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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 표백, 장강명, 한겨레출판,2021.

햇살처럼-이명우 2023. 11. 26. 08:41

665. 표백, 장강명, 한겨레출판,2021.

장강명(1975년생) 2011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연세대 도시공학과 졸업 ~2913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아내(김혜정氏)와 독서 생태계 부활에 뜻을 모은 이들과 함께 '그믐'이라는 단체 운용
  "그믐달은 새벽이 돼야만 나와요.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실제로 보기도 쉽지 않죠. 동쪽 하늘에 등장했다가 곧 사라져버리거든요. 참고로 초승달이랑은 다릅니다.(웃음) SNS며 유투브며 틱톡이며 볼것도 많고, 할것도 많은 시대에 꿋꿋하게 책을 읽은 사람들이 저는 꼭 '그믐달' 같다고 생각해요." (김혜정)

  주인공인 나는 전북 익산 출신. 익산시청 7급 공무원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 한양대와 비슷한 A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갔다가 복학했다. 재수나 편입을 하기에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평균학점도 B와 C사이인 나다. 경영학과.
  이야기는 후배 정세연에 대한 이야기다.
  정세연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비슷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도시의 멸마와 지옥불에 대해 떠들어대는, 살짝 맛이 간 사람들, 그러나 묘하게도 개인 자체는 강한 매력을 지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 가만히 있어도 눈길이 가고, 정신나간 주장을 해도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사람.

  솔직히 8명을 죽이는 것보다 에베레스트 산을 무산소 등정하거나, 위대한 문학작품을 쓰거나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 같지않니? 히말라야에 오르거나 대하소설을 쓰거나 100km를 달리려면 몇 년에 걸친 엄격한 자기관리와 강한 의지, 뼈를 깎는 훈련이 필요해.
  하지만 사람을 8명이나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맨슨(찰스 맨슨) 패밀리처럼 증거를 숨기려는 노력따위 하지않고 되는대로 저질러버릴거라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지. 자동차 한 대나 어쩌면 식칼 한 자루만으로도 할 수 있어.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어떤 선을 살짝 넘기만 하면,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것 같은 사람이 그 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사람은 예술의 개념을 바꾸었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히피즘 보다 더 거대한 정신적 유령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되겠다."    
  "거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받아주잖아."

  '큰 꿈 없는 세대'를 만드는 요인
  우선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사회체제가 안정되고 70년대나 80년대처럼 파이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각 조직의 관료화가 완료돼 조직 내 세대교체가 쉽지않아졌고, 새로운 일자리는 대개 서비스업에서 만들어지는 단순노동거리다. 대단치않은 눈앞의 과실을 따기 위해 온 힘을 쏟다보면 그만큼 생각의 폭이나 인물의 그릇이 잘아지게 된다.
  게다가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성평등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소주세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그 다음에 나오게 될 이슈들은 한 세대의 과업이나 종교의 대용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리라. 성적 소수자 보호, 동물보호, 장애인 인권문제, 소비자 운동, 저개발국 원조프로그램 등등. 그래서 이 세대는 꿈을 가질 수 없게됐다. '조니 킴'은?

  복수! 얼마나 가슴 설레는 단어인가. 이 단어는 어떤 이유도 묻지 않는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 모든 회의(懷疑)로부터 그를 구해줄 가장 강력한 동기. 사랑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식지않는 열정.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한국 여고생들의 계급을 결정하는 요인이 뭔지 알아? 외모와 학업성적, 성깔이지. 그리고 세연은 그 세가지를 완벽하게 다 갖춘 여왕이었지."

  홍콩의 황산테러, 중국의 어린이 대상 흉기난동, 미국의 총기사건 발생의 이유가 그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절반짜리다. 병적인 행동의 양상이 지역마다 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전부 다 병들었다. 진짜 답변은 우리가 일탈행위를 할 때 그다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일탈할 때조차 정말 독특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데 있다.

  시험 하나에 모든 것을 걸로 티끌만한 유불리에 부들부들 떨면서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고시생의 모습을 언뜻언뜻 비쳤다.

  공격은 언제나 빠르고, 위협적이어야 한다.

  1978년 이후에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의 초입에 들어섰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혁명'이다. 즉 오늘날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체제를 위협할만한 심각한 모순이 없는 가운데, 완성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대체할만한 사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진보세력이 대안이라고 내놓은 이데올로기는 기실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틀 안에서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그 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에서 절망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혁신적인 사상을 내거나 시도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변화가 완만하게 이루어졌던 드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세대화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 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개인마다 과정의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기준만 지니고 있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기준만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재퍼루더는 '재퍼루더 필름'이라는 동영상을 촬영한 사람의 이름이다. 여성의류 제조사업을 하던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는 1963년 댈러스에서 가정용 카메라로 존 F.케네디의 자동차 퍼레이드를 촬영하다 우연히 그 날 일어난 암살장면을 기록하게 됐다. 이 동영상이 '재프루더 필름'이다.

  일단 인간의 생명에 암묵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이와같이 위험한 직업과 덜 위험한 직업의 임금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어떤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임금 차이는 학력, 경력 등 임금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체로 사람의 생명이 1,000만달러(123억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멘큐의 경제학>> N.그레고리 멘큐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처럼,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된다. 20代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세대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게 두 가지가 있다. '계속 쓰다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 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화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2023년 1월 29일 일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