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관리

20240624 좌물촌 이야기와 인간존중

햇살처럼-이명우 2024. 6. 24. 07:31

어느 날 조회가 파한 직후 고구려 국상 창조리가 미천왕에게 물었다.
"폐하 좌물촌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좌물촌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아, 거기는 양우 장군의 고향이 아니오?"
"예. 작은 고을이라 양우 장군을 그렇게도 자랑스레 여겼다 합니다. 생전에 그를 따라 온 고을의 장성이 전장에 나설 정도라, 좌물촌 출신들 중 전장에서 뒤로 빠진 병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합니다."
"용맹하기가 한마음인 마을이구료."
"예로부터 북방의 절노부에서는 좌물촌 출신이라 하면 내력도 보지않고 장수로 삼는다 합니다. 명신 을파소의 고향이기도 한데, 터가 좋은지 그 땅에서 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올곧고 용맹하다 하더이다."
"알겠소. 그러잖아도 왕자들과 지방을 좀 둘러보아야겠다고 여기던 참인데 그런 자랑스러운 마을부터 가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겠군. 내 두 왕자를 데리고 다녀오리다. 국상께서는 그곳에 맞는 선물을 준비해 주시요."

  미천왕에게는 사유와 무 두 왕자가 있었다. 첫째 왕자 사유는 유약하였으나, 둘째 왕자 무는 무예나 담력이 고구려 제일의 장수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무 왕자가 미천왕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를 달려 좌물촌에 도착한 마을 어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양우 장군의 위령비가 있는 작은 사당이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왕자들과 일행을 먼저 숙소로 돌려보낸 미천왕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몇 번이고 양우 장군을 애도했다.
  그러던 중에 한 젊은이가 위령비로 다가왔다. 한참 그가 전사자들을 향해 술을 따르며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젊은이 하나가 더 이곳을 찾았다. 그러자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는데, 먼저 온 젊은이가 하던 행동을 서둘어 마치더니 이내 사라지고, 새로 온 젊은이는 몸을 숨겼다가 먼저의 젊은이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관심있게 이를 쳐다보던 미천왕으니 나중에 젊은이가 조문을 마치자 그를 불러세웠다.
"이보시오?"
"무슨 일이신지요?"
"내 방금 보니 두 분이 서로 마주치기를 꺼려하던데, 같은 마을 사람이 아니요?"
"예, 맞습니다. 함께 낙랑의 전장에서도 나섰던 친구입니다."
"친구라? 그런데 왜 서로를 피하는 것이오?"
"......"
"말하기 어렵소?"
머뭇거리던 젊은이가 천천히 답했다.
"부끄러운 까닭입니다."
"부끄럽다? 좌물촌 사람들은 용맹하기가 따를 자가 없다 하던데."
젊은이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랬지요. 양우 형님을 따라 선봉에 서서 언제나 최전방의 싸움을 도맡았습니다. 도망친 하람은 하나 없고 항복한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끄럽소. 혹 도망병이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도망친 이 하나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잠시 머뭇거리던 젊은이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것을 저희가 생존자인 까닭입니다."
"생존자라?"
"예, 좌물촌 사람 중 낙랑대전에서 살아남은 이가 넷에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 얼굴을 들겠습니까. 다른 마을에서는 서로 공훈을 자랑하고 유세를 한다고 합니다만, 저희는 그러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형제가,  자식이, 친구가 모두 전사자요 부상자인데 그들의 희생을 딛고 살아 돌아왔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

"저희 생존자는 이렇게 가끔 밤을 틈타 나올 뿐 평소에는 얼굴을 잘 비치는 법이 없습니다. 희생자의 유족을 볼 낯이 없는 까닭이지요."

"저는 좀 낫습니다. 아까 그 친구는 몸이 온전히 성하니 더욱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대는 몸이 성하지 않소?"

사실 저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간신히 희미한 형체를 구분할 수 있지만 머잖아 온전히 볼 수 없게 되겠지요."

