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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대지성, 2023

햇살처럼-이명우 2025. 2. 22. 08:42

676. 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대지성, 2023

  "가장 적게 통치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다." 나는 이 좌우명을 진심으로 믿는다.

  정부는 국민에게 일종의 목총(木銃)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정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정부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복잡한 기계가 필요하고 또 그것이 작동하려면 내는 소음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정부들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시민을 적절히 강요할 수 있고, 심지어 시민이 알아서 스스로 강제를 가하도록 유도한다. 정말로 놀라운 기술인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는 스스로 어떤 사업을 촉진하는 일은 절대 하지않고 단지 그 사업에서 재빨리 몸을 빼내는 일에만 능하다. 정부는 국가를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하지 않는다. (······) 국민 성품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것을 정부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정부는 각 개인이 방해받지 않으려고 만들어 낸 편의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언급되듯, 정부가 국민을 간섭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둘 때 정부는 가장 편리한 조직이 된다.

  권력이 국민 손에 있을진대 그들 중 과반수가, 그것도 지속해서, 통치하도록 허용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이 정의롭다거나 소수에게 가장 공정할 것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물리적으로 가장 힘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모든 경우에 과반수 원칙이 적용되는 정부는 정의에 바탕을 둔 정부가 될 수 없다. 과반수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양심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정부는 있을수 없는가? 과반수는 편의성 법칙이 적용되는 그런 문제에 한정하여 결정내리게 할 수는 없는가? 시민은 순간이나 또 아주 세세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양심을 입법가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양심을 갖고 있는가?
  나는 우리가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 먼저 국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보다 법률을 더 존중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언제어디서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사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은 타당한 발언이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구성한 결사체는 양심을 가진 결사체가 된다. 법은 인간을 손톱만큼도 더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선의를 가진 사람들도 날마다 불의의 대행자가 되고 있다.
  법률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는 이런 것이다. 당신은 일렬종대로 늘어선 군인들을 본다. 대령, 대위, 하사, 사병, 소년 탄약병 등이 질서정연하게 언덕과 계곡을 통과해 전장으로 간다. 그들의 자발적 의사, 상식과 양심을 모두 거스르고 그렇게 행군에 나서는데, 그것이 아주 힘든 행군길을 만들어내며 병사들의 가슴은 헐떡인다. 그들은 자신이 저주받은 일에 관여하고 있음을 틀림없이 안다. 그들은 모두 평화로운 마음을 지녔다.

  대부분 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신체를 가진 기계로서 국가에 봉사하는 셈이다.

  모든 기계는 마찰이 있는데, 이 정부는 그런 마찰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좋은 일을 한다. 그러니 그런 정부에 대해 소동을 일으킨다면 큰 악이 된다. 그러나 그 마찰이 기계 자체를 잠식시켜 버려 억압과 강도행위를 방조할 정도라면 그런 기계는 더는 유지하지말고 내버리는 것이 좋다.

  투표는 서양장기나 주사위 놀음처럼 일종의 게임이다. 투표에는 약간의 도덕적 색채가 있어 도덕적 주제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놀이를 벌인다. 게임이니까 당연히 내기가 따른다. 하지만 투표자의 인격을 판돈으로 걸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투표를 한다. 그러나 정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면서 적극 개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의를 다수결에 맡기려는 용의가 있다. 따라서 투표의무는 편의성의 의무를 뛰어넘지 않는다. 심지어 정의를 위해 투표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정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않는게 된다. 그것은 단지 정의가 승리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미약하게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우연의 소관으로 돌리지 않으며, 과반수의 힘으로 승리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대부분 사람의 행위에는 미덕이 별로 없다. 마침내 과반수가 노예제 폐지에 찬성표를 던진다면, 그건 그들이 노예제에 무관심해졌거나, 그들의 투표로 폐지할 수 있는 노예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런 투표자 자신이 노예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자지 자유를 투표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 이런 사람의 투표만이 노예제 폐지를 촉진할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법률이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률에 따르면서 그저 만족해야 할까? 아니면 그 법들을 고치려고 노력하면서 성공할 때까지 복종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즉시 그 법률을 위반해야 할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 정부 아래서는 대다수 사람을 설득하여 그 법을 바꿀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만약 지금 즉시 저항한다면 결과로 나올 개선책은 지금의 악보다 더 나빠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선책이 지금의 악보다 더 나빠지는 것은 정부 잘못이다. 왜 정부는 좀 더 능숙하게 개혁을 예상하고 또 대비하지 못하는가? 왜 정부는 시민에게 정부 잘못을 지적하라고 종용하지 않고, 또 그런 잘못을 시정해 더 잘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는가?

  국가가 악을 구제하려고 내놓은 방법과 관련하여, 그런 방법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방법은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그 동안 개인의 한 평생은 끝나버린다. 나에겐 돌봐야 할 다른 일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좋든 나쁘든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해볼 수 없고 몇 가지만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걸 할 수 없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지사나 주의회에 청원을 제출하는 게 내 일이 아닌 것은, 주지사나 주의회가 내게 청원하지 않는 이유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내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 국가(정부)는 아무런 해결방법도 제공하지 못한다. 국가의 헌법 자체가 악인 까닭이다. 이것이 가혹하고 고집스럽고 비타협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으로 헌법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정신을 아주 자상하고 사려깊게 발휘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을 경련하게 만드는 탄생 및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변화는 더 좋은 쪽으로 지향한다.

