 몸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감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나쁜 소식은, 유쾌한 감각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불쾌한 감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부를 가르는 골을 넣어도 그 행복이 평생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은 내리막길만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직장에서 예상치 못한 승진을 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도, 승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쾌감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그 경이로운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다시 승진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모두 진화 탓이다.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는 수 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생존과 번식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적응했을 뿐, 행복을 위해 적응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유쾌한 감각으로 보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배가 고픈 불쾌한 느낌을 피하고 기분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슴을 즐기기 위해 음식과 연인을 필사적으로 찾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슴은 얼마 못가고, 그런 감각을 느끼고 싶다면 더 많은 음식과 연인을 찾아나서야 한다.
어떤 희귀한 돌연변이에 의해, 땅콩 한 알을 먹으면 행복한 감각이 영원히 지속되는 다람쥐가 탄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술적으로 다람쥐의 뇌 회로가 바뀌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그 다람쥐는 지극히 행복할 뿐 아니라 지극히 짧은 생을 살았을 것이고, 그 희귀한 돌연변이는 그냥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행복에 도취해 배우자는 고사하고 땅콩도 더 이상 찾아 나서지 않았을 테니까. 땅콩 한 알을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픈 다른 다람쥐들이 오래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우리 인간들이 그러모으는 땅콩(돈 많이 버는 직업, 큰 집, 잘 생긴 배우자)도 우리를 오래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목표 자체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50년 전만해도 정신과 치료약에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오명은 깨졌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정신과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 그들은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 뿐 아니라, 일상적인 기분 저하와 주기적 우울감에 대처하기 위해 그런 약을 먹는다.
리탈린 같은 각성제를 복용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350만명의 어린이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치료약을 복용했다. 영국에서는 1997년에 9만2천명이던 것이 2012년에는 78만6천명으로 증가했다. 원래 목적은 주의력 장애를 치료하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어린이들이 단지 성적을 올리고 교사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런 약물을 복용한다.
군대도,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 12%,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병사 17%가 전쟁의 압박과 고통을 덜기 위해 수면제나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이 병사들에게 두려움, 우울증,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것은 포탄, 지뢰, 차량폭탄이 아니다.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신경망이 그런 문제를 일으킨다. 두 병사가 같은 곳에 어깨를 맞대고 매복하고 있어도, 한 명은 공포에 얼어붙어 정신을 잃고, 이후 수 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는 반면, 다른 병사는 용감하게 싸워 수훈메달을 받는다. 두 병사의 차이는 생화학적 기제이다. 그 기제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더 행복한 병사들과 더 효율적인 군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성능향상(업그레이드)인지 명확한 선은 없다. 의학은 언제나 표준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일로 출발하지만, 그 다음에는 같은 도구와 노하우로 표준을 뛰어넘을 수 있다. 비아그라는 원래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발기부전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화이저 사로서는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다. 수백만명의 남성들이 그 약을 먹고 정상적인 성기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능이 정상적인 남성들이 표준을 능가해 전에 경험하지 못한 성능력을 얻기 위해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폐기된다. 이것이 역사지식의 역설이다. 우리가 데이터를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
몇 세기 전만해도 인간의 지식은 더디게 쌓였고, 그에 따라 정치와 경제도 속터지는 속도로 변했다(......) 1016년의 유럽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다. 분명 왕국은 멸망할 것이고, 자연재해가 닥칠 것이다. 그렇지만 1050년에도 여전히 왕과 성직자들이 유럽을 통치할 것이고, 농업사회일 것이고, 국민 대부분이 농부일 것이고, 계속 기아, 역병, 전쟁으로 큰 고통을 당할 것이다. 반면 2017년의 우리는 2050년에 유럽이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를 갖게될 지, 어떤 직업시장이 형성될지는 물론, 사람들이 어떤 몸을 가질지 조차 말할 수 없다.
'포유류'라고 불리는 이유는 유대감 때문이다. '포유류'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맘마mamma'로 '젖가슴'이라는 뜻이다. 포유류 어미들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젖을 빨게할 만큼 새끼를 극진히 사랑한다. 포유류 새끼들은 어미와 유대감을 느끼고 어미와 가까이 있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야생에서 어미와 유대를 맺지 못한 새끼 돼지, 송아지, 강아지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최근까지 인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드문 돌연변이로 인해 새끼를 보살피지 않는 암퇘지, 암소, 암캐가 있다면, 그들 자신은 편하게 오래 살지 몰라도 그들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사피엔스가 돼지와 달리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전혀없다. 단지 증거가 없을뿐이라면, 과학자들에게 계속 조사하라고 말하면 된다. 아직 인간의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것은 그들이 충분히 꼼꼼하게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하지만 생명과학이 영혼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단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진화의 기본원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진화론이 독실한 신자들에게 고삐 풀린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 모순에 있다.
