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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 인듀어런스(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글 캐롤라인 알렉산더, 사진 프랭크 헐리, 뜨인돌, 2022.

햇살처럼-이명우 2024. 1. 20. 18:43

670. 인듀어런스(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글 캐롤라인 알렉산더, 사진 프랭크 헐리, 뜨인돌, 2022.

실패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사례가 얼마나 있는가!

  1914년 8월,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대탐험 시대가 종착역에 다다를 즈음,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세계 최초로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다. 하지만 목적지를 불과 150km를 앞두고, 이들이 타고 온 인듀어런스호는 얼어붙은 바다에 갇혀버린다. 배는 곧 부서졌고, 남극해를 떠다니는 얼음덩어리에 몸을 옮겨실은 이들은 이때부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역경에 처하게 된다.

  20세기초의 남극탐험은 지구상의 다른 곳을 탐험하는 것과는 달랐다. 탐험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위험한 맹수나 야만인은 없다. 시속 300km의 바람과 영하70도의 추위에 맞서야 하는 남극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과 한없는 인내력이었다.
  1914년에 시작해서 1917년에 끝난 '인듀어런스 탐험'은 극지탐험영웅시대의 마지막 모험이라 불린다. 1901년 8월, 로버트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호'가 남극의 맥머도 협만을 향해 출발하면서 영웅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과학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된 이 탐험의 실제 목적은 남극점에 영국 국기를 꽂는 것이었다.
  스콧은 이 첫번째 남극탐험의 동반자로 의사이자 동물학자인 윌슨박사와 28살의 젊은 선원 섀클턴을 선택했다. 11월2일, 세 사람은 썰매를 끌 개 19마리와 짐을 가득 실은 썰매 5대로 탐험을 시작했다. 지도에도 없는 완벽한 미지의 땅에서 왕복 2,500km가 넘는 엄청난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은 아주 조금씩 힘겹게 전진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모자라는 식량을 나누어 먹은 다음 다시 얼어붙은 슬리핑백 속으로 들어갔다.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해 세사람은 차츰 지쳐가기 시작했다. 병든 개들이 한마리씩 쓰러졌고, 그렇게 죽은 개들은 살아남은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남위82도17분, 남극점 북쪽으로 1,00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스콧은 결국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후퇴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괴혈병으로 신음하던 섀클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 후 썰매에 실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 끝에 그들이 귀환한 것은 출발 3개월만인 1903년 2월 3일 이었다.
  이 첫번째 남극탐험은 이후 남극대륙에 상륙한 영국 탐험대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영웅적인 고난의 전형이 되었다.