  나는 6년 동안 주민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하룻밤 동안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2-3피트 두께의 단단한 감방 돌벽, 1피트 두께의 나무와 쇠로된 문, 빛을 부분적으로 차단하는 쇠창살 등에 둘러싸여 생각하노라니, 내가 단지 살과 피와 뼈를 가진 고깃덩어리인 양 나를 가둔 제도의 어리석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나를 이렇게 처분하는 것이 가장 잘하는 짓이라고 결론 내린게 틀림없었다. 나의 노력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정부에게 조금도 없었다. 나와 마을 사람 사이에 이런 담벼락이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만큼 자유로워지려면 뛰어넘거나 아니면 돌파해야 할 더 까다로운 담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나는 한 순간도 갑갑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감방벽은 공연히 돌과 모르타르만 엄청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의 모든 주민 중에 오로지 나만 제대로 된 세금을 지불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들은 나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고, 본 바 없이 자란 사람처럼 행동했다. 모든 위협과 칭찬에는 실수가 깃들게 마련이다. 그들은 나의 주된 소원이 한시바삐 감방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들이 내 생각에 단단히 자물쇠를 잠그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각은 아무 장애나 방해도 받지않고 그 사람들을 따라 감옥 밖으로 나갔으며, 실은 내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도달할 길이 없자, 내 신체를 처벌하기로 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애들 같았다. 앙심을 품은 어떤 사람에게 손을 댈 수 없으면 그의 개를 대신 학대하는 애들 말이다. 나는 정부가 모자라는 자 임을 알았다. 정부는 은제 숟가락을 가진 과부처럼 겁이 많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나마 갖고있던 존경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나는 정부를 가련하게 여기게 되었다.

  내가 불 속에 의도적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면 불을 상대로 혹은 그 불의 제작자에게 호소할 수 없고 오로지 나 자신의 잘못일 뿐이다. 만약 나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설득할 수 있다고 해보자.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들 상태에 만족하고 따라서 그에 합당하게 그들을 대할 권리가 있으나, 그들에게 내 요구와 예상대로 지금 현재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그들이 바뀌어야 마땅하다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만약 이렇게 설득할 수 있다면 나는 훌륭한 무슬림 혹은 운명주의자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만족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이처럼 정부에 저항하는 것과 이런 순전히 물리적인 힘 혹은 자연적인 힘에 저항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나는 정부에 저항함으로써 어느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처럼 바위, 나무, 짐승 등 자연 본성을 바꾸어 놓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

  정부가 개인을 한층 더 높고 독립적인 힘으로 인정하고, 그 힘으로부터 정부의 권력과 권위가 나오며, 또 개인을 그런 위상에 맞게 대우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명(開明)된 국가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국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스스로 기뻐한다. 그 국가는 모든 국민을 공정하게 대하고, 이웃 사람처럼 다정하게 대한다. 설사 몇몇 개인이 국가로부터 떨어져나가 초연하게 살고, 국가 일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에 수용당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이웃과 시민의 의무를 다한다면, 국가는 그런 개인이 국가의 안녕에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무르익는 순간 땅에 떨어지게 하면서, 한층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국가가 되는 방법을 여전히 준비하는 국가! 나는 이런 국가를 열심히 상상하지만, 아직 그런 국가는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다.

해제.
<월든> 조용한 절망을 깨뜨리는 도끼 - 이종인
  1845년 봄, 소로는 스승 에머슨의 만류에도 친지에게서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월든 호수  옆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자리잡은 땅은 에머슨의 소유지였으나 스승이 일시 사용을 허가했기에 작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거기서 소로는 손수 잣나무를 벌목해 호반에서 30m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 6일까지 2년 2개월을 혼자 살았다.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은 세 단계다. 첫째, 자연의 아름다운 물리적형태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둘째, 자연에 깃든 더 높은 법, 즉 영혼의 요소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기여함을 깨달으며,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움을 이성이 작용하는 대상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성의 아름다움을 일치시켜 자연형태가 더 높은 법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연과 언어의 관계. 에머슨.
1. 언어는 자연적 사건들의 기호(記號)다.
2. 구체적인 자연사건들은 구체적인 영혼사건들을 상징한다.
3. 자연은 영혼의 상징이다.

  <월든>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자연을 잘 관찰해야하고, 생활을 간소화하며, 자신의 독특함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월든>은 제1리얼리티(물질세계), 제2리얼리티(정신세계)로 대표되는 두 세계를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상적 체험이 벌어지는 자연세계와 그 세계를 뛰어넘는 정신세계를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말하면 하느님을 시장(市場) 한가운데로 모시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1+2=3이듯이 두 세계의 가장 좋은 부분이 서로 결합하여 제3리얼리티(초월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여행자-스포츠맨-사냥꾼의 세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데, 초월주의자의 행동이 다음 세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 나가는 방식과 조응한다.
  첫째, 그는 과거의 지혜로부터 가치있는 것을 배운다.
  둘째, 그는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그런 관계를 통해 윤리적인 진실을 발견하고 신성과 소통한다. 이 두 단계를 거치면서 초월주의자는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자신의 삶에 높은 교양을 부여하여 삶 자체를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변모시킨다.
  세째, 11장에 나오는 용맹한 사냥꾼의 단계로, 초월주의자는 지금깢의 생활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깨우치고 자아실현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한 후에는 사회 전체를 새롭게 하려고 사회로 귀환한다. 독서와 숲속 생활로 자신의 수양을 완료했으니, 이제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 문명생활로 되돌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7장 마지막 문장, "마침내, 1847년 9월 6일, 나는 월든을 떠났다."에서 '마침내'라는 부사는 깊은 언호(言外)의 메시지를 전한다.

1862년 5월 6일 45세의 일기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3.7.9. 일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