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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동문선, 2019

햇살처럼-이명우 2020. 12. 2. 17:13

624. 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동문선, 2019

 

  장 도미느크 보비(1952년생) 프랑스 <엘르>잡지 편집장.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자상한 아버지, 멋진 생활을 사랑했으며, 똑똑한 대식가, 좋은 말을 골라쓰는 유머러스한 남자, 앞서가는 정신의 소유자로서 누구보다도 자유를 구가하던 남자.

  1995년 12월 28일(43세)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주 후 의식은 회복했으나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 뿐. 그로부터 15개월 남짓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1997년 3월 첫째주 <잠수종과 나비>는 프랑스 전 서점에 깔렸다.

 

  잠수종이 훨씬 덜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하고싶은 일이 너무 많다. 시간 속으로, 혹은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닐 수도 있다. 불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하고, 미다스 왕의 황금궁전을 거닐 수도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한 이후 줄곧 거리를 두고 관망하던 친지들을 어색한 침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당사자인 내 앞에서 쉬쉬할 필요가 없어지자, 우리는 '로크드 인 신드롬'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20주 사이에 몸무게가 30kg이나 줄었다. 사고를 당하기 일주일 전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놀라운 체중감소 효과를 기대하진 않았다.

 

  나는 초심자들이 길을 찾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더라도 초연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모르고 있던 장소, 처음 보는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되거니와, 때로는 주방으 음식냄새를 맡을 행운을 잡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서 벗어난 직후 바퀴의자에 앉아 산책길에 나섰을 무렵, 우연히 등대를 발견한 것도 길을 잃은 덕분이었다. 길을 잘못들어 헤매던 계단참을 돌아설 때, 갑자기 눈 앞에 등대가 나타났다. 날아갈 듯 솟아오른 날씬한 자태를 럭비선서의 유니폼을 연상시키는 흰 줄무늬와 빨간 줄무늬로 치장하여, 강하면서도 안정감 있어 보였다. 나는 즉석에서 뱃사람들을 지켜주는 우애의 상징인 이 등대를 나의 수호신으로 삼기로 했다. 고독이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환자들의 벗.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것이라곤 마비된 내 손가락을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친구의 손길 밖에 없다. 나는 얼굴엔 온통 파란 물감을 칠하고, 머리엔 다이너마이트를 칭칭 감은 미인 피에로가 된다. 성냥불을 그어대고 싶은 충동이 순식간에 구름결처럼 나를 스쳐간다.

 

  상드린느의 하얀 가운에 달려있는 명찰에는 언어장애치료사라고 적혀있지만, 수호천사라고 읽는 편이 더 잘어울린다. 내게 의사소통 체계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상드린느이니,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눈을 깜박인다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몇 안되는 제스처만으로 문을 닫아달라, 변기 손잡이를 고쳐달라, 혹은 TV볼륨을 줄여달라거나 베게를 높여달라는 요구를 전달해야 한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는 이처럼 강요된 고독을 통해 일종의 체념을 터득했으며,

 

  다정한 친지들의 전화에 침묵이 아닌 아무 말이라도 한 마디 할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

  때때로 나는 내가 듣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흔 두 살이라는 고령때문에 아버지의 아파트 계단도 못내려오실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둘다 '로크드 인 신드롬' 환자인 셈이다. 나는 마비된 내 몸 속에 갇혔고, 아버지는 4층 계단 때문에 발목이 묶이셨다.

 

  대개의 경우, 나는 내가 꾼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꿈의 시나리오를 잊어버리고, 영상 또한 희미해져 버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지난 12월에 꾼 꿈은 레이져 광선만큼이나 정확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일까? 아마도 혼수상태의 한 특징일지도 모른다. 현실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이므로 꿈은 증발해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똘똘 뭉쳐 기나긴 환상효과를 만들어 연재소설처럼 문득문득 기억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은 아닐까.

 

  불쑥불쑥 감정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렸다.

  (편지를 통해)

  나와의 관계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삶의 의미와 영혼의 고귀함, 인생의 오묘함 들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경박하게 보이는 인간관계 밑에 인생의 깊이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세상은, 나를 사고 전에 알았던 사람과 사고 후에 알게 된 사람이라는 두 그룹으로 이등분된다.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도 같다.

 

  늘씬한 갈색머리 여인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육체 곁에서 정상인으로서의 마지막 잠을 자고 눈을 떴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그 아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열쇠로 가득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줄만큼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보아야겠다. 나는 그 곳으로 간다.

 

  클로드 망디빌(조언자 이름) 대필자

 

  프랑스어 알파벳을 가장 많이 쓰는 순서로 나열해두고 그가 눈을 깜박여 알파벳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으며 써 내려갈 수 있는 양은 하루 반쪽 정도. 128쪽의 <잠수종과 나비>를 완성하는데는 1년3개월의 시간과 20만번 이상의 눈깜박임이 필요했습니다. 1997년 3월 6일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고, <잠수종과 나비>를 위해 혼신을 다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책을 위해 겨우 버틴건지 그는 책이 출판된 후 3일만인 3월 9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2020.1.4. 토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