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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대산의 전설_20240912

햇살처럼-이명우 2024. 9. 12. 10:47

개마대산의 전설_20240912

 

  미천왕 3년 9월(302년) 

    더이상 고구려의 정신을 팔지 않겠다며 고구려에 철을 내놓으라는 낙랑 사신의 목을 베어 보내자, 낙랑태수 최비는 현도군에 출병 명령을 내리고, 드디어 현도군과 고구려군이 개마대산에서 맞붙었다.   

  이때 고구려군은 선봉장 여노가 오천을, 태왕 을불이 중군 일만이천을 후군장 소우가 팔천을 이끌었으며, 별동대인 오천의 철기대를 아달휼이 이끌고 있었다. 기병으로, 병사는 물론 말까지 철갑으로 온통 감쌌다하여 개마기병(鎧馬騎兵)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지 엿새째 되던날, 고구려군 3만과 현도군 사만이천 군사가 맞붙어 전투를 시작했지만, 서로 죽고 죽이는 더하기빼기의 놀음이라 생각한 낙랑군의 고연굉과 안저는 '나의 강한 군사로 적의 약한 군사를 치라'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에 따라 병사 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고구려군의 선봉장 여노는 평소와 다른 적의 진영을 발견하고 잠시 한편으로 물러서 적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중앙의 두께가 매우 두꺼워져 있고 군사의 수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않게 많아진데다 쳐져있던 중군과 구경만하고 있던 후군이 없어졌다. 그는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세 배가 되었구나. 저들이 드디어 합쳤다!"

  곧 여노는 기수를 불러 명했다.

  "붉은 깃발을 흔들라." 

  기수가 붉은 기를 높게 쳐들고 몇 번 힘차게 휘두르자, 곧 멀리 떨어진 기수들이 이를 따라 붉은 기를 들었다. 수십 개의 붉은 깃발이 전장에 휘날리자 달려들던 고구려군은 이내 군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붉은 깃발은 곧 퇴각을 의미했다. 그리고 전장에서 퇴각은 반드시 큰 피해를 동반하는 법이었다. 

  등을 보인 채 물러서는 고구려 군사들에게 적의 창칼이 떨어져 내렸다. 진영에 높이 쳐 놓은 방책에 이르러서야 고구려군은 반전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이날 고구려군은 평소의 갑절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다. 

  "저들이 드디어 합쳤소!"

  막사에 여러 장수들이 모인 가운데 여노가 말했다. 

  "아니, 장군! 그렇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령을 내립니까? 적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그다지 불리한 형국도 아니었습니다. "

  건장한 체격의 우익장군 형대가 붉어진 얼굴로 크게 항의했다. 그러자 이를 따라 몇몇 장수들의 불만이 함께 터져 나왔다. 

  "그만!"

  장수들이 항의가 거세지자 을불의 짧은 목소리가 이를 막았다.

  "그것은 나의 명이었다. 여러 장수들은 더 불만을 갖지 말라."

  곧이어 을불은 여노에게 물었다. 

  "호구(虎口)는 어디인가?"

  뚱딴지 같은 말에 여노가 대답했다. 

  "유암구(流巖丘)라는 곳입니다. 바위조차 물처럼 흐를 정도로 경사가 심하고, 지형이 들쑥날쑥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십 리 밖입니다."

  을불은 곧 장수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명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치열한 싸움을 벌이되, 다시 북동쪽으로 십 리를 후퇴하도록 하라."

  "폐하!"

  형대가 다시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을불은 손을 내저었다. 

  "그저 따르도록 하라."

 

  이튿날, 다시 양군은 격돌했다. 지난 밤의 명령대로 고구려군의 장수들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적과 맞섰고, 양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고구려군은 서둘러 군사를 물렸고, 다시 전날과 같이 고구려군은 등에 창칼을 맞아야만 했다. 

