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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행복(幸福), 법륜스님의 행복, (주)나무의 마음, 2019

햇살처럼-이명우 2020. 11. 24. 09:37

622. 행복(幸福), 법륜스님의 행복, (주)나무의 마음, 2019

 

'幸福- - 사람이 생활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 사람의 운수가 좋은 일이 많이 생기거나 풍족한 삶을 누리는 상태에 있는 것. 행우(幸祐). 휴복(休福) - google -

 

머리말 -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당신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1. 왜 내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선택과 자기 모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허위허식의 감옥에서 걸어나와라

  행복의 비결

  욕심은 내려놓고 원은 세운다.

  인연과보에 시차가 있다.

 

2. 감정은 만들어진 습관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화, 상대화는 무관한 내 안의 도화선

  참지도 성내지도 않는 제3의 길

  상대방의 말에 되받아치지 못해 억울하다면

  과거의 상처를 인생의 자산으로 만드는 법

  후회는 지나간 실수에 매달리는 것

  불안은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다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

  만들어진 습관은 고칠 수 있다.

 

3.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

  모든 갈등은 관계맺기에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 vs 나쁜 사람

  세상에 다 갖춘 사람은 없다

  행복한 결혼의 조건

  남보기 좋은 인생 말고

  중도의 길을 알려주는 직장 상사

  대부분의 관계는 이기심에서 시작된다

  '기브 앤 테이크'는 거래지, 관계가 아니다

  책임감으로 살면 인생이 공허해진다

  의지하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의 씨앗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나무는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룬다

 

4.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마라

  진정한 성공이란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마라

  욕망은 장작불과 같다

  욕구의 3단계 : 욕구와 욕망 그리고 탐욕

  개인은 씨앗, 사회는 밭

  사냥꾼 두 사람이 토끼 세마리를 잡았다면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나도 행복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길

 

5.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해지는 연습

  시비분별의 마음을 내려놓고

  통찰력, 고통에서 벗어나 사물의 전모를 보는 지혜

  갈등을 키울 것인가, 아니면 이익을 얻을 것인가

  타인을 위로할 때 얻는 공덕

  사랑에도 차원이 있따

  행복은 재미와 보람 속에 있다

  인생의 시간을 행복하게 나누어 쓰는 법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것은 다 지나간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의 영상만 틀지않으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어요. 살아있는 지금,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이 순간만이 현재입니다. 현재에 집중하면 괴로움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에 겪었던 모든 일은 인생의 경험이 되어 큰 자산으로 남게 됩니다. 설령 사업에 실패했든, 실연을 당했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든 그 모든 것들을 내 인생을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안피우는 것 보다 못하고, 아무리 좋은 술을 마신다고 해도 안마시는 것 보다 못합니다. 탁 내려놓고 안먹는 쪽으로 가버리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산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인생에 목표가 없다고 해서 불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인생에는 목표가 있어야 해'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겁니다. 인생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로운 거예요. 오늘 한 끼 배부르게 먹었다면 불안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추위에 떨지 않고 잘 곳이 있다면 불안해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는 현재를 늘 놓치고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또 현재를 놓칩니다. 행복이란 어디서 뚝 떨어져서 내게 오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할 때, 그 하루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가 되는 겁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우리 마음이 바뀌지 않는데 있는데 아니라, 마음이 바뀌는 줄 알고 그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도 너무 들뜨지 않고, 싫어도 가라앉지 않고, 평온한 삶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한 번 일어나면 잠시 머물렀다가 흩어져서 사라집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마음이라는 게 이렇듯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믿을 게 못되는데, 문제는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을 알면 상대를 고치겠다고 부질없이 노력하거나, 고쳐지지 않는다고 상대를 미워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은 내가 좋아하면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누군가 그를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보는 사람의 카르마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마다 대상을 좋다, 나쁘다 인식하는 틀이 달라요.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안경의 색깔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사람과 일본사람도 인식하는 틀이 다릅니다. 한국사람은 안중근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독립운동가, 애국자로 인식하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 눈으로 보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이에요. 둘째, 내 생각에 따라주는 사람이에요. 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그 반대가 되겠지요. 결국 우리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은 자기 인식상의 문제를 객관화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거에요. 그래서 "너를 보니까 내 기분이 나쁘다."가 진실인데, 말은 "네가 나쁜 놈이다" 라고 내뱉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인데,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다고 착각합니다.

