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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고미숙, 북드라망, 2023.

햇살처럼-이명우 2025. 1. 22. 07:21

673.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고미숙, 북드라망, 2023.

  바야흐로 대 혼돈의 시대다. 2020년(경자년)에 도래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식의 구조 및 삶의 방식 전체를 다 전복해 버렸다. 지나온 길은 끊어졌고, 새로운 길은 운무 속에 가려진 형국이다. 특히 기후 재앙의 극복은 더 이상 유보하거나 지연할 수 없는건 인류적 미션이 되었다. 기후가 요동치면 정치경제, 나아가 사람들의 내면도 요동친다. 그래서인가, 다들 아프다. 몸도  마음도. 상처 혹은 트라우마라는 말은 이제 흔하디 흔한 상투어가 되었다. 그에 병행하여 치유를 위한 프로젝트도 넘쳐난다. 더 서글픈 건 그럴수록 상처 또한 깊고 다양해진다는 것. 왠지 '야른한 공모관계'가 느껴지지 않는가. 힐링은 상처를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진 상처들'은 치유의 항목을 늘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더 끔찍한 건 이런 배치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상처의 원인도 외부에 있고, 치유의 주체도 외부에 있다. 그러면 나는? 또 나의 삶은? 허깨비나 다를 바가 없다. 힐링이 넘칠수록 삶은 증발해 버리는 이 아이러니 혹은 무지!
  그러므로 중요한 건 더 좋은 힐링, 더 많은 치유가 아니다. 힐링과 상처의 공모관계를 해체하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을 일(job) 방향으로 이끄는 거울을 깨뜨리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는 것, 그리하겨 감히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는 것, 길은 다만 그거에만 있을 뿐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선 뗏목이 필요하다. 사주명리학은 아주 힘차고 역동적인 뗏목이 되어줄 것이다. 강을 건넌 다음엔? 물론 뗏목은 버려야 한다.

차례
1부.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의 비전을 찾아서
2부. 사주와 8자 : 8개의 '카드'에 담긴 비밀
3부. 육친법과 '오이디푸스'
4부. 케이스 스터디 : 팔자의 경제학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는 정신분석의 체계 또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최근에는 뇌과학의 진화 속에서 뉴런들의 접속만으로 인간의 심리를 다 읽어낼듯 기세등등하다. 그 밖에도 유전공학에 인지심리학까지 마음에 대한 '인식의 지도'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미술치료, 음악치료 등등 각종 치료의 기술 또한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리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내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마음이란 그저 신경다발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한가? 아니면 무의식의 희미한 잔영일 뿐인가? 어떤 질문에도 우리의 답은 하나다. 오직 모를 뿐! 하며 마음의 행로에는 온통 아이러니 투성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 빌 브라이슨은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적 성과를 흥미진진하게 엮은 다음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도 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있는 셈이다. "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걸 토로한 대목이다. 앎이 증가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무지의 영역 또한 늘어난다는 '무지의 법칙'이 그것이다. 이 말을 흉내내어 말해보면, 우리는 예측도, 측량도 불가능한 제도와 구조에 둘러싸여서, 뿌리도, 근거도 알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채로, 그저 방향도 흐름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무지의 늪'이다.
  그래서인가. 다들 아프다. 젊은이도 기성세대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진보도 보수도. 그러고 보면 이 점에선 참, 공평해졌다. 헌데, 진정 놀라운 건 이 무지 자체가 아니다. 이 무지에 대해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결코 이 무지의 심연을 주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병원을 찾고, 의료시스템을 요구하고, 각종 정신분석과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섭렵할 뿐이다. 몸은 병원에, 마음은 정신과(혹은 종교단체)에 맡겨버리면 그 뿐. 스스로 그 원천을 탐구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딴은 이런 질문이 가능한 '담론의 공간'이 없기도 하다. 양극화, 주식(코인) 중독, 제도와 시스템의 파행, 가족주의라는 신화, 그리고 약간의 통계수치 등 담론의 공간엔 늘상 이 비슷한 말들만이 맴돌 뿐이다. 이 '지루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질병과 번뇌의 원천을 탐구한다는 설정은 원천봉쇄 되어 버린다. 마음과 무지가 동의어가 되어버린 시대, 마음이 곧 '무지의 늪'이 되어버린 시대다.  
  그 결과, 혜가는 마음을 찾기 위해 기꺼이 한쪽 팔을 바쳤건만, 사람들은 손가락 '까딱'할 힘도, 용기도 없다. 그 무지로 인해 존재와 운명을 송두리째 박탈당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 무지에 대하여 어떤 질문도 던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연출하는 최고의 '농담'이자 아이러니다!

