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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십자군 이야기1,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2

햇살처럼-이명우 2015. 11. 9. 20:15

482. 십자군 이야기1,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2

 

제1장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카노사의 굴욕

성전을 호소하다

십자군의 탄생

은자 피에르

제후들

툴루즈 백작 레몽드 생질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 디 알타빌라

제2장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제3장 안티오키아로 가는 긴 여정

제4장 안티오키아 공방전

제5장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제6장 성도 예루살렘

제7장 십자군 국가의 성립

 

  역사상 동로마 제국이라고 불리는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대국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동쪽 절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세력에 눈깜짝할 사이에 침략당해, 제국 안에서도 특히 풍요로운 지역인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을 잃었다. 게다가 11세기 말인 이 시기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작은 배로도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소아시아까지 이슬람세력이 육박해온 상황이었다.

  같은 그리스도교도이면서도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그리스 정교회와 카톨릭교회는, 이슬람 세력이 수도에서 사흘거리까지 육박해오자, 교리해석의 차이 따위를 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이기도 한 비잔틴 제국 황제는 카톨릭 교회 수장인 로마교황에게 원군 파견을 정중히 요청했다.

  11세기 말, 로마 교황자리에 앉아 있던 이는 카톨릭교회의 개혁파를 자처하던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우르바누스 2세 였다.

 

  샹파뉴 지방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이 프랑스인은 랭스에서 자라고 클뤼니 수도원에서 수학했다. 일찍부터 수도원 고위층의 주목을 받아온 젊은이였는지, 수도원장이 로마로 갈 때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 때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알게 되었다. 교황도 이 영리하고 젊은 수도사가 각별히 마음에 들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 자신도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 후 젊은 수도사는 프랑스가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경력을 쌓게 되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서른 여섯살에 로마 근처 우스티아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그 후에도 자주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황제와 왕, 유력한 제후와 교섭을 담당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된 것은 1088년, 마흔 여섯살 때였다. 그로부터 7년 후 이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십자군 원정이 제창된다.

 

카노사의 굴욕

  1077년 황제(하인리히)가 행한 인사(人事)에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이 반대한 것이 발단이었는데, 교황은 자신의 반대를 무시한 황제를 바로 파문에 처한 것이다.

  파문의 위력은, 파문당한 자와 관계를 지속하면 그 사람도 파문당해 그리스도교의 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었다. 당연히 가신과 병사들은 파문당한 주인을 떠난다. 즉 파문이란 사회로부터 전면적인 추방을 의미했던 것이다.

  젊고 혈기가 드센 하인리히도 한 동안 버텼지만 끝내 항복한다. 독일에서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황제는 교황이 체제 중인 카노사 성 앞에 섰다.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 답게 얇과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을 맞으며 내내 맨발로 서 있었다.

  카노사의 성은 이탈리아 중부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으며 개혁파의 지지자로 알려진 마틸데 백작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성안 큼직한 난로에는 불이 기세좋게 타오르는 따뜻한 거실에서 승리감을 만끽하는 쉰 일곱살의 교황, 한 편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눈 속에 홀로 서 있는 스물일곱살의 황제.

'카노사의 굴욕'은 서유럽 전역의 그리스도교에게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 되었다. 파문은 풀렸으나 교황의 완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그 후 황제 하인리히에게 내몰리어 결국 도피처 살레르노에서 죽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이은 교황은 빅토르 3세였는데 그도 2년만에 죽고,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우르바누스 2세다. 1088년 봄. 교황이 된 우르바누스 2세는 46세였다.

 

  1095년 53세의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대성당 앞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에게 호소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해 너희 형제를 공격하고, 죽이고, 납치해 노예로 삼고, 교회를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은 곳은 모스크로 바꾸고 있다. 그들의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된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 맞서 일어설 때이다."

  "이 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 곳에서 목숨을 잃는다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어제까지 도적이었던 자가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고, 형제나 친지와 다투던 자가 이교도와 의 정당한 싸움터에서 그 분노와 원한을 풀 날이 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푼돈을 받고, 하찮은 일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자도, 이제부터는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가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 될 것이다. 출발을 미뤄서는 안된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곧장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는데로 동방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 신이 바라시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감동했다. 군중 사이에서 자연스레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라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그 커다란 함성 속에서 한 사람이 막 연설을 끝낸 교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원정에 참가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이렇게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오리엔트 원정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이 때 정해진 것은 3가지 였다.

  1. 그리스도 교도들끼리는 곧바로 '신의 휴전'에 들어갈 것.

  2. 십자군은 모두 가슴이나 등에 붉은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붙일 것. 

  3. 동방으로 출발일은 1096년 성모 승천일인(8. 15일)로 할 것.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은 옷 위에 붉은 십자 표시를 붙이도록 했는데, 십자는 십자가를 의미하므로 그리스도교도라는 것을 나타내고, 붉은 색은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릴 각오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십자군'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일신교의 '순례'에는 속죄, 즉 나날이 생활에서 범할 수 많은 죄를 순례를 통해 한꺼번에 씻는다는, 쉽게 말하자면 '장부에서 지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신도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임무인 셈이다. 그리스도 교도는 이러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고, 이슬람교도는 메카로 향한다. 그러므로 중세의 그리스도 교도에게는 십자군 원정도 순례행이었다. 다만 무력행사가 따르는 순례행이었다.

 

공후백자남

 

  여자란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있고 신뢰할 수도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다.

 

1차 십자군의 주역

틀루즈 백작 레몽과 대리인인 아데마르 주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 보두앵,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와 그의 조카 탄크레디

 

이슬람의 유럽인 호칭 '프랑크 인' 프랑크 인의 이슬람인 호칭 '아랍인' 코란이 아랍어로 씌여져 있기 때문에

 

동방이든 서방이든 당시 사람들의 바람은 몸의 안전을 보장하고 세금을 적게 걷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만 보장해준다면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1078년 '카노사의 굴욕'의 주역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눈이 내리는 가운데 카노사 성 바깥에 사흘 밤낮을 세워 놓았는데, 로마 교황의 지위와 권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과시했다. 그런 그도 다음 해부터 죽을 때까지 그레고리우스 7세는 라테라노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망길에서 죽었다.

 

이스탄불 : 콘스탄티노플(영어로 콘스탄티노플)을 터키식으로 읽은 것이다.

 

종교지도자 칼리프(↔교황) 두 명(이집트 카이로, 바그다드)

카이로에 있는 칼리프는 파티마 왕조 계열로, 시아파 우두머리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는 아바스 왕조, 수니파의 우두머리

세속의 일인자는 술탄 ↔황제, 왕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두 명의 비범한 지휘관 보다 한 명의 평범한 지휘관을 택하겠다고 한 것은 나폴레옹이지만, 지휘계통의 일원화는 가지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피사, 아말피, 제노바,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해양도시 국가

'이코노믹 에니멀' 「바다의 도시 이야기 」

 

십자군의 주역 - 고드프루아, 보에몬드, 레몽

 

'손 안의 타버린 석탄'

 

탄크레디

 

23년 동안 십자군 국가 확립, 에데사 백작령, 아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등 말하자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연방국가가 명확한 형태로 성립된 것이다.

 

2012.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