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 슬픈중국 2 (1964-1976), 송재윤, 까치, 2022.
때로는 그림 한 장이 백마디 말을 능가한다. 피해자의 수치는 수백편의 논문보다 더 생생하게 현실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대숙청으로 최소 60만에서 최대 120만명을 학살했다. 히틀러는 1941년- 1945년까지 유럽의 독일 점령지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여(Holocaust,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일반적으로는 사람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죽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유럽 거주 유대인의 2/3에 해당하는 600만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예젠잉의 발표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광란 속에서 마우쩌둥은 약 1억1,300만명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바로 그 마오쩌둥이 오늘도 미화되고 신격화된다. 모든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모든 대학의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국 어디에서든 건물벽에 적힌 마오쩌둥의 "명언들"이 눈에 띈다.
마오는 문화를 바꾸면 인간의 본성까지 교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0년대에 그는 전 인민들을 향해서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 파사구(破四舊)를 요구했다. 낡은 것을 모두 제거하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마오는 힘들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명대 중엽 마음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 : 1472-1529)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의 양지(良知)를 움직여서 성인이 될 수 있다. 양지란 악의 기미를 자각하고 제거하는 "좋은" 마음의 "지각(知覺)"능력과 의지를 이른다. 왕양명의 깨달음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는 마음 속의 양지를 환히 밝히면 강도처럼 마음에 찾아드는 사특한 욕망을 물리치고 선한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왕양명의 양지 대신에 비판과 자아비판을 제안했다. 여기서 비판이란 공산당원 모두가 주변 동료들의 언행을 관찰하면서 작은 잘못까지 빠짐없이 지적하고 문책하는 집체적인 감시와 처벌의 의식이었다. 한편 자아비판이란 개개인이 스스로의 그릇된 행실, 불온한 사상, 더러운 잡념을 모두(전부) 고백하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공개적인 참회와 고백의 의식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구폐와 악습을 청산해야만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란 결국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의 정신상태를 바꾸는 과정이었다.
"너무 빨리 치지도 말고, 너무 오래 끌지도 말라. 잘 보고 있다가 딱 적당할 때, 바로 그 때 일격에 교정하라." 누구든 고문에 못이겨 간첩행위를 했다고 고백하면 인민재판에 불려나가서 공범을 폭로해야 했다.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 밧줄에 묶여서 구치소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많게는 1만명이 처형되었다.
마오는 캉성의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 개조를 시도했다. 그 당시 마오는 대원수 스탈린을 흠모하여 그의 저작을 열독하고 있었다. 마오는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체계적으로, 스탈린의 통치술을 답습했다. 마오와 캉성의 조화로운 결합은 스탈린 주의가 중국땅에서 조직관리의 야전수칙으로 토착화했음을 보여준다.
숀은 박사과정을 밟으며 1930년대 스탈린 정권하에서 숙청된 굴라크(Gulag : 소련의 강제수용소)의 지식인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해 굴라크의 포로들이 남긴 일기, 서간, 그림 등을 발굴했다. 사생활의 깊은 구석까지 침투한 스탈린 전체주의의 실상을 밝히려는 의도였다. 스탈린 독재를 향한 그의 관심은 이미 그가 학부생 시절 이미 시작되었다.
학부 4학년때 숀은 "문화 대혁명" 세미나에 참석해서 1940-1950년대 중국의 집단 수용소 라오가이(노개 : 노동개조[勞動改造]의 줄임말)를 다룬 훌륭한 기말 보고서를 썼다. 마오쩌둥은 비판적 지식인들을 모두 잡아서 대규모 집단 수용소에 감금했다. 숀의 연구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지식인 탄압은 집권 초기 스탈린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은 비판적 지식인들을 이잡듯이 색출해서 시베리아의 오지에 유폐했다. 스탈린 시대 소련의 굴라크는 마오시대 중국의 라오가이로 이어졌다.