  '80년대엔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 졸업하면서 노동운동을, 중년이 되어선 환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생협활동을 하고 있어요. 쉬지않고 운동을 해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과 친밀감이 생기지 않을까요? 마음은 늘 급하거나 우울하고...... 몸에는 늘 병을 달고 살아요'

  이런 식으로 운동의 가치와 명분이 자신의 몸, 그리고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않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더더욱 헌신적으로 활동을 조직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이 반복된다. 아울러 내적 충만감이나 존중감 또한 더 무너져 간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아프다.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이 사이에 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 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아니 그 이전에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 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개입 역시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 누리고 바꿀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물론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유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념과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전체를 바꾸는데서부터 공부는 시작된다."(정화스님)

  금융자본은 국가나 민족, 인종 혹은 휴머니즘 그런 경계들을 가차없이 조롱하고 무시하면서 폐기처분해 버렸다. 박노해의 말대로, 자본의 '안과 바깥'이 모호해진 것이다.

  차서 :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오버랩시킨 개념이 곧 '차서'다. 예컨대 벚꽃이 피면 봄이다. 그때 봄이란 벚꽃이라는 공간적 표지와 벚꽃이 필 수 있는 절기라는 시간적 흐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차서라고 한다.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리다.

  중국 최고의 소설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듯이, '좋은 것은 끝이나고 끝이 있어야 좋은 것"이므로, 무성함이 극에 이를 때 입추가 된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금화교역(金火交易)은 우주의 대혁명이다. 혁명에는 대가가 따른다. 기존에 이룬 성취를 과감학 버려야 하고, 버림으로서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대개의 조직이나 사업체가 이 가을의 단계를 견디지 못한다. 아니, 이런 마디가 있다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명망이든 전통이든 놓지를 못한다. 어떻게든 유지, 보수하면서 미봉을 하려고 든다. 그럴 때 반드시 예기치 않는 갈등과 충돌이 폭발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애초에 품었던 뜻과 의지를 포기해 버린다. 남은 것은 사람과 활동에 깊은 환멸뿐! 하지만 그것이 리듬의 어긋남에서 온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주적 차원에선 선악시비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선이건 악이건 옳건 그르건 사회적 표상은 모두 습속과 통념의 산물이다. 습속과 통념은 무겁다. 어지간해선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중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팔자를 바꾸려면 이 중력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중력이 가중되면서 순환은 더더욱 불가능해진다. 소유와 집착으로 귀결되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고로 강밀도가 청정해야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한 것이다.

  우주를 알고 사람을 알면 지연히 그 운동 변화의 법칙을 알게될 것 아니겠는가? 미래를 알려는 생각보다 먼저 자신을 알려고 해야하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그 방법이란 꿈과 같은 일시적인 정신현강일 뿐이네(한규성,<역학원리 강화>)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문명의 폭주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감정, 자의식, 스펙, 대체 무엇이 '나'인가? 그 어떤 것도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괴롭고 아프다.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니체, 서문, <도덕의 계보>, 청하, 1982,21-22쪽) 결국 자신과의 소외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

  동양의 사상은 하나같이 마음의 혁명, 곧 求道를 설파한다. 道란 무엇인가? 마음과 우주가 하나임을 깨달아 존재를 완벽하게 탈바꿈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곧 사회적 인과의 결과물이다. 나의 질병은 곧 시대적 징후의 산물이다. 나의 욕망, 나의 질병을 탐구하고 해명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순환시킬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 뿐이다. 한꺼번에 다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것은 이미 그 안에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자기를 소외시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너무 협소하다고? 그렇지 않다. 어떤 개인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존재성 자체가 사회적,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관계의 배치를 바꾸지 않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어떤 조건, 어떤 열악한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버리지 않을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저항과 투쟁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권력이나 자본도 그런 존재를 회유하거나 훼손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운명애'야 말로 구원과 혁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구도의 열정과 혁명적 분노가 함께 갈 수 있는 길!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흐름에 참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곧 혁명이 아닐까? 거꾸로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비슷하지만 가짜다. (사이비 似而非)