  미천왕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얼마 되지 않는 전공을 경쟁하듯 한껏 과장하여 내세우는 이들을 수도 없이 보아온 그에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희생자를 볼 낯이 없다고 말하는 맹인 젊은이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대는 이리오라. 나라를 위해 눈을 바치고도 평생을 숨어 산다고? 그대에게 고구려가 무엇이기에!"

"예? 그것은......"

"고구려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주었기에 그렇게 희생하느냔 말이다!"

영문을 모른채 미천왕의 억센 품에 안긴 젊은이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다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자식이 있습니다. 제가 몸을 바쳐 나라를 지켜내면 제 자식은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버이 된 마음이 다들 그렇겠지요. 어른께서는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날 미천왕은 마을에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크게 잔치를 열었다. 나라를 위해 모든 젊은이가 몸을 바친 이 고을에 태왕의 방문이란 그야말로 너무나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모든 촌민들이 기쁘고 흥겨워 잔치를 즐기니 이날 좌물촌은 한낮부터 늦은 저녁까지 모두가 술에 흠뻑 젖어 노랫소리로 가득했다.

  그렇게 백성들과 어울리던 미천왕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두 왕자를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좌물촌 장정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크게 상반되어 있었다. 건장하고 몸이 온전한 사내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장수와 병사의 덕목을 논하고, 꺾은 나뭇가지로 합을 겨루며, 장수와 병사의 덕목을 논하고, 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하는 무. 그리고 비참한 몰골을 한 사내들의 사이에서 금방이라고 울듯한 얼굴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떨어뜨린 사유. 언젠가부터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이 사라진 팔다리 어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장애가 심한 사람일수록 무의 곁에는 가지 않았다. 무는 온마을이 장애인인 그 마을에 가서도 온전하고 건장한 젊은이들만 모아 무용담을 듣고 전략을 논하며 끝없이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유는 자식 잃은 노파를 어머니라 부르고 팔다리 떨어져 나간 불구자들을 어루만지며 눈물로 그들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평양성으로 돌아온 미천왕은 오랜 숙고 끝에 자신을 빼닮은 무왕자 대신에 사유왕자를 태자로 결정한다.

"전쟁에 이기면 왕실과 조정은 부유하고 행복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백성은 목숨을 잃고 불구가 되며 가정은 망가지지 않소. 전쟁을 피하여 더 이상 싸움이 없다면 왕실은 궁색하고 고관대작들은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겠지만, 오히려 백성은 가정에서 식구들과 살 수 있지 않겠소? 나는 그 때 확신을 얻게 되었소. 항상 전쟁에 이기고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을 싸움터로 몰아내는 용맹한 군주에 비해 전쟁에 지더라도 백성을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옹줄한 군주가 못하지 않다는 걸 말이오. 무는 전쟁을 잘할 아이요. 백성의 수효도 얼마되지 않는 이 고구려의 장정들은 그 아이를 따라다니며 끝도 없이 목숨을 잃고 팔을 잃고 다리를 잃을거요. 군주는 백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광을 이루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되오." 

  이것이 샤유를 태자로 결정한 이유라는 말에 대소 신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엎드리고, 황후는 스스로를 북전에 유폐하였다. <고구려4,김진명, 새움,2016>

 

더 이상 인간존중의 실천이 있을까?

평생을 백성들의 손에 무기보다는 농기구를 쥐어주고자 노력했던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고사유의 인간존중도 그렇지만, 전쟁의 나라 고구려에서 유약했지만 인간존중의 심성을 가진 사유를 태자로 세운 미천왕의 백성 사랑 인간존중에 더 고개가 숙여진다.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모두 이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안전관리의 기본 덕목인 인간존중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인간존중이라 떠들며, 재해를 예방해야한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제도는 어떤 보완이 필요한지, 정책은 어떤 수정이 필요한지, 안전활동에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바로 실천하자. 맹인 병사를 안아주는 미천왕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