  내 마음에 딱 든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좋거나 나쁜 건 아니에요.

 

  결혼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육체적으로 스무살이 넘은 성인이 되었느냐입니다. 둘째,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배우자에게 맞추어 자기 권리의 절반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에요. 즉 상대에게 맞출 준비가 되어있느냐 입니다. 예를들어 나는 바다로 가고 싶은데 배우자가 산으로 가자고 할 때 바다로 가겠다고 고집하는게 아니라 상대에게 맞춰서 산으로 갈 수 있는가를 말합니다.

 

  능력평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첫째,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내 능력껏 하는데 좋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잘하려고 하니 긴장되고 힘이드는 거예요. 둘째는,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내 몫이지만 결과는 평가하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옛말에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를 다 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혼자 사는 것 보다 결혼해서 사는 게 낫고, 자식이 아무리 애를 먹여도 없는 것 보다 있는게 낫다면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지요. 오히려 아이들에게 항상 "고맙다, 너희가 있어서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아내에게도 '가끔 잔소리도 하지만, 당신이 있어서 내가 사는 재미가 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상대를 고맙게 여기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저절로 좋은 아버지, 훌륭한 남편이 됩니다.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보상심리가 생기게 돼요.

 

  지나친 간섭도, 무관심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걸 그냥 둬야하나. 고쳐줘야 하나?'

  이런 생각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싶은 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도와주고 싶지만 상대가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다고 할 때는 지켜보는게 좋습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감정이 생기면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자꾸 가서 도와주려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 지나친 간섭도 무관심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걸 그냥 둬야하나. 고쳐줘야 하나?' 이런 생각은 상대에게 간섭하고 싶은 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도와주고 싶지만 상대가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다고 할 때는 지켜보는게 좋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줄 수 있다거나 내가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칫 자기과시나 욕심으로 하기가 쉽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말을 해줘야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도 잘 살펴보면 내 욕심입니다. 따라서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경헙이 있으면 들려주는 가벼운 마음이 좋습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도록 놓아주세요. 도움이 필요없는데도 가서 도와주겠다고 하지말고,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그 때 능력껏 도와주세요. 그 때 비로소 남에게 도움이 되고, 내 인생고 한가해 집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건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맞추는게 가장 쉽과 빠른 해결책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 바꿔보고 싶을 때 정말로 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고치려 들지말고 지혜롭게 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지금 인간관계에서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시선을 한 번 달리해 보세요. 상대의 나쁜 점 말고 좋은 점도 찾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상대의 장점을 찾는 시선으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보면 상대에게 감사할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서 행복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마라.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은 본질적으로 남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댓가라 할 수 있어요.

 

  문제는 더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상대적 개념이라는 겁니다.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면 누군가는 '나보다' 더 적게 소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재물을 예로들면 누군가 적게 일하고 많이 받는다면, 누군가는 많이 일하고 적게 받기 마련입니다.

 

  예를들어 토끼를 사냥할 때 보면 토끼들이 주로 여름보다 겨울에 미끼를 잘 뭅니다. 그만큼 곤궁하기 때문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욕망에 굶주리면 마치 쥐가 쥐약이든 음식을 먹듯이 큰 손실을 보는 줄도 모르고 욕망을 좇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욕구가 충족되어야 즐거워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기분이 좋아요. 또 자기가 바라는데로 세상이 돌아가야 만족해 합니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껴요. 

  이 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이기고 싶은 욕구 등등 욕구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욕구가 모두 충족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몸을 생각하면 먹고 싶더라도 때로는 먹지말아야 하고, 때로는 입맛이 없어 먹기 싫지만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몸이 중심이 되어야지 입맛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옷을 입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요즘 소위말하는 값비싼 명품 옷을 입는 사람들 중에는 옷이 망가질까봐 지나치게 신경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옷이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내가 옷의 종이 되는 거에요. 