  공포의 원천은 자연의 소리를 외면하고, 오직 문명을 구축하는데만 골몰했던 인간의 탐욕이었다. 그리고 그 탐욕의 뿌리에는 '지독한 무지'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빌딩을 올리고 고속도로를 만드는 기술은 그토록 민첩하면서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돕는 일에는 어찌 그리도 더디고 어설프단 말인가. 방사능물질을 추출하는데는 첨단의 기술력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불러올 재앙에 대비하는 시스템은 어찌 그리도 원시적일 수 있단 말인가. 천안함 침몰 때, 또 구제역 바이러스 때 충분히 확인했듯이 문명이란 빼앗고 파괴하는 일에는 신의 능력을 압도하지만,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는 원시인보다도 미력했던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재난 대비국인 일본이 이럴진대 다른 나라의 경우야 말할나위가 있으랴.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는 복되도다."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했던 말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 '길'이 끊어진 지 시대다. 통계와 수치가 길을 대신하고 그 길에는 '홈'이 깊게 파져있다. 오직 소유와 증식을 위한 사다리만으로 이어져 옆을 볼 수도 전체를 볼 수도 없다. 하여, 타자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이불안의 늪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밤하늘의 별과 인생의 길을 하나로 이어줄 지도를 찾아내면 된다. 사주명리학이 바로 그것이다.

  木과 火는 발산하고 뻗어가는 기운이다. 이게 더 늘어났다면 땅은 폭발하고 말았을 것이다. 반대로 金과 水는 수렴하고 응축하는 기운이다. 이 기운이 더 첨가되었다면 땅은 얼어붙거나 쪼그라들고 말았을 것이다. 인묘진(寅卯辰 : 봄), 사오미(巳午未 : 여름), 신유술(申酉戌 : 가을), 해자축(亥子丑 : 겨울), 辰,戌,丑,未 土는 계절의 끝, 곧 환절기 마다 土가 끼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2개의 지지(地支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와 10개의 천간(天干)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아무튼 이러한 간지를 순환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살이를 풀이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이다. 사주(四柱)란 네 개의 간지(생년/월/일/시), 명리란 운명의 이치라는 것이다.

  엄마 뱃속을 나오면서, 다시말해 선천에서 후천의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폐호흡으로 바뀐다.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는데 그 때 우주의 기운이 호흡을 통해 아기의 신체에 각인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존재와 우주 사이의 첫번째 마주침, 그 '인증샷'이라고나 할까? 사주의 기운이 되는 달력은 태양력과 태음력이 결합된 '절기력'이다. 즉 달의 변화로 날짜를 계산하고,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절기의 변화를 읽는 방식이다. 하늘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길을 황도라고 한다. 황도 360도를 15도씩 나누면 24개의 마디가 생긴다. 24절기가 바로 이 마디에 붙여진 이름이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천지의 기운 혹은 물리적 배치가 달라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개의 별, 그것이 곧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다. 이들이 밀고 당기는 역학적 배치가 사주의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오행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신기지물(神氣之物)이라고 한다. 예컨대 사람은 손이 없이 태어나도 치열하게 훈련을 하면 발이 손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해낸다. 심지어 전신장애인 경우도 신체의 한 기관을 통해 충분히 영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기지물로서의 특징이다. (식물은 자신의 토양을 떠나지 못하는 점에서 기립지물(氣立之物)이고, 동물은 神氣之物이지만 오행 가운데 한 두가지를 편향적으로 타고나기 때문에 생존자체가 환경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寒煖燥濕(한난조습 : 차고, 따뜻하고, 건조하고, 습하고)

  팽창을 하며 물질과 에너지가 흩어지는 과정이 양의 과정임, 물질과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 음의 과정이다. 여기 팽창의 과정에서 처음에 한 방향으로 뚫고 나오는 힘이 木이며, 목을 통해 한 방향으로 뚫고 나온 힘이 사방팔방으로 무질서 하게 흩어지는 과정이 火이다. 또한 수축의 과정에서 한 없이 흩어져 더 이상 흩어질 수 없는 상태까지 분열된 화를 거두어 수렴시키는 과정이 金이며, 금을 통해 수렴되면서 외부만 굳어진 것을 그 속까지 단단하게 응고시켜 한 점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 水이다. 팽창하는 木과 火, 수축하는 金과 水는 제각기 자기 운동상태를 고수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木火金水를 부드럽게 달래주며 중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土이다.

