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22.
빅터 E.프랭클(VICTOR E. FRANCL 1905~1997)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네셔널 대학에서 로고 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의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다하우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보냈다.
이 책은 1945년에 씌었고, 1984년에 개정되었다.
1.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 이야기/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집행유예 망상/ 삶과 죽음의 갈림길/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 냉담한 궁금증/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마라/ 혐오감/ 무감각/ 주검과 수프/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수감자들이 가장 흔하게 꾸는 꿈/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메마른 정서/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안에서,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주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예술/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머/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상대적 행복을 느꼈던 환자생활/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나 혼자만의 공간/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운명의 장난/ 테헤란에서의 죽음/ 운명을 가르는 결정/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엇갈린 운명/ 무감각의 원인/ 인간의 정신적 자유/ 시련의 의미/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살아야할 이유/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자살방지를 위한 노력/ 집단 정신 치료의 경험/ 수용소의 여러 인간 군상/ 해방의 체험/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비통과 환멸/
2. 로고 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 테라피의 기본 개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실존적 좌절/ 누제닉 노이로제/ 정신의 역동성/ 실존적 공허/ 삶의 의미/ 존재의 본질/ 사랑의 의미/ 시련의 의미/ 임상에 따른 문제들/ 로고 드라마/ 초의미/ 삶의 일회성/ 기법으로서의 로고 테라피/ 집단적 신경증/ 범 결정론에 대한 비판/ 정신의학도의 신조/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비극 속에서의 낙관
"성공을 목표로 삼지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은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 중에서 누제늬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담배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할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나치대원으로부터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는 사람도 있었다.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요된 사형 집행인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대신 자기가 그 희생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용소에 도착한 날 밤 절대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철조망에 몸을 던진다는 말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댄다는 뜻으로, 당시 수용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자살방법을 이야기 하는 관용어구였다.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계산하고, 기회를 감안해보아도 보통 수감자들이 살아서 나갈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기가 수 많은 선별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살아 남는 극소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 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마라.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보일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거야.(......)"
첫번째 단계. 충격. 심리적 반응의 제1단계를 특징짓는 감정, 즉 나는 내 인생 전부를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단계. 상대적인 무감각 단계,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데 자기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협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도 혐오감을 느낀다.
나는 막사 맞은 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마지막에 남아있던 피하지방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놓은 것 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소중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 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해도) 여전히 더할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돈 많고 권력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자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게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수용소에서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과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 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않고 대신 수용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해줄 대답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를 행동과 올바를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를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등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라!"
경험 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둔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져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실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되고, 우리들의 가망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갇혀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 離人症)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왔던가!
육체는 마음보다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 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vicious circle formation)와 피드백 기제(feedback mechanism)을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현장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Logotherapy' 라는 이름은 'Logos'는 '의미'라는 그리스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지에 초점을 맞춘가.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는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부르는 권력에의 추구와 더불어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있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 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존스홉킨스대학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조사 결과(2년 동안 진행), 설문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학생 16%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답하는 반면, 78%는 첫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질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고통이 실존적 좌절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것이 과연 있을까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 병이 생길거라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환이 아니다. 후자의 견지에서 전자를 해석하다보면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진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로고테라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주는 과정에서는 인간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않고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 대상이 된다.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과정에서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 동안 숨어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 보다는 권태가 더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 많은 사람이 새로 얻게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자살의 상당 수가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돼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때로는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 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본다.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인간존재의 자기초월'이라 하며,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취해야 할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의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써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식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딘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의미를 발견하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것은 아니다.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쌓아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반추해 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 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지닌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사랑했던 사람 뿐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않지만 말이야!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 기법은 '마음 속에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통해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실례가 생각난다. 땀흘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한 젊은 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땀을 많이 흘릴 것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예기불안이 정말로 땀을 많이 흘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자 나는 환자에게 땀을 많이 흘리게 될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릴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충고했다.
일주일 후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예지불안을 일으킬만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전에는 탐을 한 바가지밖에 안흘렸지만 이제는 열 바가지는 흘리게 될걸"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는가? 공포증으로 4년 동안 고생하던 그는 단 일주일만에 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여기서 여러분은 환자의 태도가 반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안이라는 돛대에서 바람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 치료에서는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자기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은 역설의도라는 로고테라피 치료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역설의도 기법이 먹혀 들어가는 것은 인간에게 이런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과 종교> 고든 W.올포트-
역설의도는 수면장애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 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대개의 경우, 생물체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수면을 알아서 취한다는 사실을 환자가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은 결국 어떻게는 잠을 자야겠다는 과도한 의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말고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고 권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는 잠을 자야겠다는 지나친 집착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라는 예기불안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잠을 자지 않겠다는 역설의도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즉시 잠이 오게 되어있다.
역설의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예기불안 때문에 생기는 강박충동상태와 공포증을 치료할 때에는 이 기법이 매우 유용하다.
정신분석은 모든 문제를 성욕의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내가 볼 때, 정신분석에는 이보다 훨씬 잘못되고 위험천만한 가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범결정론이다. 범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인간은 조건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추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루비앙카 감옥에서,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감옥에 그렇게 오래 있는 동안 내가 사귄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
이것이 '스타인호프의 도살자' J 박사의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인간 행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기계나 자동장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정신(psyche, 개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의 정신적, 심리적 구조)의 메카니즘이나 역동성에 대해 예측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을 넘어선 존재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은 라틴어로 '옵티멈 optim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첫째,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둘째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의식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없게 됐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됐다는 것과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집단적 신경증후군, 이 세가지 단면은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
우울증, 자살기도가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 수없이 하는 이야기가 자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한 사실이다.
공격성,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서로 협동하게 됐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는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닌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 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 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 된 침상에 누워있었지.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 졌다.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
2023.2.11.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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