  전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날의 고구려군은 진영조차 버리고 퇴각을 계속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이레간의 팽팽한 전투 끝에 결국 패색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십리를 고구려군이 퇴각했을 즈음, 도주하는 가운데에도 눈을 들어 엉뚱한 곳을 계속 살피던 여노는 개마대산의 한 기슭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기수!"

  여노가 기수를 소리쳐 불렀으나 도주하는 데 정신이 팔린 기수는 이를 듣지 못했다. 몇 번 더 기수를 부르던 여노는 곧 바람같이 말을 몰아 기수에게서 직접 깃발을 뺏어서는 하늘 높이 들고 힘차게 휘둘렀다. 푸른색의 깃발이 바람을 받아 펄럭이자 퇴각하는 가운데에도 이를 발견한 기수들이 있어 고구려군의 군데군데에 푸른 깃발이 솟았다. 

  청기는 응전을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퇴각하던 중에 청기를 발견하고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이를 바라보던 장수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크게 외쳤다. 

  "돌아서라! 다시 적과 맞서라!"

  깃발의 색깔에 따른 나섬과 물러섬은 고구려군이 전술훈련을 할 적에 가장 중요시 여기는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매일같이 일삼아온 고구려군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깃발만큼은 절대적으로 따랐기에, 혼란 속에서도 일사불란하게 반전하여 필사적으로 적과 맞섰다. 곧 전황이 고구려군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가운데에도 다시 난전이 펼쳐졌다. 

 

  개마대산 기슭의 유암구. 경사가 가파르면서 밑으로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평원이 깔려 있는 언덕이었다. 이 장소는 암석과 나무가 충분해 모습을 가릴 수 있는데다 내리막 경사로 인해 무거운 철갑을 하고도 말이 힘들이지 않고 가속력을 붙일 수 있어 아달휼로 하여금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한 곳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언덕 아래의 전황을 살피던 아달휼은 고구려군이 달아나고 그 뒤를 현도의 군사들이 대거 쫒고 있는 걸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 고삐를 단단히 잡고 기다려라!"

  아달휼은 고구려군의 진영 곳곳에서 붉은 깃발이 푸른 깃발로 색을 바꾸는 걸 확인하고 벌떡 일어서며 우레와 같은 고함을 질렀다. 

  "전--군!"

  나뭇가지가 떨리고 수풀이 흔들릴 만큼 커다란 고함소리가 유암구에 울렸다. 곧 산속의 우거진 숲과 큰 바위덩어리들 뒤에서 오천 철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과 말 모두가 하나같이 갑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진격!"

  곧 급한 경사를 타고 오천의 군마가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와 천지를 울리는 함성소리는 마치 산사태가 난 듯 보였고, 그들은 바위와 흙덩어리가 되어 고구려군과 현도군이 뒤엉켜 있는 전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고구려군을 몰아세우며 한참 열을 내던 고연굉 또한 이 광경을 목도했다. 백전노장인 그조차도 평생 이토록 흉맹한 기세로 달려드는 적을 본 적이 없어 말을 멈추고는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유암구에서 쏟아져 내려온 아달휼의 군사들은 난전 중인 현도군의 측면을 무시무시한 충격으로 파고들었다. 이 돌격대는 두 가지 다른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부대는 말과 온몸을 강철 갑주로 감싼 채 군더더기 동작이 없이 무거운 철창을 앞으로 향한 채 직선으로 달려 파괴적인 돌파를 담당하고, 뒤따르는 부대는 이전에 여노가 만들어낸 경갑과 짧고 가벼운 칼을 차고 뒤를 따랐다. 