반지성주의는 좌,우 전체주의 정권의 공통 특징이다.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지 않고서는 철권통치를 유지할 수 없는데, 정치적 반대자들은 대개 전문가 집단에 속한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1920-1930년대 스탈린은 다수의 작가, 언론인, 예술가들을 감옥에 쳐넣고 학살했다. 스페인 내전기간 동안 프랑코 정권이 반동적 백색테러(1936-1939)를 통해서 제거한 20만의 반정부 세력의 대다수도 지식인들이었다. 1970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범 폴 포트(Pol pot : 1925-1998) 역시 수십만명의 지식인들을 학살했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오른팔이었던 캉성은 공개적으로 폴 포트의 노선을 지지했다. 폴 포트 노선이 마오주의의 분파였음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증명한다. 스탈린에서 마오를 거쳐 폴 포트로 이어지는 반지의 계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마오의 지식인 혐오는 뿌리가 깊었다. 그는 1921년 7월말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석했던 13명 가운데 1명이었다. 혁명가로서는 최고의 이력을 얻었지만, 당시 그는 베이징 대학 도서관의 사서에 불과했다. 1920년대 베이징 대학 교정은 다양한 사상이 만개하던 백가쟁명의 해방구였다. 그 교정에서 마오는 우쭐대고 뽐내는 거만한 대학생들에게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다고 알려져 있다.
마오에게 숙청당한 지식인은 두 종류였다. '도덕적 비판자'와 '전문가 집단'이었다. 마오는 도덕적 비판자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갔으며, 정부의 요직에는 전문가들 대신 '붉은투사'들을 기용했다. 그 결과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과학기술계에는 어용 지식인들만 득실거리게 되었다. 대장부는 사라지고 아전 무리만 넘쳐나는 공산주의 관료행정의 흑암(黑暗)이었다. 그곳에서는 진실을 탐구하는 과학자는 간데없고, 영혼없는 기술자만 잔류했다.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 1907-1971)는 군대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인격 숭배를 개시했다. 머지않아 마오는 날마다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하는 인격신(人格神)으로 격상되었다. 권력을 쥔자는 필사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고 기록을 조작한다. 집체의 기억은 정치적으로 재구성된다. 인류의 역사는 너무나 쉽게 정치적으로 조작되고 편의적으로 왜곡된다. 나태한 지성은 절대로 역사의 실상을 알아낼 수 없다. 목숨을 건 역사투쟁 없이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도 망각의 늪에 잠길 수 있다.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는 마오쩌둥 신화가 알려주는 불편한 진실이다.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에 따르면, 혁명은 언제나 아군과 적군의 식별에서 시작된다. 좌파 혁명가들은 흔히 적아 구분의 편의를 위하여 1명을 가려내 인격적으로 살해한다. 진영을 갈라서 인민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는 판에 박힌 수법이다.
비투는 한 개인의 영혼을 산산이 짓밟는 탈법의 인격살해, 초법의 집단린치였다. 비투의 단상으로 끌려오는 반혁명분자들에게는 두 팔을 양옆에서 잡아 비틀며 머리채를 짓누르는 젯트기 자세의 고문이 행해졌다. 홍위병들은 그들의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씌우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고 손찌검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 피해자들은 비투의 단상에서 무릎을 꿇거나 우두커니 선채로 몇 시간이고 군중의 비난과 욕설을 감내해야 했다.
요컨대 1960년대 중반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는 마오쩌둥 사상이 쉽게 발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홍위병의 열정이 마오의 몽상과 공명한 셈이다 대중영합주의의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 대중은 그 꿈에 현혹당하고 만다. 문화혁명은 결국 대중영합주의의 나락이었다.
문화혁명의 핵심문구는 단연 '조반'이었다.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며 일어난 홍위병을 향해서 마오는 그 유명한 '조반유리'를 부르짖었다. 조반의 사전적 의미는 "반란을 일으키다. 반역하다. 반항하다." 정도이다.
권력자들은 함정을 파고, 음모를 짜고, 배신을 일삼고, 대중을 기만한다. 명예를 걸고 정당하게 결투하는 중세의 기사도는 현실의 정치판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권력투쟁은 대부분 비열하고, 치졸하고, 지저분하고 잔인하다.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 권력자는 도덕적 분칠을 하고 정의의 가면을 쓴다. 대중은 권력자들을 가십거리 삼아서 비난할 수 있지만, 그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가 목숨을 걸고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불세출의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성내고, 탐내고, 시샘하고, 방황하는 일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문화혁명의 정치투쟁은 치정과 원한이 뒤섞인 한 편의 멜로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인간 마오쩌둥의 시기심과 증오심이 문화혁명의 직접적 동기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혁명은 폭동이다!