  甲木은 위를 향해 뻗어가는 자작나무, 소나무의 기운을, 자신을 표현하는 속성이 강하며, 일단 나서고 보는 사람의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乙木은 좌우로 뻗어가는 화초나 들풀에 가깝다. 나서기는 하지만 주변의 여건을 좀 살핀다. 눈치라고도 할 수 있고 처세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변의 분위기를 잘 활용하여 뻗어나가는 것, 옆에 갑목이 있으면 엉겨붙거나 칭칭 감으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 乙木이다.
  丙火는 태양의 이글거림을, 丁火는 촛불의 그윽함을 떠올리면 된다. 정화는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혀주니까 예의와 배려의 기술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형식과 외부(폼)을 밝히다 정작 자신의 내부는 탁해질 수 있다.
  戊土는 화기를 머금은 산이다. 그래서 우뚝 솟아있다. 포용력과 시야가 넓지만 고집또한 엄청나다. 많은 걸 흡수하려다 보면 자신을 낮추는 능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엄청난 화력을 지닌 채 새로운 시대를 연 존재들과 잘 어울리는 일간이다.
  己土는 습지, 평야를 의미한다. 낮은 대신 사방을 넓게 포용하는 일종의 '오지라퍼'이다. 인맥이든 활동방식이건 망라하는 범위가 넓은 편이다. 그러다보면 산만해지기 쉽다. 평야에는 솟대가 필요한 법, 그래서 己土는 뚜렷한 지향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庚金은 바윗돌이다. 단단하고 파워풀하다. 정의와 규칙, 의리 같은 덕목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남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신 지나치게 엄격해서 상황을 경직되게 끌어갈 수도 있다. 규칙대로 움직이고 복잡한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풀리는 스타일, 이런 사람이 庚金이다.
  辛金은 음기가 가장 강한 신금은 칼과 보석에 해당한다. 정교하고, 세심한 일에 능하가. 당연히 매사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그 잣대가 내면으로 향하면 자신을 들들볶는 스타일이 된다. 남들의 시선을 열배쯤 확대해서 내면화하고 때론 그걸 타인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잘 삐치고 한번 삐치면 오래간다. 하지만 시선이 정교하다보니 재주가 많다. 재주가 많으면 당연히 일복도 많다.
  壬水는 바닷물 처럼 크고 힘찬 물이고, 癸水는 계곡물이나 옹달샘처럼 스케일이 작지만 투명한 물이다. 둘 다 수렴하는 기운이 강하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자, 지혜의 근원이기도 하다. 아이디어와 독창성이 번뜩이고 물의 속성답게 주변의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자신을 바꾼다. 자칫 꼼수가 많을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임수가 훨씬 더 속에 꿍치는 게 많다.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의 속성도 지니고 있다.
  癸水는 계곡의 물이 그러하듯 주변환경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유연성이 강하다.

  오장육부 木은 간/담, 火는 심장/소장, 土는 비장/위장, 金은 폐/대장,  水는 신장/방광으로 연동되어 있다.

  木(간/담)은 분노, 화   火(심장/소장)은 기쁨   土(비장/위장)은 생각  金(폐/대장)은 슬픔  水(신장/방광)은 두려움을 주관한다.

  간·담의 木기운이 태과불급이면 분노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게 되고, 심·소장의 火기운에 문제가 있으면 기쁨의 정서가 조절이 안된다. 그래서 기뻤다 슬펐다를 반복하게 된다. 비·위의 土기운에 불균형이 생기면 쓸데없는 망상이 멈추지 않는다. 신경성 위장병이 많은 건 이때문이다. 폐·대장의 金기운에 균열이 있으면 슬픔에 쉽게 노출된다. 작은 일에도 우울증이 걸리기 십상이다. 또 폐는 호흡과 피부를 주관하기 때문에 아토피나 비염등도 폐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장·방광의 水기운에 문제가 있으면 늘상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에 빠질 수 있다. 감정은 곧 물질적 대사로 연결된다. 감정의 흐름이 깨져도 장부에 병이 생기고, 거꾸로 장부에 문제가 있어도 감정의 자연스런 리듬이 깨지게 된다. 두려움이나 슬픔 같은 정서만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 역시 마찬가지다. '좋아 죽는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과도한 볼거리와 이벤트 만능시대에는 빠른 비트의 춤과 노래에 노출되는 청소년들이 아주 많다. 당연히 심장기능에 항진이 올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갑상성 항진증, 공황장애, ADHD 등 질병은 지난 10여년간 과도하게 화를 부추긴 결과라는 점에서 일종의 시대적 돌림병에 해당한다. 요약해보면 "자꾸 화를 내면 간장과 쓸개가 병들고, 지나친 쾌락에 빠지면 심장과 소장에 병이 생긴다. 또한 지나친 걱정은 비장과 위장을 병들게 하고, 커다란 슬픔은 폐와 대장에, 섬뜩한 공포는 신장과 방광의 병을 만든다.(허훈,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63-64쪽)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이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 내딛는 것 뿐이다. 역사적 실천논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지장간 조견표
지지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지      癸  己  甲  乙  戊  丙  丁  己  庚  辛  戊  壬  
장      壬  癸  戊  甲  乙  戊  丙  丁  戊  庚  辛  戊
간            辛  丙        癸  庚  己  乙  壬        丁  甲

