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64. 아리랑(1~12), 조정래, 해냄, 1994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히틀러정권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 유태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3,4백만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가 일제 식민지하 36년동안 학살당한 우리 동포의 수는 얼마나 될까? 나는 어림잡아 3,4백만을 잡고있다. 우리 동포들도 일제의 총칼 앞에서 3,4백만이 죽어갔다는 전제로 민족성원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한 학급에 60명이 손바닥을 다섯대씩 맞아야하는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60명 중 가장 아픈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정답은 '60번'이다. 왜냐하면 1번 학생은 제일 먼저 다섯대를 맞고 나면 매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 뒤의 학생들이 매를 맞는 동안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러나 60번 학생은 자기앞의 학생들이 맞을 때마다 59번의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이 답의 힌트는 우리 속담에도 있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
유태인들은 단 3년 동안 죽어간 것이고, 우리 동포들은 그 10배가 넘는 세월인 36년에 걸쳐서 죽어갔다. 어느 민족이 더 괴롭고 고통스러웠겠는가?
유태인들보다 10배가 넘는 공포에 시달리고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찌하여 아직까지도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죽어갔는지를 어림숫자도 모르고 있는가? 또 어찌하여 다른 민족인 유태인들의 비극은 마치 우리 일인것처럼 실감하고, 분노하며 독일군들을 증오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들의 비극에 대해서는 이야기 꺼내는 것을 역겨워하고, 지겨워하고, 망각하고, 기피하려 하는가?
유태인들은 그들의 수난을 극대화하며 자기네 민족의 자존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살아온 부끄러움을 저질렀다. 그러나 역사를 바르게 아는데는 시기의 빠르고 늦음이 없다. 민족은 영원하므로......
1994. 7 조정래, 작가의 말 4권
백성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이 글배우기를 싫어했거나, 아둔을 타고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글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 상것들은 절대 글을 익힐 수 없는 것이 수백년에 걸친 규범이었다. 그건 양반층이 자행한 횡포고 억압이었다. 양반층은 권력을 독점한 상태에서 일체의 세금만 안낸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를 세세만년 누리기 위해서 백성들을 무식한 바보로 만들어 마음데로 부려왔던 것이다. 4권. 55p
추석은 쌀 농사의 수확을 고마워하고 자축하는 명절이라면, 단오는 보리놓사의 수확을 기뻐하고 여름농사를 더 잘짓자고 힘을 모으는 명절이다.
「심을 모을라고 헌다고 모아지는 것이 아닌것이다. 바람이 불어야 구름이 모이고, 구름이 모여야 비가 오는 것 아니드냐. 때를 기둘려라.」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가 피바람이 아니면 머시고, 겁묵고 있는 사람들 맘속에 쌯이고 있는 분이 구름이 아니면 머시냐. 사람이 짐승하고 달른 것이 머신지 아냐!」
그건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아리랑>을 쓰기위해 취재에 얼중하고 있었던 90년 초반에 서너달 간격으로 외국신문사 기자 두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 어느 신문의 홍콩지국장이었고, 또 한사람은 미국의 《뉴스위크》기자였다. 그들은 한국을 한국을 종합취재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소설 <아리랑>을 쓰려고 하고, 그 내용이 일제 식민지하 36년을 다룬다는 것을 알게된 그들은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해왔다.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이제 용서할 만하지 않느냐」
「유태인들은 용서했는데 한국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이냐」
대충 이런 질문들이었다.
「독일은 수상 빌리 브란트가 전세계를 향해서 사죄를 했고, 유태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 사죄를 받아들여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독일과 정반대로 교과서를 왜곡하고,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계속 망언을 일삼고 있지 않는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것인가? 일본이 독일식의 용서를 빌지 않는 한 우리민족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는 민족적 동의를 고수할 수 밖에 없다. 그 동의에 충실하고자 나는 <아리랑>을 쓰는 것이다.」
내 대답에 그들은 동의했다.
......
해방50년, 우리는 용서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아야 한다.
1995년 4월 조정래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정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감히 민족통일의 역사위에서 식민지시대의 민족수난과 투쟁을 직시하고자하는 의도였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
다 깨어지는 때에 혼자 성키바랄소냐
금이야 갔을 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듯 단단한 속을 알리 알까 하노라
최남선의 시조아닌 시조는 친일파들이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세우는 <상황불가피론>, <책임회피>, <책임전가>가 얼마나 충실하고, 뻔뻔하고, 교묘하게 잘 나타나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60년대를 풍미하고, 7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친일파들의 자기변호를 넘어선 역습의 논리인 <그 때 조금씩이라도 친일 안한놈이 어디 있느냐>, <네가 그 때 살았으면 별 수 있었을 것 같으냐>, <너는 뭐가 잘났다고 그러느냐>, <이제와서 친일이고 뭐고 따지는 건 다 촌놈들 짓이야> 이런 언행들이 횡행하게 만든 바람을 이룬 것이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만! 2백자 원고지 2만매를 쓴다해도 내가 쓸 수 있는 수는 얼마인가!"
이건 <아리랑 집필계획>이란 종이 아랫부분에 빨간색으로 쓴 나 자신에 대한 경고문이었다.
10년 8개월
<태백산맥> 10권 1만6천5백장을 6년 동안에 썼고, 이제 <아리랑> 12권 2만장을 4년 8개월만에 마친다.
두 작품을 쓰면서 10년8개월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아리랑>을 마치며
2006. 11. 16 목 (수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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