 거주하는 집도 마찬가지 입니다. 집 평수가 점점 커지고 가구나 귀중품들이 자꾸 늘어나면 집이 나를 지켜주는게 아니라 내가 집을 지키게 됩니다. 집이 주인이 되고 내가 종이 되는 거예요. 소유하려는 욕망을 무작정 따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듯 주객이 전도되고 맙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옷이며, 음식이며, 집이며 세상 모든 물건에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에 끌려가지 말과 깨어 있으라는 거에요. 

 

  인생을 살아가는데 타인의 기준에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이 분명하게 서야 합니다. 인생은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되지만 함께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몇 가지 제한은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다 자기나름대로 살아가도 되지만, 남을 해칠 자유는 없습니다. 남을 죽이거나 때리자 말라는 거에요. 둘째, 누구나 다 지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이익을 침해할 권리는 없어요. 남의 재물을 뺏거나 훔치지 말라는 겁니다. 세째, 누구나 다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강제로 성폭행하거나 성추행하지 말라는 거에요. 넷째, 누구나 다 마음껏 말 할 자유가 있지만, 말로 남을 괴롭힐 자유는 없어요.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섯째, 술마실 자유는 있지만 술에 취해 주정하며 남을 괴롭힐 자유는 없습니다. 술을 먹고 취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렇게 다섯가지 정도의 제약을 빼고는 사람은 다 자기 좋을대로 살면 됩니다.

 

  콩 한 줌을 가져다 자갈밭에 뿌렸더니 2개가 살아 싹을 틔웠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해요.

  "봐라, 살 놈은 그래도 살지 않느냐!"

  똑 같은 콩 한 줌을 가져다 기름진 밭에 뿌렸더니 2개가 죽고 나머지는 다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봐라, 죽을 놈은 죽지 않느냐!" 

  잘 되든, 못 되든 전부 씨앗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자갈밭과 기름진 밭에 각각 똑같이 씨앗을 100개 뿌렸는데, 자갈밭에서는 2개만 살고, 기름진 밭에서는 98개가 살았다면 그건 환경에 따라 씨앗의 생존확률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이처럼 농사가 잘 되려면 씨앗이 좋아야 하지만, 밭도 좋아야 하는거예요.

 

 두 사람이 협력하여 토끼 세마리를 사냥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 동안 경제를 이야기할 때 생산만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혼자서 수렵채취 할 때 경제는 생산만을 가리키는게 맞아요. 분배 개념이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둘 이상이 협력할 때는 생산만큼이나 분배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분배는 어떻게 하느냐? 기본적으로 너 한마리, 나 한마리는 먼저 가지고, 증산된 한 마리를 가지고 어떻게 나눌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는 한마리이고 최대는 세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입니다. 이 때 '내가 한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 권리에 속합니다. 내가 한 마리 이상 두 마리 이하를 갖겠다는 것은 욕망입니다. 내가 두 마리 이상 세 마리를 갖겠다는 것은 과욕입니다. 과욕(탐욕)을 부리게 되면 상대에게도 손실이지만 나에게도 조만간 손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과욕을 버려야 하고, 사회제도적으로는 과욕을 못부리게 규제를 해야 합니다. 특히, 한 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기본적 욕구는 제도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합니다.

  만약, 과욕을 규제하지 않거나 기본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나에게도 손해가 됩니다. 내가 세 마리를 다 갖고 싶어하면 상대편은 한 마리도 못갖게 되잖아요. 그러면 상대는 손해를 봤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협력을 안하게 됩니다. 즉, 내가 세 마리를 갖는 것은 오늘은 이익인데 내일의 이익은 유지할 수 없어요. 협력은 오늘 하루로써 끝나버립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약자의 기본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강자의 과욕마저도 규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과 상대적 박탈감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나에게 이 일이 보람이 있고 재미가 있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자기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게 먼저입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위대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습니다. 가볍게 생각해야 결과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어요. 

  세상에서는 남을 위하는 마음을 '이타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평가하지만, 남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반드시 보상심리가 생기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따라서 희생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하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부릅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自利'와 남을 이롭게 하는 '利他'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가루를 옮겨 꽃이 열매를 맺게 해주잖아요. 이렇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생각없이 남을 돕는데 나에게도 좋을 때,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가는 겁니다.

 

  사리분별의 마음을 내려놓고, 분별심을 내려놓고.

