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 재수사 1,2, 장강명, 은행나무, 2022.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방차 사이렌 : 소리가 낮고 길다.
구급차 사이렌 : 조금 더 전자음 느낌이다.
경찰차 사이렌 : 박자는 구급차와, 음색은 소방차와 비슷하다.
경찰차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아질수록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실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들을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차들은 대부분 순찰차들이다.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112순찰차이거나 교통단속을 하는, 우리 지금 급하닊 비켜달라고 외치는 차들.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은 그런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형사가 그렇게 사이렌을 울리면 범인들한테 도망가라고 경고하는 꼴이된다.
"(......) 수사 시스템. 그 시스템은 더 큰 시스템의 한 부분인거야.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고, 교도소에서 범인을 가두고 벌을 주지. 뭐, 이건 형사 사법시스템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큰 시스템을 생각해보라고. 형사는 결코 범인을 잡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일을 하는건 커다란 시스템이고, 사람들은 거기서 자기가 맡은 역할만 할 뿐이지. 형사도 그 중 한 사람이고"
"더 큰 시스템 전체에서 형사 한 사람의 역할을 보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거지. 이게 우스운게, 괜찮은 형사의 영향력은 작아. 무능한 형사의 영향력도 크지않아. 그런데 나쁜 형사의 영향력은 커."
"어느 형사가 제 할일을 잘해서 그 팀이 범인을 잡는다. 그래서 검사가 기소하고, 판사가 유죄 때리고 범인이 감옥을 간다. 그러면 그걸로 끝이지. 부품들이 제대로 굴러간거야. 어느 형사가 게을러서 자기 일을 안한다. 또는 무능해서 일을 잘 못한다. 이건 시스템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않아. 뭐, 이 시스템에는 보완장치들이 있으니까. 그 형사가 증거들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하거나 목격자 진술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돼. 어디 나사가 좀 삐걱거리거나 벨트가 느슨해진 정도야.
그런데 어느 형사가 증거를 조작했다거나 증인을 협박했다면? 그러면 관련 증거를 전부 못쓰게 돼. 최악의 경우에는 진범을 잡아놓고도 풀어줘야 할 수도 있어. 볼트 조각이 부러져서 다른 톱니 사이에 끼면 기계장치 전체가 멈추어버릴 수도 있는거지. 다른 부품들도 못쓰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고. 바꿔말하면,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나쁜 형사에 취약해. 그러니까 이 시스템에 몸담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나쁜 부품이 안된다는 거야. 차라리 게으르고 헐렁한 게 나아."
(우울증 약으로는 렉사로프를 처방받는다. 렉사로프의 부작용 중 하나는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안구건조증과 입마름 현상에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늘 일회용 인공눈물 캡슐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그걸 점안한다.)
한국은 공공과 민간부문을 합해 CCTV가 1,000만대가 설치됐다고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새차에는 거의 대부분 차량용 블랙박스가 깔려있고, 걸어다니는 CCTV나 마찬가지인 스마트폰 보급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피해자가 사망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왜 사회는 나를 처벌하려 할까? 사회 그 자신을 위해서라고 지하인은 주장한다. 사회는 자신들이 움직이고 번성하는 방식에 방해가 되는 일을 악이라고 규정한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을 때 길을 건너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죄의식을 심어준다.
그 아이들은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도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어른으로 자라난다. (......) 그런 사회화는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지하인은 그런 교육을 두고 사회화가 아니라 '가축화'라고 빈정거린다. 사람은 선택권이 있을 때에만 옳은 일과 옳지않은 일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세다. 인생에서 노상강도를 당할 가능성, 교통사고를 당할 가능성, 벼락을 맞을 가능성, 뇌졸증이나 혈액암에 걸릴 가능성, 슈퍼 박테리아에 걸릴 가능성이 늘 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피하려하면서도 결국 없애지 못하며, 어느 수준에서 감수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기쁨과 감동을 모두 희생하는 나날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삶에 맞선다는 것이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마지막 몇방울을 어디까지 마시고 어디서부터 포기할 지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팬이었던 카뮈는 <<악령>>을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연극에서도 직접 이반 카라마조프역을 맡았다. 카뮈의 철학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는 키릴로프, 스트브로긴, 이반 카라마조프에 대한 분석이 비중있게 나온다.