  이 엄청난 기세에 현도의 군사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저 짓밟히며 무너질 뿐이었다. 현도군의 진영 가운데로 길다란 구멍이 패어 나가고, 철기대는 순식간에 적의 머리와 꼬리만 남겨둔 채 몸통을 완전히 갈라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현도의 장수들은 제각기 창칼을 들고 이를 막으려 몸을 날렸으나 그야말로 이란격석(以卵擊石). 이 전무후무한 돌격에 그저 튕겨져 나오며 목숨을 잃고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후위의 경갑기병들은 중갑에 들이받혀 자세가 흐트러지고 쓰러진 적을 확실히 참살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중갑기병은 장비가 무거우니만치 동작이 늦어 적군 진영의 두께가 얇으면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적이 두껍게 뭉쳐 있을 때에는 서로 엉켜 쓰러지는 병사가 온전한 병사를 연차적으로 무너뜨려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중갑기병이 일차 적진을 돌파했다가 다시 말을 돌려 돌파하기를 몇 번 반복하자, 겁을 먹은 적들은 중갑기병에 스치지 않고도 스스로 뒤엉켜 쓰러지며 자멸하고 말았다. 이들을 경갑기병이 말에서 내려 착실히 칼로 베고 찔러 죽이니 금세 벌판은 피가 내가 되어 흘렀다. 

 

  고구려군이 전력을 다해 창칼을 휘두르며 현도군을 몰아치자 도망하는 병사들끼리 서로 엉켜 죽은 것만도 수천에 이르렀다. 현도군은 자신들의 진영만을 바라고 그저 죽을 힘을 다해 달릴 뿐이었다. 그러나 삼분의 일조차도 남지 않는 채 도착한 현도군은 그들의 진영에 어느새 고구려군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항복할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라!"

  현도군의 진문에는 한 장수가 말을 탄 채 창을 들고 있었는데, 장수의 말은 한왕마요, 창은 은빛으로 번뜩이는 여려극이었다. 고구려 제일의 무장인 여노가 신장(神將)과도 같은 기세를 뽐내며 달려드는 적장들을 모조리 한 창에 꿰어 넘기는데, 지친 현도의 군사들은 도무지 대적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곧 모조리 엎드려 항복하거나 진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뿔뿔이 도주할 뿐이었다. 

  "살아남은 적의 숫자는 이천 명이 되지 않습니다."

  여노의 보고를 받은 을불은 말이 없었다.

  "적장 고연굉을 죽이고 이백여 명의 장수를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습니다."

  무언가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전황 보고를 마친 여노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움찔대던 그의 입에서 이내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승입니다, 폐하! 적은 전멸했습니다."

  "아!"

  그제야 을불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적이, 없단 말이지?"

  여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황하족을 상대로 한 역사상 유례없는 대승이 이 올곧은 무사의 마음을 사정없이 쥐어짠 탓이었다. 

  "예, 폐하! 적의 사만 군사가 모조리,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그래, 대승이구나."

  짤막한 한마디를 던지고 말없이 앉아 있던 을불은 곧 장수들을 뒤로하고 막사 밖으로 나섰다. 십수 명의 장수들 중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 묘하고도 감격적인 순간을 각자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막사 밖으로 나선 을불의 눈에 맑은 밤하늘이 들어왔다. 드높게 솟은 개마대산의 봉우리에 걸린 달 주위로 수없는 별이 고구려의 승리를 축하하듯 밝에 빛나고 있었다. 

  "보고 계십니까?"

  을블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나직이 흘러 나왔다.

  "보고 계시냔 말입니다."

  별빛이 흐르는 푸른 밤이 을불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젖어들어 가늘게 전율하는 듯했다.  <고구려 3 낙랑출출, 김진명, 새움, 2016 중에서>

 

  이런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선조들이 느꼈던 감격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 에너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핍박만 받아오던 고구려가 황하족을 상대로 이긴 대승에 감동의 눈물만 흘릴게 아니라, 가슴 속 깊이 울려오는 그 감동의 에너지를 오늘을 사는 나의 삶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아바타'의 생명의 나무에 접속하듯, 역사속 감동의 에너지에 접속하여 그 에너지를 나의 삶에 활용하자. 그래서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