언어중추의 발전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적 특징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호모 로퀜스(Homa loquens : 언어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어로 세상을 인식하고, 소통하고, 세상을 바꾼다. 언어는 인류문명의 핵심이지만, 치명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산(山)"의 실체는 "산"의 이름보다 한없이 크다. 산을 山이라 부르는 순간, 산을 안다고 여긴다면 심대한 착각이다. 선방(禪房)에 붙어있는 경구처럼 "산은, 산이지만 산은 또 산이 아니다." 일찍이 언어의 속임수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노자(老子)는 "지자, 불언, 언자, 부지(知者, 不言, 言者, 不知 :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혁명의 광풍이 몰아치면 언어적 착오가 인간세를 지배한다. 정치투쟁의 기본은 마타도어(메타도르, matador, 근거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를 중상모략하면서 내부를 교란시키는 흑색선전(黑色宣傳)을 뜻하는 말. 투우(鬪牛)에서 소를 유인해 정수리를 찔러 죽이는 투우사를 뜻하는 스페인어에 [메타도르 matador]에서 유래)이다. 반대자에게 '나쁜 이름'을 들씌워 그를 악인으로 몰아가는 야비한 수법이지만, 정치꾼들은 실체와 이름을 쉽게 혼동하는 인간의 틈을 파고든다. 제 아무리 위대한 성과를 이룩한 사람이라도 흔해빠진 정치적 낙인만으로 인격살해를 하고 정치적 사망에 이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3.4.29.토요일 아침.
편가르기는 정치투쟁의 기본이다. 위기에 봉착하면 위정자들은 흔히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을 붙인다.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진부한 꼼수이지만, 정치투쟁에서 그 보다 더 효율적으로 대중을 동원할 수단은 없다. 국민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어김없이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 거짓 선동과 흑색선전이지만,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생업에 바쁜 군중은 쉽게,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속임수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1949년 건국 이후 중공정부는 바이러스를 퇴치하듯이 인민의 의식을 소독해왔다. 인민의 의식에서 부르주아 잔재, 자유주의의 유혹, 자산계급의 유습을 드러내어 세척한다는 발상이었다. 의식의 세척과 소독을 위해서도 역시 이분법과 흑백 논리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혁명/반혁명, 무산계급/자산계급,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친일/반일, 친미/반미, 친제국주의/반제국주의, 친수정주의/반수정주의 등등......
1953년 마우쩌둥은 전체인구를 95%의 인민과 5%의 적인으로 나눈 바 있다. 그는 문혁 당시에도 총 인구의 5% 정도가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 혁명 수정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분법은 소수에 대한 다수 독재의 논리를 깔고 있었다. 다수의 혁명군중이 소수의 반당, 사회주의 세력을 독초 뽑듯이 제거해야 한다는 이른바 인민민주독재의 발상이었다.
자유와 권리의 주장은 제국주의자의 음모로, 전통적 가치의 표출은 착취계급의 봉건적 유습으로, 동정심 따위 감정은 불순한 부르주아 인도주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세뇌된 혁명군중이 없었다면, 문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권력자의 독단은 나라를 망친다. 지도자의 독선은 사회를 해친다. 독단은 오도된 확신에서 나온다. 독선은 정신병적 유아론의 발로이다. 경험이 적고 견문이 좁은 인간은 독단의 우물 속에 머무른다. 사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독선의 늪에 빠져든다. 범부의 독단, 필부의 독선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비대한 대륙국가 최고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임에야.
1950년-1960년대 내내 이념교육, 정치적 세뇌, 공포정치, 대중동원, 숙청이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의 정치적 토양은 문혁이 발아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비옥한 투쟁의 토양에서 싹튼 혁명의 맹아들이 바로 홍위병들이었다. 그들은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청소년들이었지만, 일단 사회주의 투사의 완장을 차고 나서는 잔인한 집단 광기에 휩싸였다.