모든 것이 허용될 때, 그래서 어떤 것에도 의미가 깃들 수 없고 진리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살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걸까? 카뮈는 반항하라고 한다. 끝내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겠지만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현실 그 자체에 우리가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세기까지도 아이를 잘 죽인다는 소문이 난 유모를 찾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이런 문화가 사라지고 영아살해가 최악의 범죄 취급을 받게 된 것은 계몽주의가 퍼진 다음부터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느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 권리들은 정부보다 앞선다고 규정한다. 이 규범은 일단 태어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생명을 보호받고 자유와 행복추구에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거의 도덕적 직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성체 침팬지들이 고문과 같은 동물실험을 당하는데 대해 그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분명히 죽을, 아직 의식없는 상태인 미숙아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 나는 그 감정서를 보고 새로운 생각을 못해. 이미 사건 정황에 대해 생각이 굳어져 버렸어. 그러니까 연형사가 다른 시선으로 잘 살펴봐."
공리주의자, 싱어의 윤리는 단순하다.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자. 그는 고통에 비극적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모른다. 싱어 뿐 아니라 모든 공리주의자들이 그 점을 모른다.
어떤 의미는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우주와 자신을 서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사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한다.
좋은 서사를 만드는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시련과 역경이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상상은 늘 상세하고 매혹적인 반면, 천국에 대한 묘사는 따분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린다.
좋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은 고난이다. 좋은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사상가와 작가들이 그린 유토피아에 대해 들으며 우리는 도리어 섬뜩함을 느낀다. 그런 곳은 좋은 사회일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나왔을 당시만해도 서구 지식인들에게 명예는 생명이니 행복만큼이나, 아니 때로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재무장관을 지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독립전쟁 영웅이자 현직 부통령이었던 에런 버와 결투를 벌이다 죽었다.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명예가 더 소중했다. 명예를 문자 그대로 삶의 목표로 믿는 이들도 많았다.
19세기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는 흔한 일이었다. 푸시킨이나 수학자 갈루아 같은 명사도 결투에서 총을 맞고 숨졌다.
명예는 1차 세계대전의 부분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적어도 참전국 국민들이 그토록 쉽게 전쟁에 동의하고, 전쟁 초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로 달려간 이유다.
유럽인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명예라는 가치를 거의 폐기처분했다. 그러나 그 전부터 계몽사상은 명예라는 개념을 착실하게 침식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연권이란 생명, 자유, 평등, 행복추구에 대한 것이라고 학교에서 배운 젊은이들은 결투문화를 우습다고 여기게 되었다. 생명과 명예를 같은 무게로 취급한다는 태도 자체가 '비상식'이 되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는 티모스(Thymos)-한국에서는 패기, 기개, 기백, 용기 등으로 번역한다-는 19세기까지만 해도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잊힌 개념이다. 가끔 언급할 때에도 젊은 수컷들이나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집착하는 부질없고 위험한 감정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오늘날 인도나 이슬람국가에서 명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계몽주의 사회시민들은 자동으로 눈살을 찌푸린다.
계몽사상은 세속 이데올로기다. 이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의 인민에게 주어지는 삶의 목표는 행복이다. 생명, 자유, 평등 같은 다른 가치는 한 개인이, 노력 여부와는 관계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과 같은 정도만큼만 누릴 수 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영국인만 제외하고."라고 썼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영국인이다.
"(......) 성폭행 뒤 여성 생식기에 손상 흔적이 남지않는 비율은 40퍼센트에요. 그러니까 상처가 없다고 성폭행이 아니라고 하면 인격살인이 되는 겁니다. 성폭행 피해자분들 중에서도 이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몸에 상처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정신과에 가시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전혀 그럴일이 아니에요."