  用神(용신). 내 사주의 태과불급을 순환시킬 수 있는 방편을 말한다. 가장 쉬운 예로, 사주에 '금수' 기운이 많으면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다. 金水之氣는 수렴성이 강하기 때문에 견고하게 뭉치기 십상이다. 이걸 순환시키려면 당연히 木火之氣로 발산시켜야 한다. 수렴의 벡터를 끌어내어 발산시켜야 한다. 정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반대로 목화지기가 강한 경우는 金이나 水의 기운을 빌려야 한다.  목화지기가 발달하면 활동력과 표현력이 강해서 일단은 활발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순환이 잘 되는 건 아니다. 금수지기를 통해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활동력 자체가 습관적으로 고착되어 버릴 수 있다. 목화지기를 주로 쓰는 사람들 가운데 간기울열이나 정신분열증 혹은 우을증을 앓는 경우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때 비장의 카드로 쓸 수 있는 오행이 바로 용신이다. 필요한 오행이 팔자 안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용신으로 삼으면 되고, 원국에 없으면 지장간에 있는 히든카드라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대운에 용신이 온다면 절호의 찬스라고 여기고 힘을 충만하게 쌓아서 대운이 불리하게 바뀌는 시절을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외부에서라도 끌어다 써야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맥을 적극 활용하라는 의미다. 즉, 용신에 해당하는 기운을 많이 가진 친구들과 적극 연대해야 한다. 같은 기운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처음엔 잘 통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불통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비슷비슷한 정서의 회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타자들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다. 낯선 것과의 마주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용신의 원리도 거기에 있다.

  많은 자식을 낳으면 부부사이가 멀어진다. 가족주의 하에선 자식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선전해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일단 여성은 아이와의 일체감이 남편으로 향하는 성욕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남편과는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부부사이가 나쁠 경우 아이가 잘 생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다 관계를 하면 아이가 덜컥 생기고 다시 남편은 밖으로 돈다. 그러면 그 여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반면 옹녀나 춘향이 같은 경우는 아이가 통 안생긴다. 설령 생겼다해도 자연유산 되거나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식상보다는 관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관성이 '센' 여성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그걸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사회적 욕망이 강하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해지는 편이다. 결국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메시지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여자는 14세, 남자는 16세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런 자연의 리듬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 나이에 짝짓기를 하는 것은 야만이다. 교육을 마치고 직업을 가지기 전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직업을 가지고 스위트홈에 필요한 자본을 충분히 확보하기 전에는 절대 성적권리를 누려서는 곤란하다.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도 여전히 청년기와 성욕을 죄악시하는 성교육이 버젓이 행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어린 시절 사랑을 못받아서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오래도록 집중하기가 쉽지않다. 좋은 기억은 물론이고, 나쁜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20년, 30년이 넘도록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이제 사건 자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내가 그 기억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하는 정신의 벡터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그 지점을 면밀히 통찰해야 한다. 즉 '나는 왜 이렇게 슬픈 유년기를 붙들고 있을까?'하는.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지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 되어버린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특히, 그 대상은 자신을 지극히 아껴주는 엄마이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관계가 왜곡되어 버린다.
  자, 그럼 여기서 '팔자'란 무엇일까?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그 단서라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그걸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훼손시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하나? 이것도 팔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국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 맞지 않는가?