  아일랜드 태생인 섀클턴은 의사를 아버지로 둔 안락한 중산층에 속했다. 영국의 공립학교를 거쳐 16세의 나이로 '브리티시 머천트 네이비(British Merchant Navy)'에 들어간 그는 스콧의 남극탐험에 자원하기 전까지 상선대의 고급 선원으로 일했다. 낭만적이고 야망이 강했던 그에게 극지탐험은 더없이 매력적인 삶의 탈출구였다.
  첫 탐험에서 돌아온 뒤 몇차례의 사업실패를 겪은 섀클턴은 결국 목표를 다시 남극으로 바꾸고 탐험자금 확보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7년 8월에 '님로드'호를 이끌고 남극의 로스해로 향했다. 고이즈 곶의 기지에서 겨울을 보낸 그가 탐험대원 3명과 조랑말 4마리를 데리고 남극점을 떠난 것은 1908년 10월 29일이었다.
  12월 초에 탐험대는 남극 종단 산맥의 들머리인 거대한 빙하(고지대의 얼음이 비탈을 따라 강처럼 흘러내리는 것) 입구에 도착했다.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비어드 모어'라 이름 붙인 그 빙하는 산맥너머 남극고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통스러운 관문이었다. 이미 조랑말 세마리가 대원들의 식량으로 바뀐 뒤였고, 3일 뒤에는 마지막 한마리가 크레바스에 떨어져 죽었다. 설맹(만년설에서 반사되는 자외선으로 인해 각막이나 결막에 생기는 염증)과 배고픔, 동상과 싸우며 비드모어를 건넌 섀클턴은 남극점을 약 150km 앞둔 남위 88도23분 지점에서 결국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했다. 바닥난 식량과 대원들의 체력저하로 인한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필사적으로 36시간을 행군한 뒤에야 간신히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
  스콧의 기록을 600km 앞지른 섀클턴은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기사작위을 얻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탐험으로 인한 빚이 워낙 많았던 탓에 세번째 도전의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재정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사이에 스콧이 모든 영국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 한번 남극 공략에 나서게 된다.
  스콧의 마지막 여행은 그야말로 장엄한 서사시였다. 1910년 10월,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북극탐험에서 돌아와 남극으로 향하면서 둘 사이의 역사적인 경주가 시작된다. 남극점으로의 출발시기는 양쪽 다 1911년 10월, 스콧의 출발장소는 예전의 베이스캠프 근처인 에반스 곶이었고, 아문센의 출발장소는 동쪽의 웨일즈만이었다. 스콧 탐험대는 섀클턴의 탐험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것으로 입증된 조랑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터썰매, 아무도 다룰 줄 몰랐던 개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며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거리는 하루에 15~20km가 고장이었다.
  반면, 아문센 탐험대는 잘 훈련된 개 52마리와 팀을 이루어 스키를 타고 매일 25~30km를 순조롭게 달려나갔다. 하루에 거의 50km를 달린 적도 있었다.
  1912년 1월 16일, 스콧과 그의 탐험대는 남위 89도 지점에서 아문센 탐험대가 이미 그곳을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스콧은 일기에 솔직하게 적었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다음날 스콧 탐험대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남극점으로 향했다. 가까스로 도착한 남극점에서 스콧은 예감처럼 이런 일기를 남겼다. "이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필사적인 투쟁이 될 것이다.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결국 해내지 못했다. 스콧 탐험대는 한 명씩 차례로 얼음 위에서 죽었다. 천신만고 끝에 보급창고에서 18km 떨어진 곳까지 와서 텐트를 쳤을 때, 생존자는 스콧을 포함하여 겨우 세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눈 앞에 다가온 최후, 스콧은 조용히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영국에 있는 탐험대 회계책임자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비장한 편지를 썼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겠다......우리가 살아난다면 모든 영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 탐험대의 용기와 인내를 말해줄 수 있을텐데......이 짧은 글과 우리의 시체가 그 이야기를 대신해 줄 것이다.

  그리고 3월 29일, 스콧은 마지막 일기를 적었다.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스콧의 글은 1년 뒤에야 발견되었다. 1913년2월, 스콧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자 영국 전체가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넬슨 이후 이렇게 극적인 죽음은 없었다"고 말한 언론인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의 죽음에 얽힌 신화는 <피터팬>의 작가이자 감상적인 산문 대가인 제임스 배리 경이 다듬은 <스콧의 일기>가 출판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바로 이게 섀클턴이 남극횡단에 나설 당시의 분위기였다. 스콧의 비극적인 죽음이 알려진지 불과 1년만에 감행된 인듀어런스의 탐험은 모든 영국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섀클턴이 탐험계획서에 적은 바와 같이, 그의 목표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다.

  "감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번 탐험은 마지막 남극탐험이라 할 수 있다. 남극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탐험이 될 것이며, 북극과 남극정복 경쟁에서 패배한 영국에게 이번 탐험의 성공은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가장 위대하고 인상적인 남극대륙 횡단 탐험만이 남아있다.

  자금 확보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영국정부가 그를 지원했고, 스코틀랜드 사업가, 왕립지질학회등, 크고 작은 지원을 약속한 상태였다.
  섀클턴은 극지 탐험용 배를 만들어온 노르웨이의 유명한 조선소에서 300톤 규모의 목조범선 '북극성'호를 구입했다.  80cm 두께 참나무와 노르웨이 전나무로 만든 44m의 튼튼한 배였다. 남극바다의 얼음을 헤치고 항해하기에 안성맞춤인 그 배의 이름을 섀클턴은 '인듀어런스(Endurance : 인내)로 정했다.  집안의 가훈인 'Fortitudine Vincimus(인내로 극복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탐험에 필요한 배는 두 척이었다. 인듀어런스호가 웨들해로 가는 동안 반대편에서 오는 섀클턴의 횡단팀을 위해 곳곳에 물품창고를 세워두는 임무를 맡는다. 보급팀을 싣고 갈 배는 1876년에 건조된 물개 사냥선 '오로라'호였다.
  영국 언론들은 섀클턴의 탐험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1914년 8월 1일 런던에서 인듀어런스호가 출발할 때, 다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의 탐험은 세상에서 지워져 버렸다. 독일이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영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8월 4일에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섀클턴의 탐험은 시작도 전에 중단될 위기였지만,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은 "당국은 탐험이 계속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섀클턴은 아문센의 성공비결을 최대한 활용했다. 스키에 능숙한 영국해병대의 장교를 초빙하여 탐험대원들에게 스키훈련을 시켰고, 영양학자와 함께 탐험대의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또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썰매훈련을 받은 캐나다 개 69마리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준비해 놓도록 했다. 인듀어런스호가 남극으로 가는 도중에 그곳에 들러 개를 실을 예정이었다.
  탐험가로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다름아닌 그의 낙천성이었다. 그가 만일 냉정하지 못했거나 욕심이 더 많았다면 지난 두 번째 탐험에서 남극점 최초 정복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와 그의 대원들은 스콧일행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당시 섀클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실로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그의 특징인 낙천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죽지않고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처절한 시련을 겪은 인듀어런스호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이 생존 드라마에서 섀클턴은 자신의 대원들과 늘 함께했다.