전체주의 정권은 집요하게 청소년 층을 파고든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오페라 니치오날레 발릴라, 소련의 콤소몰 등은 대표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준(準) 군사적 청소년 조직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까지 가장 필사적으로 연합군에 맞선 독일병정들이 10대였던 히틀러 유겐트였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나치 정권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자신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에 따라서 살았다고 진술했다. 그 법정을 참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악의 상투성(the banality of evil)" 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개개인은 정교한 기계 속의 작은 부속이 되어서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 길들여지면 끔찍한 정치범죄도 일상의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1966년 8월-9월. 10대 홍위병들은 분명 '악의 상투성'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그들은 살인이 허용되는 무법상태에서 혁명의 사명감에 들떠 학살을 감행했다. 그 이면에는 법질서의 해체와 도덕적 혼돈이 깔려있었다. 물론 그들은 최고 영도자의 암시에 따라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이론상 중국공산당이 무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당"이었지만, 1960년대 현실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통제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얼굴없는 사용인일 뿐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제도가 변해도 인간의 권력투쟁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스미스(Paul J.smith)의 관찰에 따르면, 구폐의 혁파를 내걸고 등장한 중국 북송의 신진 세력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대체로 다음의 다섯 단계를 거쳤다.
1단계 : 파죽지세로 정권을 탈취한 후 주요 정부기관을 점령한다.
2단계 : 역사적 선례가 없는 정체 불명의 특별기관을 창설한다.
3단계 : 무리한 비상수단을 써서 정적을 제거한다.
4단계 : 저항 세력의 무력화를 위해서 집요하게 추종세력을 규합한다.
5단계 : 정변의 합리화를 위해서 황권의 절대화를 꾀한다.
이 중에서 '특별기관의 창설'은 어김없이 독재의 출발점이 된다. 독재정권은 흔히 비상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특별기관을 창설한다. 법적 제약을 최소화하고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함이다. 중립, 공정, 정의실현, 구악철폐 등의 미사여구로 치장하지만, 권력을 독점하려는 잔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독재정권의 특별기관은 얼마 가지 못해서 구악의 상징물로 전락하고 만다.
다당제 민주국가에서 군대는 정치적 중립을 생명으로 하는 국방군이다 반면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이 "창건하고, 영도하고, 지휘하는" 당군이다. 그 역사는 20세기 초반 군벌시대(1916-1928)로 까지 소급된다. 이 시기의 12년간 중국 전역에서는 무려 1,300여명의 군벌들이 140번 이상의 대규모 성급(省級) 전쟁을 벌였다.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 역시 자체 무장을 통한 게릴라 군사조직에서 출발했다.
이후 중일전쟁(1937-1945)과 제2차 국공내전(1946-1949)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서 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장기간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던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딱히 공산당의 이념에 동조했다기 보다는, 모두가 중공정부의 군사력 앞에 항복함 셈이었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서 리어바이던의 지배 속에 들어간 원초적 사회계약이었다고 할까.
이 후 문혁 발발 직전까지 17년 세월 동안, 중국에서는 단 한번의 대규모 무장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대 4,500만이 아사한 1958-1962년의 대기근 시기에도 중공정부의 전일적 지배구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다. 1964년, 중공 정부는 마침내 핵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다시금 정권의 정통성을 입증했다. 가장 강한 조직이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는 군사독재의 적나라한 면모였다.
요컨대 중국 공산당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서 정치권력을 독점한 철저한 관,군합일의 조직이었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당 서열 2위에 앉힘으로써 군부를 온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이후 마오는 부리나케 혁명위원회 설립을 명령한 후, 결국에는 지방군부가 문화혁명의 주도권을 쥐게 했다. 그는 "당이 총을 지휘하는" 한, 지방정부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서 독자행동을 할 수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국가는 배타적 영토 내에서 헌법에 따라서 "합법적으로" 모든 구성원에게 물리력을 구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직이다. 공권력의 합법적 행사가 국가의 근본 책무이며, 존립 이유다. 군대와 경찰은 공권력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군대의 명령계통이 무너지고, 경찰의 지휘계통이 흔들릴 때, 정부는 사실상 작동을 멈춘다. 군, 경이 마비된 상태라면 국가의 기초가 이미 허물어진 "정부폐쇄(government shutdown)"의 위기이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개개인은 자위(自衛)의 무장을 한다. 사회 전역에서는 독버섯처럼 무장한 집단들이 돋아난다. 역사에서 종종 보는 군웅할거의 대혼란은 중앙정부의 붕괴에 따른 지방세력의 군사화를 이른다. 세계사에서 흔히 보듯이 지방의 군사화는 내전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정치는 비열한 게임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권력자는 음모를 짜고 함정을 판다. 함정에 빠진 정적을 허울좋은 법망으로 옭아맨 후에도 권력자는 한 치의 관용도 베풀 수가 없다. 권력의 시한이 다하는 순간, 죽은 정적이 산 권력을 제압하는 반전의 드라마가 허다한 까닭이다. 정적에게는 장엄한 자결도, 순교의 형틀도 허락될 수가 없다. 따라서 권력자는 성난 군중을 선동해서 정적을 직접 처형하게 유도한다. 군중의 제단에 올라간 정치의 희생물은 쉽게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늙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어른의 연기에 달통한 '못된 악동'일 뿐이다. 인류의 비극은 다수 대중이 너무나 쉽게 '못된 악동'의 어른 연기에 현혹된다는 점이다.