  우리는 흔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 '나는 맞고, 너는 그르다'는 분별의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늘 시시비비에 끌려다니고, 자꾸 경계를 지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 놓지요.

  그런데 화단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세요.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시비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꽃들을 보면서 '장미는 정말 예쁜데 채송화는 왜 저렇게 못났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한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수 많은 번뇌가 줄지어 일어납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장미꽃이 되고, 못된 짓을 많이 하면 채송화가 되나보다' 그런 분별에 따라 '전생'이라고도 하고, '사주팔자'라고도 하고,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도 이름붙이는 거예요. 그러나 장미는 다만 장미일뿐이고, 채송화는 다만 채송화일 뿐이에요.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좋고 나쁨의 차이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채송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진달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람의 기호와 취향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 남의 취향을 갖고 좋다, 나쁘다 할 게 없어요. 다만 '저 사람은 저걸 좋아하는구나', '이 사람은 이걸 좋아하는구나' 하고 차이를 발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불편할 일이 없고, 그것으로 갈등하고 싸울 일도 없습니다.

 

  구글에 초청받아 강연을 하는데, 한 직원이 이렇게 물었어요.

  "최근들어 부쩍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IS(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사태부터 중동의 분쟁, 그리고 에볼라 발생까지, 마치 온 우주가 마지막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걸까요?" 

  이런 일들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겁니다. 세상은 하나도 복잡하지 않아요. 다만 내 머리로 이 세상의 변화가 이해가 안되니까 세상이 복잡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감정을 뛰어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전부 내 문제로 껴안거나 무조건 참으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감정에 치우쳐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에요.

 

  결국 우리는 제 나름대로 소신이라고 믿는 각자의 편견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 편견에 비친 세상이 옳다, 그르다 판단해요. 이렇듯 우리는 늘 자기 위주의 좁은 범위만을 보고 또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정의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보니까 자식도 보이지 않고, 부모도 보이지 않고, 아내도 남편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 집만 보니까 이웃집이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만 보니까 남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종교만 보니까 이웃 종교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한 측면만 고집하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많은 분들의 질문에 해답을 드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 뿐이에요. 앞면만 보는 사람에게 "저쪽 면은 어때요?"하고 묻는 것 뿐입니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사물의 한 단면만 보는 것을 편견이라 하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을 통찰력(洞察力) 또는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남에게 도움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서 살만해지면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았던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내기가 싫기 때문이죠. 또 얻기를 바라는 사람의 소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받을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남에게 도움받을 상황이 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결국 도움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존재를 불쌍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물질적 보시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에요.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항상 부족함에 허덕이게 되고, 받을 때 잠깐 덕볼 때 잠깐 좋을 뿐이지,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주려고 하고 나무려고 하면 가진 것에 상관없이 부자가 된 기분이에요. 꼭 큰걸 나눠야먄 하는 건 아닙니다. 무엇이든 나누는 마음이면 돼요. 먹을 게 필요한 사람에게 밥 한끼를 나누어주고,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남는 옷을 내주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모두 나눔입니다. 이렇게 작은 나눔을 실천하다보면 내어주는 것보다 얻는게 훨씬 더 많아요.

  

 우리는 저마다 괴롭고 힘든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고통속에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면 단순히 남을 돕는데서 그치지 않고 내 문제가 가벼워집니다.

  '아, 내 문제는 별것 아니구나!'

  '나는 참 가진게 많은 행복한 사람이구나!'

  남을 돕다보면 사소한 것에 연연하며 괴로워하던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내가 행복해 집니다. 

 

  저는 강의할 때 강사료를 받지 않습니다. 강사료를 받고 하면 노동이 되지만 안받고 그냥하면 봉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댓가를 받지 못하면서도 강제로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노예생활'이고, 자기의 재능이나 능력을 돈 받고 팔면 '노동'이라고 합니다. 100원을 받기로 하고 100원 어치 노동을 해줬는데 50원 밖에 못받는다면 그건 '노동착취'에요. 하지만 공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아무 것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을 많이 하고 월급을 조금 받는 직장을 스스로 선택해서 다니면 봉사하는 것과 같아요. 반면에 일은 조금하고, 월급은 많이 주는 직장에 다니면 빚지는 인생이에요.. 

 

2019.10.9. 한글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