(아마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지체높은 양반들 보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

  <동의보감>을 빌려 말하자면, 예전에는 노권상(勞倦傷)이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선 매일같이 상당량의 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칭 골병이 많이 들었다. 날씨만 흐려도 뼈마디가 쑤시고 삭신이 오그라드는······. 우리 부모님들이 일상적으로 앓던 신경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몸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도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 지체 높은 가문의 양반들보다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권상은 해결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존재는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이 편하면,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쓰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이라는 무형의 창고에 쌓이게 된다. 유형이 무형으로 전변하는 것이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이다. 몸이 편하면 자긍심이 높아질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사람은 활동이 줄어들면 자기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대체 왜 그럴까? 원리는 간단하다. 생명은 언제나 활동을 원한다. 움직이고 접속하고 변형되고 다시 수렴되고 등등. 그 속에서만이 자신의 '우주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활동지수가 낮아지면 그 만큼의 물리적 압력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쌓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금융자본의 증식, 디지털의 폭주 속에서 이 내면의 부동산 또한 무한증식된다. 불필요하게 비대해지면 거기서 자랄 수 있는 것은 종양 뿐이다. 마음의 종양이 무수한 정신병력, 분열증 혹은 강박증, 우울증······. 포괄적으로 말하면 화병이다. 수승화강이 안되면 불은 위로, 물은 아래로 각기 따로 놀기 시작한다. 불이 위로 치성해서 제멋대로 요동치는 것이 화병이다. 골병에서 화병으로! 종기에서 광기로! 이것이 우리 시대 문명생리학적 배치다.

  그렇다! 문제는 에너지고, 문제는 순환이다. 몸과 마음의 순환, 나와 타자의 순환, 나와 세계 사이의 순환······. 아무리 좋은 것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해도 그것들 사이에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것으로 전적으로, 말 그대로 100%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의 그릇되 언행이라고 나에게 인지된 것, 심지어는 잘못된 정치, 사회적 현상등 눈앞에 있는 모든 문제는 자신의 안쪽에 있는 문제이다. 도둑의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운명의 키는 자신 안에 있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법 또한 자신에게 있다. 서양의 의성 슈바이처는 말한다. "환자는 자기 속에 자신의 의사를 모시고 있다. 환자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원으로 치료받으러 온다. 그러므로 훌륭한 의사로서 우리가 할 일은 환자 속에 있는 의사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당연히 당연히 서비스의 화신이다. 거기다가 아빠까지 엄마처럼 해야한다? 엄마가 둘이나 되는 팔자라니, 사주명리학적으로 풀면, 인성의 태과다.

  만약 부가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면 부자들은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더 지혜로워야 한다. 형제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해야 하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도 충만해야 한다. 어이가 없다고? 그런 부자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고? 그렇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혜와 우애, 효성과 배려 같은 덕성을 가진 부자는 실로 드물다는 걸. 그런 덕성을 가진 사람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그 말은 부자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왠고하니, 이 우주에는 지혜도 없고, 나눔의 기쁨도 모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재다신약, 과다는 고립과 다를 바 없다. 하나의 오행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당연히 팔자의 모든 힘이 그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예컨대, 식상을 쓰지 못하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미국의 월가나 여의도 증권맨들이 햄버거,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돈이 많다고 식상의 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억대연봉인데 의식주 수준에선 노숙자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뭣하는가? 그걸 누릴 시간도, 체력도 없는데.

  재다신약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물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는 것이다. 과로사, 우울증, 혹은 자살 충동, 기타 등등. 들은 이야기기만, 한 벤처사업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500억 대박을 치고 승승장구하다가 50도 안된 나이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이런 것이 돈과 운명이 펼치는 한판승부다.

  이런 팔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명리학적으로는 간단하다. 먼저 곧바로 재성으로 가지말고 식상의 단계를 거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워밍업을 충분히 한 다음에 재성을 일구라는 것이다. 먹고, 떠들고, 끼를 발휘하고······. 이런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면서 돈을 벌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쉽사리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집을 나서면 위험하다고 여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길 위에는 위험만 있는게 아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운명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놓았다던가. 명리학으로 풀이하면, 팔자에는 도화살, 역마살, 백호살, 괴강상 같은 살벌한 '살'들이 우글거리는 한편, 천을귀인, 천덕합, 월덕합, 천문성등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우군들도 수두룩하다. 해서 길 위에서 살다보면 느닷없이 살도 맞지만 예기치않는 행운도 함께 누릴 수 있가. 어찌보면 인생은 '살들과 행운의 끊임없는 변주'라 해도 좋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돼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이 道다!"    

  고전이 전해주는 인생과 우주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이 끔찍한 예속상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까닭이다.

  독서란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토시하나 빼지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암송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탁월할 교육법이었다.

2023.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