2012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오직 15퍼센트만이 호모사피엔스가 신의 개입없이 자연선택만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32퍼센트의 미국인은 인간이 초기 생명 형태부터 수 백만년에 걸쳐 진화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신이 이 쇼 전체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46퍼센트의 미국인은 성경에 적힌 그대로 신이 지난 1만년 동안의 어느 시점에 지금의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3년간 대학을 다녀도 이러한 견해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같은 조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46퍼센트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믿는 반면, 14퍼센트만이 인간이 신의 감독없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25퍼센트가 성경을 믿고 고작 29퍼센트가 자연선택만으로 우리 종이 생겼다고 믿는다.
학교가 진화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분명하지만, 열성적인 신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진화를 아예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지적 설계론'도 함께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지적 설계론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어떤 지적 존재(신)의 설계로 창조되었다. 신자들은 "아이들에게 두 이론을 모두 가르치고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고 주장한다.
증권거래소에 의식이 없는 이유
인간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야기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오직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과는 매우 다르다. 마음은 신비롭고 영구적인 어떤 실체가 아니다. 눈이나 뇌 같은 신체기관도 아니다. 마음은 고통, 쾌락, 분노, 사랑 같은 주관적 경험의 흐름이다. 이런 마음의 경험들은 서로 연결된 감각, 감정, 생각들로 구성되고, 잠시 깜빡였다 금방 사라진다. 그런 다음 다른 경험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 깜박였다가 사라져간다.(우리는 경험을 감각, 감정, 생각 같은 독자적인 범주로 분류하려 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한데 섞여있다) 이렇게 마두 뒤섞인 경험들이 모여 의식의 흐름을 구성한다. 불멸의 영혼과 달리 마음은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항상 변하며, 영구적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없다.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하나의 설이다. 반면 의식의 흐름은 우리가 매순간 직접 목격하는 구체적 실제이다. 의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다 당신은 의식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심에 사로잡혀 '주관적 경험이 정말 존재할까?'라고 자문할 때 조차 우리는 우리가 의심을 경험하고 있음을 안다.
마음의 흐름을 구성하는 의식적 경험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이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감각과 욕망이다. 로봇과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수 많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봇에는 에너지 센스가 장착되어 있어서, 배터리가 다 되면 센서가 중앙처리장치로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로봇이 콘센트로 이동해 플러그를 꽂고 배터리를 충전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봇은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에너지가 고갈되면 허기를 느끼고 그 불쾌한 감각이 멈추기를 바란다.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고, 로봇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가 고파 쓰러질 깨가지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범죄인 반면,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로봇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도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뇌가 800억개 이상의 뉴런들이 수 많은 그물처럼 연결된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수백억개 뉴런들이 수백억개 전기신호를 주고 받을 때 주관적 경험들이 일어난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것은 로마인들의 뇌가 더 크거나 도구제작 기술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더 효과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훈련된 군대는 오합지졸들을 쉽게 궤멸시켰고, 단합한 엘리트층은 무질서한 대중을 지배했다. 1914년, 300만명의 러시아 귀족, 공직자, 자본가들이 1억8천만명의 농부와 노동자들 위에 군림했다. 러시아의 엘리트층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줄 알았던 반면 1억8천만명의 보통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실제로 러시아 엘리트층이 주로 한 일이 바로 1억8천만명 하층민들이 협력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혁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숫자만으로는 부족하다. 혁명은 대개 대중이 아니라 소규모 선동가 조직에 의해 일어난다. 당신이 혁명을 시작하고 싶다면, "몇 명이나 내 생각을 지지할까?"라고 묻지말고 "내 지지자들 가운데 몇 명과 효과적으로 협력할까?"라고 물어라. 러시아 혁명은 1억8천만 농부들이 차르에 항거해 일어났을 때가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적시적소에 있었을 때 터져나왔다. 1917년, 러시아의 상류층과 중산층이 최소 300만명이던 반면 공산당원은 겨우 2만3천명이었다. 그럼에도 공산당원들이 광대한 러시아 제국을 손에 넣은 것은 조직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차르의 노쇠한 손과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떨리는 손이 러시아의 권력을 놓쳤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턱에 힘을 주어 뼈다귀를 꽉 무는 불도그처럼 권력의 고삐를 잽싸게 움켜쥐었다.
