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였던 경허의 제자 중에 혜월慧月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까막눈으로 알려진 이 스님은, 그러나 천진불天眞佛로 불릴만큼 빼어난 고승이었다. 이 스님의 행장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은 네댓 살 넘은 동자승 하나를 데리고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이 동자승을 큰스님이라고 부르며 섬기고 있었다. 어디를 갈 때에도 혜월스님은 이 동자승에게 인사를 드리며 꾸벅꾸벅 절을 하곤 하였다.
" 스님, 다녀오겠습니다. "
그러면 동자승은 태연히 인사를 받으며 말을 하곤 하였다.
" 그럼 잘 다녀오게나."
어느 날 객승 하나가 이 절에 들러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실로 가관이었다. 당대 최고의 고승인 혜월 스님이 네댓 살도 안된 동자승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문안인사를 드리다니, 그 뿐인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동자승이 아닌가. 공양을 할 때에도 버릇이 없는 것은 물론 큰 스님을 자신의 시자처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힌 객승은 스님이 출타하기를 기다려 동자승을 불러다가 크게 꾸짖고 예의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엉엉 울던 동자승은 객승이 시키는 대로 예절을 배우고 혜월스님이 돌아오자 뛰어나가 두 손으로 합장하고 이렇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 큰스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 모습을 숨어 지켜보던 객승은 어린 동승에게 예절을 가르쳐주었다고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정작 혜월스님은 크게 놀라서 연유를 알아본 후 객승을 불러다가 꾸짖어 말하였다.
" 네가 그렇게 시켰느냐."
" 그렇습니다. 스님."
" 어찌하여 그랬느냐."
"너무 버릇이 없어서 예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혜월스님이 크게 한탄을 하며 말하였다.
"네가 마침내 천진을 버렸구나.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내가 큰스님(동자승)으로부터 천진을 배우고 있었거늘."
며칠 뒤 혜월스님은 그 어린 동자승을 다른 절로 보내면서 손수 산문 밖까지 배웅하며 다음과 같이 인사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 큰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불교에서는 천진天眞을 '불생불멸의 참된 마음'이라고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너희가 진실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천진이란 문자 그대로 '하늘의 진리'가 아닐 것인가. 모든 아이에겐 저 하늘에서부터 지니고 내려온 천상의 빛이 머물러있는 것이다. .......
워즈워드의 시처럼 ' 모든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는 요즘 큰스님을 모시고 도량에서 도를 닦고 있다.
- 가족 앞모습(최인호, 샘터,2009)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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