정철희와 박태웅과 어느 선 이상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면 그 다음에 상대가 술을 마시자고 할 때 거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사실을 의식하면 꼭 자신이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지혜는 정철희와 박태웅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찔릴 사람들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럴 각오였다. 그러나 자정 넘어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정철희와 박태웅이 남자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성별과 상관없이 상사라서 그런건지 연지혜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 두가지 요인도 분명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연지혜 자신이 타인을 만날 때 선을 긋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선 안으로 상대가 들어오는 것을 침입이라고 여겼다.
선을 한 번 넘은 사람은 그런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 처럼 군다. 아니, 사람들 상당수는 아예 그런 선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울퉁불퉁한 심리적 안전거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처음부터 얼마간 어색하게 지내는 편이 나았다.
몸은 꼼짝할 수 없었지만 머리속에 수십, 수백가지 생각이 폭발하듯 떠올랐다. 어떤 생각은 채 문장이 되기도 전에 사라졌고, 어떤 생각은 불길한 문구가 되어 음침하게 빈나며 빙글빙글 돌았다.
사회가 20여년 동안 발전한게 맞을까?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그저 유행이 돌고 돌 뿐이라면 우리가 뭘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유지보수를 위해? 최악을 막기 위해? 하긴, 그게 경찰이 아는 일이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선언에는 행복에 대한 정의 외에도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첨예한 논쟁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흐릿한 경계지대가 있다. 태아라든가, 뇌사상태 처럼.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구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임산부의 행복추구권은 축소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회색지대는 더 넓어지리라. 머지 않은 장래에 인류는 유전자 조작기술로 반인반수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한 사람의 기억과 의지를 기계에 옮길 수 도 있을테고, 네안데르탈린 같은 우리의 옛 친척을 살려낼 수도 있다. 그들ㅇ게도 기본권을 부여해야 할까?
'양도할 수 없다'는 문구도 혼란스럽다.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또 다른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100명의 행복추구권이라면 한 사람의 행복추구권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 한 사람에게 강제로 양보를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혹시 1만명, 아니 100만명의 생명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 아닐까?
계몽사상의 신봉자들은 이런 딜레마의 존재 자체를 애써 감추려 한다.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나 100만명의 생명이 똑같이 존엄하다'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 보다도 더 억지스러운 얘기다. 어떤 정부도 그런 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늘 우선순위를 따져야 한다. 어떤 백신이 매년 수십만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백만명에 한 명 꼴로 알레르기 쇼크로 인한 사망자가 나올 때, 우리는 그 백신을 아이에게 접종시킬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결정은 정부의 정책 담당자만이 하는 것이라고,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고민거리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명이 넘는다. 보통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 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명의 끼니 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가구를 살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 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 모두 학살자다.
계몽주의 사회는 그런 선택을 허용한다. 스마트폰을 살까? 제2세계에 기부할까? 기부한다면 얼마나 할까?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사회가 침해할 수 없기에.
그리고 그런 자유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어리둥절 해진다.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 조차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주먹구구식으로 타협한다. '수입의 10퍼센트 정도를 기부하면 괜찮겠지' 하는 식으로.
정의의 시스템도, 교화의 시스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형사와 교도관과 죄수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과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판단해 행동할 뿐이라는. 정의나 교화는 그 앞에 붙은 흐릿한 간판일 뿐이라는.
인간의 공감능력은 타인의 고통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부정확하다.
우리는 종이에 그려진 캐릭터가 좌절하는 만화속 장면을 보고 슬퍼서 눈물흘린다. 새끼 고양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분노한다. 그러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12만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여기서 끔찍한 고문과 학대행위가 자행된다'는 뉴스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못한다.
