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집단은 개인을 집단의 이해와 규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해.

햇살처럼-이명우 2011. 9. 21. 09:01

집단은 개인을 집단의 이해와 규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해.

 

한 예로 같은 문명에 속하는 사람들을 봐. 문명이라고 부르는 '의도적 왜곡'속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거지. 한 문명이 존중하는 질서와 규범은 다양한 기준과 시각을 허용하지 않아. 다양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야. 가치 중립적인 것들이 태반이지. 그런데 실제로는 선악의 범주로 판별되는 사례가 아주 빈번해.

  우리가 '다르다'고 말할 때 그 속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어. 옳고 그름도 없어. 예를들어 개는 원숭이와 다르고 사람과도 달라. 그것은 옳고 그름도 아니고 선악의 문제도 아니야. 그냥 다르다는 것이지. 그런데 우리는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는 말과 혼용해 쓰고 있지. "나는 너와 틀려" 이런 식으로 말야. 나는 이런 혼용이 다름을 틀림이라는 선악의 잣대. 옳고 그름의 잣대로 사용하고 있는, 무의식을 가장한 잠재된 의도라고 생각해.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고 인식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성이란 것은 존재할 수가 없어. 흑백만이 존재하지.

  중립이나 불편부당이라는 좋은 말이 있기는 해. 그러나 그것은 곧잘 회의주의나 또 다른 야합으로 간주되기도 한단 말이야. 집단은 개인에게 태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지. 흑 아니면 백, 친구 아니면 적, 집단의 규범과 기준에 일치하면 선, 그렇지 않으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위험으로 간주되지. 그래서 개인은 집단 속에서 자신으로 남기가 어려운 거야.

  그러나 흑과 백 사이에는 회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그 사이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빛깔들이 존재해. 빨,주,노,초,바,남,보로 대표되는 모든 가시적 색상이 바로 흑과 백 사이에 있지. 우리는 흑백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아. 우리는 총천연색 칼라의 시대에 살고 있어. 나는 이것이 바로 빛이 있는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믿어.

  나는 우리가 흑백의 시대를 분명히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이 타고난 빛깔을 더욱 선명하게 해야 한다고 믿어. 붉은 빛은 더욱 붉어지고, 푸린 빛은 더욱 푸러러져야해. 맑은 날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빛깔들이 자신들의 색으로 빛나기 때문이지. 바다는 바다색으로, 산은 산 색으로, 하늘은 하늘 색으로 공존하기 때문에 눈부시게 찬란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야. 원래 타고난 빛깔을 덮고 있는 지저분한 오염을 닦아내면 자신의 고유한 색과 빛이 더욱 고와지지.

  나는 이것을 자기 수련의 진수라고 생각해.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로 이해하지 않는 정신적 자유가 없다면,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바로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이며 서로를 보완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케스트라를 이해할 수 없게 돼. 이 훌륭한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이야.

  나는 자신의 빛깔로 빛나지 않으면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들만의 빛깔로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수평적 관계의 초석이라고 믿어. 즉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수평적 충성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칙이라고 생각해.

 

  - 사자같이 젊은놈들(구본형,김영사,2002) 중에서 -

 

2011. 9. 21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