"권력은 칼날이다. 가볍게 쥐어야 한다. " 작가 복거일의 촌철살인이다. 권력자가 서슬퍼런 칼날을 세게 잡고 난폭하게 휘두르면, 그 칼끝이 어디로 향할까?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치고, 가슴을 찌르고, 팔다리를 자를 수 밖에 없다. 칼을 쥔 권력자는 그 칼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지만, 인간의 손아귀는 결코 흉포한 검의 진동을 견딜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멋대로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다 스스로를 베고 파멸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권력은 부메랑이다. 가볍게 날려야 한다.
독창적인 사상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은 인텔리는 정부의 실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반면 권력자에게 기생하는 인텔리는 헐떨이며 토끼를 잡아와서는 삶기고 마는 사냥개와 다르지 않다.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문화예술계를 점령한다. 여릿한 청소년의 뇌수에 획일적 이념을 주입해야만 그들을 좀비처럼, 병정처럼, 포로처럼 사로잡고 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어김없이 청소년의 정신을 이념적으로 지배하려고 들며, 정교한 감시망을 구축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청계(淸階)"란 문자 그대로 무산계급의 조직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한다는 뜻이다. 이 운동의 명분은 혁명대오 속에 섞여들어간 반도, 특수간첩, 주자파, 지주, 부농, 자본가, 반혁명분자, 파괴분자(혹은 악랄분자), 우파분파 등을 모두 색출해서 숙청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형법에 따르면, 누구든 유죄가 확증되기 전에는 범죄자로 취급할 수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주의는 근대 형법의 3대 기둥이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주장과 모든 지식에는 계급적 당파성이 들어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통해서 역사발전의 모든 과정을 완벽학 밝혔다고 주장하는 독단의 교리이다. 요컨대 계급적 당파성과 역사적 합법칙성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다.
이 두가지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지식인은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불편부당한 진리탐구와 가치중립의 연구활동은 고작 부르주아계급 이익에 복무하는 당파적, 계급적 행위로 매도되고 만다. 뉴턴의 물리학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계급성이 있다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선동이 시작된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은 고작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따라서 계급투쟁을 실천하는 일 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의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이상 진리탐구는 무의미할 뿐이다.
자유의 순교자 린자오(林昭, 1932-1968), 왕 페이잉
다큐멘터리, 중국의 비판적 영화감독 후제(胡杰, 1958- )는 두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린자오의 영혼을 찾아서, 2004], [내 어머니 왕 페이잉, 2011]을 제작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오세아니아 진실부 기록관리원 '윈스턴'이 고문을 당하며 외친 영국 사회당 "잉속(Insoc)"의 구호이다. "미친" 윈스턴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를 고문하는 진실부의 '오브라이언'이 그에게 속삭인다. "현실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게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만 있단다......당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면 그게 바로 진실이란다."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에 세워진 마르크스의 묘비명은 젊은 시절 그가 남긴 잡기장에서 따왔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한마디는 전 세계 수많은 청년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마력을 발휘했다.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헌법이며, 전제주의적 대식민 지배와 전일적 일당독재를 정당화하는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당헌이다. 세계인의 상식이지만, 중국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약하고 박탈할 수 있는 인민 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중국의 정치체제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묻지 마!" 경제공생을 추구해 왔다. 닉슨의 외교노선은 경제의 자유가 정치의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안일한 낙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류는 현재 "중국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문혁 이후 만신창이로 내버려졌던 공자는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다시 태어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세계를 향해 아이들이 외친 한 마디는 바로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 말씀이었다. 이후로 공자는 "중화민족"의 정신적 스승으로 숭상되고 있다.