감정이입은 무척 선택적이기도 하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는 잘 발휘되지 않는다. 인간이 같은 편에 대해 한없이 공감하면서 동시에 적을 향해 무한히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다. 물론 지금도 인터넷에서 그런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심리적 고통의 영역에는 별 합리적인 근거나 일관성이 없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을, 어떤 사람은 투자실패를,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의 패배를 가장 고통스럽게 여긴다. 주변에서 모두 아름답다고 흠모하는 사람이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있기도 하다. 만약 약물 금단 증상처럼 누구도 그 필요나 의미를 부정하지 못할 고통도 있다. 공감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아래 윤리의 논리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전화통화나 신용카드 거래명세서, 교통카드나 고속도로 통행료 납부기록, 의료기관이나 공공시설 이용내역 같은 사회적 활동의 흔적을 생활반응이라고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진화론의 시간관계에는 종결이라는 개념이 없다. 유권자들의 선택, 소비와 생산, 진화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내세도 낙원도 없다. 현세가 무한히, 요동을 치며 이어진다. 종말이 없기에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이야기도 없다. 이 세계관에서는 구원도,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전쟁과 전략수립을 멈출 수 없다.
"글로드 로랭의 <아키스와 갈라테이아가 있는 풍경>이라는 작품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아했던 작품이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도 비중있게 등장합니다. <<악령>>에도 나오고, <<미성년>>에도 나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저 그림 속 정경을 인류의 이상향처럼 느꼈나 봅니다."
"경찰 업무는 의미있는 거예요?"
" 글쎄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일과 고통을 없애는 일은 분명 다른 것 같아요. 앞의 것은 좋은 일이고, 뒤의 것은 옳은 일이에요. 저는 옳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옳은 일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하면서 인생을 보낼거 같았고요. 의사나 간호사가 될 수도 있었겠고, 소방관도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계몽주의 세계관에서 자란 현대인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극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들은 비극을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슬픔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삶과 세계의 중요한 구성요소였고,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세인은 고대인 보다 못했다. 그들은 비극을 처벌과 역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이 있었고, 모든 것은 마지막 심판 때 바로잡힐 예정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비극을 껴안을 수 있었다.
현대인은 비극을 실패로, 혹은 교훈극으로, 혹은 사회비판으로 겨우 받아들인다. 행복, 쾌락, 효용이 인생의 목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현대 독자와 관객들은 비극 속에서 인물이 드러내는 고귀함을 음미하지 못하고 그들이 왜 실패했는가를 파고든다. 오셀로는 질투가 문제였고, 햄릿은 우유부단함 때문에 망했다는 식이다.
신계몽주의는 행복이 아닌 의미를 인생의 목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기에 의미있는 불행이 의미없는 행복보다 낫다고 설명한다. 의미는 서사 속에서 생겨나며, 서사는 고통으로 만들어진다.
"유네스코 면접을 볼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문명의 과제가 통제력이라고요. 우리 문명에서는 기업도, 도시도, 국가도, 자연스럽게 팽창을 목표로 삼게 되요. 조금 시야를 넓히면 동식물도 그렇죠. 평화로운 방법으로 규모를 좆ㄹ하고 개체들의 웰빙을 추구하는 종은 없어보여요. 기회가 생기면 그저 번식해서 어떻게든 수를 늘리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거기에 맞서야 해요. 아주 부자연스럽고 낯선 방향이지만, 그래야 지속가능할 수 있어요."
멀리 떨어진 물체는 작게 보인다. 멀리 떨어진 빛은 약해지는데, 이때 약해지는 정도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은 멀수록 약해진다. 이 때 약해지는 정도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의 표면적이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3차원 공간의 특성 때문이다. 다시말해 우리 우주의 깊은 본성이다. 빛의 강도, 중력이나 잔자기력 뿐 아니라 다른 힘과 에너지도 매질이 균질한 3차원 공간에서 퍼질 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강도가 약해진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법칙은 물리세계 뿐 아니라 인지 세계에서도 거의 흡사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어떤 사건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는 사건과 사람 사이의 인지적 거리에 반비례한다.
중동에서 벌어진 폭탄테러 보다, 키우던 개의 죽음이 더 슬프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세상을 그런 식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우리 모두가 대통령, 수상, 유엔사무총장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타인에 대한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개인의 힘과 세계 인식에 달려있다. 힘과 세계 인식 모두 거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개인의 도덕적 책임도 거리의 영향을 받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 내 옆에 있는 뚱뚱한 남자의 생명과, 멀리 선로에 묶인 인부 한 사람의 생명은 같다. 하지만 지상에서, 한 사람의 육신과 정신에서 트롤리 딜레마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내 옆에 있는 남자의 생명에 대한 책임은 멀리 있는 사람들의 생명보다 내게 더 크게 지워진다.