  "일상이 스트레스를 주긴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마찰이나 불화는 없었다. "서로 관심분야가 다르고 대원 대부분의 개성이 뚜렷하며 생활방식도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오들리는 일기에 적었다.
  인듀어런스호의 이같은 평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섀클턴이 대원을 뽑았던 방식을 보면 그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제임스가 면접장소에 나타났을 때 이 위대한 탐험가는 탐험경력이나 과학지식 따위는 전혀 묻지않고 느닷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고 물어 상대를 당혹스럽게 했다.
  "카루소(이탈리아의 테너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오" 섀클턴이 말했다. "다른 대원들과 함께 마구 소리를 지를 수는 있겠지요?" 이 질문이 적절한 것이었음이 훗날 증명되었다. 섀클턴이 원했던 건 화려한 경력의 이력서가 아니라 '마음자세'였던 것이다.
  섀클턴은 규율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그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졌다. 대원들은 그의 말이 '명령'이어서라기 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늘 공정했으며, 의복을 비롯한 모든 물품을 선발대나 고급대원들 보다 일반 대원들에게 먼저 배분했다.

  1년 중 가장 어두운 6월이 시작되었다. 정오무렵의 짧은 희미함과 밤중의 달빛을 제외하면 빛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얼음사이의 물도 밤 사이에 15cm 정도의 두꺼운 얼음이 되었다.

  "제비뽑기가 약간 조작되었다. 섀클턴 대장과 와일드 부대장, 워슬리 선장, 그리고 다른 고급 대원들 모두가 울 백을 뽑았기 때문이다. 품질이 좋고 따뜻한 가죽백은 모두 일반 대원들의 몫이었다. "
  방수가 되지않는 그라운드 시트 위에 누운 대원들의 머리 바로 밑에서는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린넨 텐트는 너무 얇아서 하늘에 뜬 달이 보일 정도였다.

  대원들은 캄캄한 물에서 고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했다. 얼음 위에서 오랫동안 지낸 대원들은 이 거대한 짐승이 얼음도 박살내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깊고 신비로우며 사악하기까지 한, 으스스한 파충류의 눈을 가진 존재가 바로 고래였다.

  돌을 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거나 해변을 마구 뒹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대원은 거친 자갈사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기도 했다.
  "윌스 호에서는 두 명만이 멀쩡했다. " 워디는 이렇게 적었다. "절반정도가 정신이 나갔다. 한 명은 도끼를 들고, 애꿎은 물개 10마리를 죽였다"......키드호에는 그 정도까지 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남극의 겨울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7일 동안을 공포에 떨며 보냈다. 부빙 위에 허술한 캠프를 설치하고 변변한 식량도 없이 170일 이나 표류했으며, 1914년 12월 5일 이후 497일만에 처음으로 육지에 상륙한 것이다. 물개 스테이크로 식사를 한 대원들은 슬리핑 백을 땅 위에 펴고 나란히 누워 육지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엘리펀트 섬에 상륙 직후)