편협한 차우셰스쿠나 무바라크 보다 훨씬 큰 유연함을 보였다.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자였던 '니코라에 차우셰스쿠'는 70년이 조금 넘는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다가 결국 조직의 결함 탓에 무너졌다. 1989년12월21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시 중앙광장에서 정권을 지원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고, 8만명을 동원하라고 지시했으며, 루마니아 전역의 시민들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라디오와 텔레비젼에 귀를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연설을 시작하고 잠시 뒤,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야유를 시작하고, 이어서 또 한 사람, 삽시간에 대중은 휘파람을 불고, 욕설을 퍼붓고, '공산당은 물러나라. 차우셰스쿠를 타도하자' (......)
차우셰스쿠는 대중에게 호소했다. "동지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동지 여러분!" 하지만 동지들은 조용히 할 생각이 없었다. 부쿠레슈티 중앙광장에 모인 8만명의 민중은 발코니에 서 있는 털모자를 쓴 늙은이 보다 자신들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루마니아 공산당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것이 아니라, 그런 체제가 수십년 동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혁명은 그토록 드물게 일어날까? 이론적으로는 언제든 진격해 발코니에 선 남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데도, 왜 대중은 때로는 수백년 동안이나 계속 손뼉을 치고 환호를 보내며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할까?
차우셰스쿠와 그 일당이 40년 동안 2천만 루마니아인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 가지 중요한 조건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군대와 노동조합은 물론 스포츠협회까지, 온갖 종류의 협력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권을 충성스러운 공산당 기관원들에게 맡겼다. 둘째, 그들은 정치조직이든 경제조직이든 사회조직이든 관계없이, 반 공산세력협력의 기초가 될수 있는 모든 경쟁조직의 창설을 막았다. 셋째, 그들은 소련과 동유럽에 있는 자매 공산당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이따금씩 긴장이 조성되긴 했지만,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돕거나, 적어도 외부자가 사회주의 천국을 간섭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지배층이 온갖 곤경과 고통을 가하는데도 불구하고, 2천만 루마니아인들은 효과적인 반대조직을 만들지 못했다.
이 세가지 조건이 더 이상 유지되지않자 비로소 차우셰스쿠는 권력에서 내려왔다.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력처럼 실재하고 어길 수 없다고 믿는 일군의 규칙들이다.
객관적 실제와 주관적 실재, 그리고 상호주관적 실재
중력은 뉴턴이 발견하기 전에도 존재하던 객관적 실제다. 두통을 느끼는 내가 의사진료와 검사결과 이상없다는 진단을 받더라도 나의 고통은 실재하는 주관적 실제이다. 돈은 객관적 가치가 없지만 수십억명이 그 가치를 믿는 한 먹을수도 마실수도 없는 1달러 지폐로 음식, 음료수, 옷을 살 수 있다.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실제들을 창조했다. 7만년 동안 사피엔스가 발명한 상호주관적 실제들은 점점 막강해졌고, 오늘날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다른 동물들도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자들은 달리고, 뛰어오르고, 할퀴고 물 수 있다. 하지만 은행계좌를 만들거나, 소송을 제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소송을 제기할 줄 아는 은행가가 사바나에서 가장 포악한 사자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을 지닌다.
이렇게 상호주관적인 실제들을 창조하는 능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인문학을 생명과학에서 분리한다. 사학자들은 신이나 국가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의 발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생물학자들은 그런 것의 존재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고 뇌에 있는 모든 뉴런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의 모든 비밀을 알게될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인문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호르몬과 뉴런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내용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신들은 인간의 상상 속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상의 일은 성직자들이 관리했다(살과 피를 지닌 인간을 고용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업무를 맡기는 것과 같다)
상표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파라오도 살아있는 생명체라기 보다는 하나의 상표였다. 엘비스를 추종하는 수백만명의 팬들에게는 그의 사진이 실제 육신보다 훨씬 더 중요했고, 그들은 엘비스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그를 계속 숭배했다.
성경.
텍스트와 실제가 충돌할 경우 때로는 실제가 물러나야 한다는게 사실일까?
실제로 오늘날에도 미국 대통령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법정에 서는 증인들 역시 성경에 손을 올리고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진실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허구, 신화 그리고 오류가 넘쳐나는 책에 대고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산소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질식시켜 처형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과학은 알지 못한다. 종교만이 이런 질문들에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지식 = 경험 × 감수성
일생 동안 당신의 몸과 건강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 결정들 다수를 IBM의 왓슨 같은 컴퓨터 알고리즘이 내릴 것이다.
데이터 교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2019. 12. 28.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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