개인은 가까이 있는 사람의 고통에 더 큰 책임을 진다.
멀리 떨어진 별의 중력도 사라지지 않고 지구에 영향을 미치듯, 멀리 떨어진 사람의 고통에도 우리는 도덕적 책임을 진다. 하지만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책임의 크기는 작아진다.
물론 타인에 대한 책임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 한다고 깔끔하게 정리되기는 어렵다. 인지 세계에서의 거리 개념은 물리 세계의 거리와 다르고 측정하기도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이 인지 세계에서 격자를 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나가사끼까지 거리는 280km 정도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325km 떨어져 있다.
하지만 부산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서울이 나가사끼 보다 훨씬 가까운 도시다. 부산 사람들은 나가사끼에서 일어난 비극 보다 서울에서 벌어진 불행에 더 슬퍼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은 한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격자) 안에 있는 도시지만 나가사끼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이유 하나는 미디어에 의한 왜곡이다.
우리의 공감능력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었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는 자주 보고 들은 대상이 우리 곁에 있다고 여긴다.
이는 미니어가 발전하기 이전 전근대에서는 이치에 맞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원거리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남수단의 수도 주바까지 거리는 약 1만km 남짓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에게는 1만1천km 이상 떨어진 뉴욕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뉴욕과 주바에서 같은 시각 같은 규모로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때 서울 사람들은 뉴욕의 비극에 대해 더 많이 듣게 된다. 서울 사람들은 뉴욕 사람들의 고통에 더 공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1권 끝.
재수사 2권.
"우리는 젊었을 때 우리가 불만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나봐. 록은 불만을 터뜨리는 음악, 분노의 음악이었어. 서툰 가사로나마 기성세대를 욕하고 요구사항을 외치는 음악이었다고. 그에 비하면 블루스는 남한테 뭐라고 하는 음악이 아니지. 슬픔을 삭이는 선율인거야."
'정말 예쁜 아이야. 똑똑하고.' 유연희는 생각했다. 그 거침없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정교한 유리 세공품이 탁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상황이 저절로 떠올랐다.
우리는 사실과 상상의 복합체 속에서 살고 있는 '사실과 상상의 복합체'이다.
우리는 의미 속에 살고 있는 의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다.
신과 내세를 믿지않는 사람도, 삶의 목적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이 죽음 뒤에 남길 유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쓴다.
자식을 남기는데 집착하는 이도 있다. 생물학적 후손을 통해 가문이라든가 민족, 인류라고 하는 커다란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이나 업적으로 인류의 기억 속에 남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단순한 유전자 묶음 이상임을, 자신의 본질 일부가 인지세계의 의미이며, 그 의미가 더 큰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명예를 얻은 개체가 번식에 유리하기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는 해석은 운명교향곡의 위대함을 공기의 진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만큼이나 조잡하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영광을 추구했다. 아킬레우스는 생물학적 후손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돈이 의미인 것처럼 법도 의미이고, 돈이 현실인 것처럼 법도 현실이다. 음악이 의미인 것처럼 영광도 의미이고, 음악이 현실인 것처럼 영광도 현실이다. 모든 현실은 사실-상상 복합체이며, 거기서 상상을 빼면 사실이 남는게 아니라 조각난 비현실이 남는다.
우리는 왜 평판에 신경을 쓸까? 평판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는 '나'의 일부이다. '살아 숨쉬는 나의 몸뚱이' 역시 '나'의 일부다. 우리는 평판이 더럽혀지는 일을 신체에 대한 공격만큼 아프게 받아들인다. 실제로 인간의 뇌는 그 두 가지 고통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사람에게 진통제가 위안이 될 수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진 사실-상상 복합체다. 그것은 영원하지는 않다. 그러나 '살아 숨쉬는 나의 몸뚱이' 보다는 더 오래 산다.