  텐트가 없어 슬리핑백이 흠뻑 젖었다. 체온으로 인해 몸뚱이 밑의 눈이 녹으면서 독한 악취가 곳곳에서 풍겨나기 시작했다. 펭귄의 서식지였던 이곳에 펭귄떼가 남기고 간 오물인 '구아노'가 눈과 함께 녹고 있는 것이었다.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놓고 중대발표를 했다 그의 지휘아래 제임스 커드호를 타고 사우스 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 처지에서 그건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다.
  여기에서 사우스 조지아섬까지는 무려 1,000km. 지금까지 온 거리의 10배가 넘는다.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훨씬 심한 상황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만을 갖고 중간에 육지가 전혀없는 바다를 지나 그 작은 섬을 향해 가야한다. 게다가 날씨 또한 항해에 적당하지 않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아니라, 대원들 중 선원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니스트경, 선장(프랭크 워슬리), 크린(선원), 맥니쉬(선박수리공), 맥카티, 빈센트 이렇게 6명이다.

  제임스 커드호의 항해.
  "하루종일 강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상황을 솔직히 적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않은 젖은 몸 때문에 몸을 추스리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맥카티는 모든 사람을 부끄럽게 했다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가장 낙천적인 사람이다." 워슬리는 맥카티를 이렇게 평가했다. "키를 잡고 있거나 배의 얼음을 떼어내고 물을 퍼내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면, 그는 언제나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좋은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우스 조지아섬.
  오후 3시, 드디어 스트롬니스 기지 외곽에 도착했다.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다. 고래기름 연기로 인해 얼굴엔 새까맣게 검댕이가 묻어있었고, 소금기에 찌든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옷은 이미 다 떨어져 누더기가 된지 오래였다.
  워슬리(선장)는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지난 2년 동안 간직해온 네 개의 녹슨 핀을 뽑았다. 그동안 그 핀으로 터진 바지를 대충 꿰맨 채 견뎌왔던 것이다. 그것도 영하 수십도를 오르내리는 남극의 차가운 바다와 얼음과 계곡 위에서.

  스트롬니스에 도착한지 3일째인 5월 23일, 섀클턴과 워슬리와  크린은 '서던 스카이호'를 타고 엘리펀트 섬을 향해 출발했다. 서풍을 받으며 순조롭게 항해하던 서던 스카이호는 엘리펀트 섬을 60km 앞둔 지점에서 거대한 얼음 장애물을 만나 부빙군 주변을 일주일 정도 맴돌다 결국 연료부족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영국의 지원은 없었다. 여전히 전쟁 중이었고 남는 배는 단 한 척도 없었다.
  6월 10일 우루과이 정부가 작은 탐사선인 '인스티투토 드 페스카 1호'와 선원들을 무료로 보내왔지만 이 배 역시 엘리펀트 섬 부근에서 얼음에 의해 심하게 손상되어 뱃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세번째 시도는 칠레에서 영국협회가 지원한 '엠마'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상악화로 엘리펀트섬 150km 지점에서 돌아오고 말았다.

  "섀클턴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엔 날마다 주름이 늘어났고, 검고 두껍던 머리카락은 차츰 흰색으로 되어갔다. 맨처엄 구조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회색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세번째 구조작업을 나서는 그의 머리는 완전히 회색이었다."

  한편, 엘리펀트 섬의 선원들은, 아침식사 후 15분간 '흡연시간'을 가졌고, 그 사이에 와일드는 그날의 임무를 부여했다. 사냥, 가죽벗기기, 펭귄과 물개 다듬기, 숙소 정리하고 수선 등등. 점심시간은 12시30분이었고, 오후에는 오전과 같은 일을 하며 보냈다. 오후 4시30분에 물개잡탕으로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들 스토브 주위에 둘러앉았다. 앉는 자리도 엄격하게 규칙을 정해서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은 스토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모두 22명.

  8월 30일 옐코호가 엘리펀트 섬에 이르렀을 때 섀클턴은 쌍안경을 들고 해안의 동료 대원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해안에 있는 인원은 정확히 22명이었다. 100일 동안.

  "2시 10분, 전원 구조"

  그 후 다시 극지탐험 도전에 나선 섀클턴은 동료들과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왔고, 1월 5일 47세의 나이로 '관상동맥죽종'으로 사망했다. 섀클턴의 아내 에밀리는 남편을 사우스 조지아섬에 묻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동료들은 섀클턴을 가장 잘 이해했던 노르웨이 선원들 사이에 그를 묻었다.

  22명의 동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조해 낸 어니스트 섀클턴 경에게 경의의 묵념을 보낸다.

2023. 4. 6. 목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