문제는 불과 40-50년 전에 중국공산당이 직접 공자를 불러내서 역사의 법정에 세워놓고 헐뜯고 깨물고 짓밟았다는 사실이다. 그 역사의 법정에서 공자를 변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피고인석 공자를 매도하고, 폄훼하고 타격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에서 암세포를 도려내듯이 공자의 유산을 청소하려고 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들 가운데 10개 민족은 무슬림이다. 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중국내 무슬림 인구는 총 인구의 0.45%(600만명 정도)에서 2.85퍼센트(3,900만명)까지 상이하다. 다른 민간의 집계는 최소 600만에서 최대 8,000만명을 헤아린다. 물론 이처럼 큰 통계적 편차는 현재 중국에서 이슬람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공정부는 무슬림들의 뇌리에 <코란>의 교리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주입하고, 그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임을 각인하고 싶어한다.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신장의 광활한 영토가 독립하는 것이 너무나 큰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손실이기 때문이다. 통일정책의 일환으로 중공정부는 무슬림들의 사상개조를 꾀하고 있다.
실용적 합리성, 치밀한 계획성, 무자비한 실행력, 덩샤오핑이 실현한 것들은 마오쩌둥이 그에게 원했던 "비상한 재능"이었다.
빅브라더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사인방이 전격 체포되었다. 곧이어 문혁 10년의 대동란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았다. 이후 2년의 권력투쟁을 거쳐 등샤오핑이 개혁개방의 깃발을 들고 지치고 굶주렸던 인구 8억명의 광활한 대륙에 제2의 혁명을 일으켰다. 실로 인류사에 흔치않은 "지천태"의 격변이었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래 27년 동안 중국공산당 서열 1위의 최고 영도자로 군림해왔다. 그는 정치, 행정, 군사 3권을 모두 장악하고 국가의 모든 대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교통, 통신, 정보, 군사기술 등 현대국가의 기반위에서 그는 전통시대 어느 황제도 가지지 못했던 "권력의 인프라"를 확보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조직적인 선전, 선동의 기술을 발휘하여 대중매체를 전면 장악하고 대중의 의식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던 내내 그는 단순한 지도자를 넘어서 전인민의 눈동자에 날마다 강림하는 인격신으로 군림했다. 그는 천신지기(天神地祇 : 하늘의 신과 땅의 신)를 대신해서 중국 인민의 심성을 파고 들었다. 사람들은 "마오주석 만세!"를 외치며 하루를 시작했고, 날마다 그의 어록을 줄줄 암송했다. 요컨대 마오쩌둥은 전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 행정권, 군사력, 문화권력, 이념권력까지 장악하고 행사했던 전체주의 정권의 전제군주였다.
1979년에서 2018년 사이 중국은 연평균 9.5%의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경제가 매해 10%씩 성장하면, 매 7년 마다 2배, 4배, 8배, 16배씩 기하급수적으로 경제 규모가 팽창한다. 1980년과 2016년을 비교해보면, 중국 국내 총생산은 58.2%가 증가했다. 국가의 노선이 변했기 때문이다. 마오의 공산근본주의 대신 덩샤오핑의 실용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중국 철학의 개념을 빌리자면, "엄(嚴)"의 통치가 "관(寬)"의 통치로 뒤바뀐 결과였다.
리더십이 국가의 명운을 가른다. 좋은 리더는 정부의 중장기 목표를 설정하고, 발전전략을 제시한다. 행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액션플랜을 설계한다. 복잡한 현안을 해결하고, 위기를 관리한다. 쉽고 분명한 언어로 대중과 소통하고, 난관을 뚫고, 정책을 추진한다. 리더십은 한 나라의 기본가치를 세우고, 사회, 경제적 기본제도를 결정한다. 좋은 리더는 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나쁜 리더는 경제를 후퇴시키고 사회를 해체한다.
2023.5.12. 금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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