'나'는 개체라기 보다는 일종의 기업에 가깝다. '나'에게 브랜드는 엄연한 현실이다. 인스타그램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명예살인을 저지르는 이들은 모두 인간이 몸뚱이를 넘어선 형이상학적 구조물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고대인들이 현대인 보다 더 현명했다. 그들은 인간이 물리세계와 인지세계에 걸쳐있는 존재임을 이해했고 어느쪽으로든 인간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해야할 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피의자를 고문했고, 신체 훼손형을 집행했고, 재판없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계몽주의는 이에 대한 환멸이자 반발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 가장 큰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 아니었다. 특히, 지도층 인사가 사회에 대한 중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그러했다. 화형이나 십자가형 보다 더 가혹하고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기록말살형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도입한 이크나톤과 그 후계자들이 이 형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운 방화범 헤로스트라토스가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는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 카리누스 같은 폭군 황제들, 메살리나, 파우스타 같은 악명 높은 황후들, 리빌라, 마마이아 같은 황족이 대상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인물들은 그들에게 그 형벌을 내린 당내 권력자들 보다 훗날 더 유명해졌다.
잘 아는 사회부 기자. 스님에게 육회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는 식이다. 수사 중인 사안은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피의사실 공표죄는 처벌도 무겁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비둘기를 좋아한 사내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저런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않다. 실제로 저런 생활을 하는 사랆은 금새 공허함과 자기혐오에 빠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왜?
사내가 주관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경제학자와 공리주의자들은 말한다.
사내의 삶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삶에 객관적인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 그런 주장은 이중으로 힘겨운데, 우선 개인의 삶 외부에 의미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전에 신을 죽였지않은가?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므로 신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바깥의 의미의 근원을 찾은 뒤에는 더 큰 골칫거리를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의 우열을 정할 수 있게 된다. 의미의 근원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 때 우리는 비둘기를 관찰하며 기뻐하는 일 따위에는 가치가 없다고 그런 일에 허비한 인생은 한심한 인생이었다고 사내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삶의 의미에 있어서도 빈부 격차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 내가 등산 갔다가 굴러떨어져 한쪽 눈이 먼다.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다. 그러면 아마 난 한 1년 있으면 그량저냥 적응해서 한 눈이나 한 다리 없이 잘 살걸요? 그런데 누가 내 다리를 잘랐다. 내 눈을 찔러서 멀게 했다. 그래서 그놈이 계속 떵떵거리며 잘 살면? 그러면 나는 절대 잘 살지 못해요. 누가 내 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버젓이 잘 돌아다닌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결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인간은 손해는 잊을 수 있지만 악의는 잊지 못해요. 훌훌 털어버릴 수 없다구요."
"(......) 푸 파이터스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하는 게 이거에요. 인생 데이브 그롤처럼 살아야 한다고. 커트 코베인 처럼 살지말고. 젊어서 마약하고 빨리 죽는건 하나도 멋지지 않다고."
아주 오래 전, 인도 남부의 어느 작은 왕국에서 한 사나이가 반평생 동안 원주율을 계산했다. 그는 기름을 파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때부터 글과 셈에 뛰어났다. 글과 셈 중에서 사내가 좀 더 관심을 보이고 재능이 있었던 분야는 셈이었다. 그는 수의 추상성과 몇몇 신비한 성질에 마음이 끌렸고, 다양한 계산을 하거나 수열의 규칙을 파악하는 데 싫증을 낼 줄 몰랐다.
사내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학문을 갈고닦아 왕궁의 관리가 되거나 그게 어렵다면 귀족자제의 과외교사, 그마저 안된다면 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기름 창고에서 미끄러져 죽었다.
사내에게는 독창성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재주는 오랜시간 걸쳐 꾸준히 숫자를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제곱근을 구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글에 있어서도, 글씨를 아름답게 쓰기는 했지만 문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는 시인이나 산문작가가 아니라 괜찮은 수준의 필경사였다. 수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사내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크고 진한 반점이 있었다.(오타반점이라 함) 한쪽 뺨과 눈이 먹물을 뿌린 것 처럼 검었다. 사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라 몸을 주춤거리거나 말을 멈췄다. 사내가 철이 들기 전부터 혼자 방에 틀어박혀 글씨 연습을 하고 삼각형이나 원의 면적을 계산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은 그 탓도 있었으리라.(......)
아버지가 죽고 누나들과 재산을 분리할 때 사내는 모든 것을 양보하는 대신 조용한 독채 한 채, 요리와 청소, 잔심부름을 해줄 하인 한 명, 그리고 필요한 책과 필기도구, 양초를 살 수 있는 정기적인 용돈. 장차 왕국 최고의 거상이 될 누나는 사내에게 방이 세 개 있는 집과 하인 두 명을 줬고, 정기적으로 올리브 기름 판매수입이 남동생에게 가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고민할 일이 없게 된 사내는, 그 때부터 집에 틀어박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산책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숫자를 다루는 서적을 탐독했고, 그 즈음부터 원주율 계산에 매달렸다. 원은 가장 완전한 도형이며, 크기가 어떠하든 둘레와 지름의 비율은 늘 일정하다. 그런데 그 비율은 비유임에도 분수로 표현할 수 없다. 원주율은 다항식의 해가 아닌 끝없는 숫자이며, 그 숫자들을 규칙이나 반복없이 이어진다.
원주율은 가장 작은 원으로도 표시할 수 있지만, 그 숫자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하면 우주를 다 채워도 공간이 부족하다. 원주율은 우주의 기본적인 성질 가운데 하나이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도 퍽 단순하지만, 어떤 인간도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무한히 가까워지리 수 있을 뿐, 사내는 그런 생각들에 매료되었다.
사내가 사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실용적인 용도로 원주율을 쓸 때 사용하는 숫자는 3이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3.14 혹은 3.16이라는 숫자가 알려져 있었고, 사내는 책에 적혀있는 수식을 직접 풀어 3.16이라는 수는 틀렸음을 알아내었다. 어떤 책에는 현재까지 계산된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12자리라고 적혀있었고, 어떤 책에는 17자리라고 적혀 있었다.
사내는 원주율을 계산하는데 착수했다. 1년만에 소수점 아래 12자리까지 계산했다. (3.141592653589). 소수점 아래 17자리 계산하는 데에는 꼬박 1년이 더 걸렸다. (3.14159256358979323). 그 해 여름에 자기 계산에 오류가 있었음을 알고 몇달치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내는 젊었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들어 원주율의 소수점 아래 숫자들에서 특별한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 모든 수학책이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세계에서 원주율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계산가로서 명성을 얻는 것. 어떤 사람도 그런 작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소수점 아래 20자리까지 계산했을 때, 다음 날 누나와 저녁을 먹었다. 누나는 대단하다고 덕담을 해주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라고 물었다.
누나의 지적대로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20자리까지 정확히 안다는 것에는 실용적인 의의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 아무리 깐깐한 세리와 목수라 하더라도 땅의 넓이를 계산하거나, 수레바퀴의 지름을 정할 때 3.1 혹은 3.14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40자리까지 계산했을 무렵 사내에게 그 작업은 신성한 구도행위와 같아졌다.
어차피 보리수 아래에서, 혹은 동굴 벽을 보며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구도자들이 어떤 기대를 품고 마음으로 무슨 작업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모른다. 그들의 목표는 원대하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고, 그들이 걷는 길은 부조리해 보인다.
사내의 외모도 수도승과 비슷해졌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43자리까지 계산했을 무렵 사내에게 원주율을 계산하다보면 신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우주에 신의 메시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원주율 안에 들어있을 수 밖에 없다. 그 생각은 사내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어켰다. 그의 표정은 철학자처럼 엄숙하면서도 온건해졌다.(......)
소수점 아래 46자리까지 계산했을 때 인도 북부에 있는 작은 왕국에서 젊은 천재 수학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들었다. 천재 수학자는 복잡한 계산을 번개같은 속도로 해치우고, 작도로 모든 도형을 그릴 줄 알며, 수백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며칠만에 해결했다고 했다. 사내는 젊은 수학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수학자는 원주율이 정확한 값은 '타우' 라고 했으며, 그가 몇 년 전에 타우라는 숫자를 만들었음을, 타우는 원주율의 정확한 값을 의미하는 숫자임을.
타우는 훗날 라이프니츠 공식으로 불리게 되는 계산법으로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46자리, 혹은 소수점 아래 4만6000번째 자리까지 계산해서 얻은 숫자보다 더 정확한 수치임을, 왜냐하면 그것이 타우의 본질이니까. 타우는 근사치 따위가 아니니까.(......)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개념이라고 주장한 사내는, 모든 숫자가 개념이라는 젊은 수학자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주율의 무한한 숫자의 나열 속에서 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사내의 말에 젊은 수학자는 '선생님 말씀대로 규칙없이 무한히 늘어나는 숫자의 조합에 신의 메시지가 들어있다면 그게 굳이 원주율일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원숭이들한테 0부터 9까지 적힌 주사위를 던져서 아무 숫자나 나오게 하는 일을 끝없이 시키는 방법으로 신의 메시지와 우주의 규칙을 언젠가는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만약 어떤 사람이 원주율을 40자리나 50자리까지 계산을 한다면 선생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조롱섞인 말투로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라며, 제자가 그런다면 말릴 것이며,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인생의 낭비며, 유용하지도 않고, 건강에도 좋을 게 없다며 말하다가 젊은 수학자는 말을 멈췄다.
'설마 그런 일을 하신건 아니죠?'
그의 말투에는 당혹감이 묻어 있었고, 흐리멍덩이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를 바라보는 눈에는 미묘한 조롱의 기색이 엿보였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의 마을에서는 여행용 정장에 길고 굵은 허리띠를 매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띠에 단도가 있는 칼집을 묶어두는 것도 관습이었다. 사내는 그 칼을 제대로 손에 쥐어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여행 중에 언젠가 칼을 쓰게 된다 하더라도 바위산에서 활동하는 산적들을 상대로 제 몸을 지키기 위한 용도일거라고만 막연히 상상했다. 사내는 사실 자신이 그럴 목적으로도 제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수학자의 가슴을 찌르는 그 순간에 조차.
수학자는 죽었고,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는 체포되었다. 모든 정황증거가 명백했으며 판결이 빨리 났고, 사형이 아니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는 남쪽 왕국 제일의 부자가 된 누나가 백방으로 애쓴 덕분이었다.
무기수가 된 사내는 감옥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사람들은 젊은 수학자가 뜻밖의 이른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이루지 못한 성취에 대해 떠들어댔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는 그에 대해서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유한한 숫자의 조합이 원주율에 예고되어 있듯이, 수학적 발견들 역시 예정되어 있다. 그 수학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수학자가 결국에는 같은 내용을 찾아내게 된다. 그것이 수학이라는 학문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내는 영국의 수학자가 '파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원주율임을 선언했을 때에도 놀라지 않았다. 파이는 타우의 또 다른 명칭에 불과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었든, 언젠가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원주율에 다가가려고 했던 사내의 노력은 의미없이 물거품이 될 예정이었다. 처음부터.
얼굴에 반점이 있는 사내는 젊은 수학자가 이뤘을지도 모를 학문적 성취가 아닌, 그 수학자의 삶을 채울수도 있었던 다른 의미들에 대해 생각했다. 수학자가 죽었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져버린 의미만이, 애초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 의미였다. 모든 사람의 삶에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의미는 모든 사람의 삶에 보장된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완전히 무의미한 인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사내는 감옥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자신에게 판결을 내린 판사보다도, 인도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인이 된 누나보다도, 수학자의 죽음을 애통해한 수학자의 가족들 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오래 살아서, 컴퓨터가 발명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컴퓨터는 발명되자마자 원주유을 소수점 아래 수백자리까지 계산했다. 하지만 사내는 컴퓨터를 증오하지 않았고, 모멸을 당했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2021년에는 스위스의 연구팀이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소수점 아래 62조자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상은 소설.
2023.2.23.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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