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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2

햇살처럼-이명우 2015. 11. 9. 21:35

484.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2

아버지의 죽음으로 헨리는 영국왕위에 오른다. 엘리오노르는 영국 왕비가 되었다. 프랑스 왕비에 이어 영국왕비가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가치가 있는데, 엘레오노르는 광대한 아키텐 지방의 영주이기도 했다. 프랑스 왕의 직할령보다 훨씬 넓은 아키텐 지방이 고스란히 프랑스 왕게게서 영국왕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슬람교도의 성지 1. 메카, 2. 메디나, 3. 예루살렘

프랑스 인이 주체가 된 템플기사단, 유럽 각 지에서 모인 종교기사단, 독일인으로만 구성된 튜턴기사단

뛰어난 무장은 미리 생각한 전술대로 상황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적당한 파도가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올라탈 줄 안다. 리처드는 그랬다.

아코에 입성한 리처드는 피사와 제노바의 남자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서로 협력하여 뭔가를 이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만큼 귀한 것도 없고, 단결만큼 명예로운 것도 없으며, 융화와 조화만큼 감미로운 것도 없다. 반대로 적대의식 만큼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없다. 적대의식은 단결을 무너뜨리고 자기편 사이의 존경심을 잃게 하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지애로 묶이고 서로에 대한 존경시미으로 강화된 조직도, 시기와 질토라는 감정적 충동만으로 와해될지 모르는 일이다."

'석궁(ballistra)'은 '활(acro)' 과 달리 일단 화살을 명중시키면 엄청난 살상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적의 석궁수가 최전선에 있는 리처드를 노리고 쏜 것임에 틀림없는 그 화살은, 강철 갑옷이나 투구도 뚫을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리처드는 결국 며칠 후 숨을 거두었다. 1199년 4월 6일, 41세7개월의 생애를 마감하는 죽음이었다.

리처드의 시신은 영국에 없다. 죽은 후 곧장 머리는 푸아티에 지방 수도원에, 심장은 노르망디 지방 루앙의 교회에, 그 외 부분은 앙주 지방의 수도원에 나누어 매장했기 때문이다. 여러 곳의 영지를 지낸 왕의 시신을 해체하는 목적은, 우선 죽은 후에도 영지의 소유권이 그에게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동시에 해당 영지의 백성들에게 자기 지역에 왕의 묘가 있다는 만족감을 안겨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리처드가 죽은 지 5년 후 어머니 엘레오노르도 세상을 떠났다. 다시 1년 후인 1205년에는 켄터베리 대주교, 리처드의 맹우이자 솔즈베리 주교였던 휴버트도 숨을 거둔다.

리처드가 '사자심왕'이라면 그 뒤를 이어 영국 왕이 된 존은 '실지왕(失地王) 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는다. 그가 왕위에 있던 17년 동안, 형 리처드가 프랑스 왕에게 탈환한 지방의 대부분을 다시 필리프에게 빼앗겼다.
필리프(43년간 재위, 1223년 사망)는 리처드 사후에도 24년을 더 살았다. 프랑스 인은 이 필리프 2세에게 고대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오귀스트(존엄왕)'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두 사람은 장수했다는 것과 전투에 서툴렀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듯 보니지만, 프랑스인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중앙집권으로 이끈 최초의 왕이므로 '오귀스트'라 칭할 만 할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와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가 각각 종교와 정치, 문화 부문에서 르네상스 운동의 첫번째 주자라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의 출발을, 중세사상의 화신이나 다름없던 교황 인노켄티우스가 도운 것이다.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자신이 하는 일에 의심을 품지 않는 탓에 자신과 다른 발상을 하는 사람의 진의를 상상하지 못한다.

베네치아는 복식부기를 발명한 나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든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 유능한 경제인 특유의 치밀함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그들 육체에 흐르는 피와도 같았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기도 했다. 공표하면 국익을 해칠 것으로 판단될 경우다.

주로 프랑스 출신 일반 기사로 구성된 '템플기사단'은 흰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를 모은 '병원기사단'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십자가.
독일 기사들로만 구성된 '튜튼 기사단'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십자가.

이슬람교도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를 한데 뭉뚱그려 '프랑크 인'이라 불렀듯이,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는 아랍인, 주로 북아프리카에 많은 배두인, 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 등 모든 이슬람교도를 가리켜 '사라센 인'이라고 불렀다.

43년간 왕위를 지킨 프랑스의 필리프 2세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 교도의 칼리프'라고 했다.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수니파를, 카이로에 있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는 시아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직시해야만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모스크의 첨탑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펴졌다.

 

"모든 신도의 어머니인 로마 교회는, 순종적이지 않은 아들의 귀환일지라도 진심어린 자애의 정으로 맞이한다. 황제가 바른 길로 돌아왔으니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금까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나날을 잊고, 이제 광명과 평온이 가득할 것이다."

 

'맘루크'는 일반적인 의미의 '용병'과 다르다. 노예시장에서 팔려 병사로 육성된 남자들이다. 따라서 부족 출신은 다양하지만, '전(前) 노예'라는 뜻의 '맘루크'는 어쨌든 무기를 받아 싸우는 것이 존재의 전부인 이슬람교도였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끊임없는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반면 그리스도교도 기사는 신을 위해, 주군을 위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경하는 여인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762년에 아랍인이 건설한 이슬람. 아랍세계의 수도였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신의다. 다시말해 약속한 것을 지키는 자세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깨는 상대와는 협정을 맺어봐야 소용없지만, 달리 방책이 없으면 그것에라도 매달리게 마련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 중세 중기에 해당되는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서술할 때 빼놓지 않는 세가지 사건이 있다.

'카사노의 굴욕'

'십자군 원정'

'아비뇽의 유수'

'카노사의 굴욕'이란 1077년 로마교황에게 파문을 선고 받은 속계의 최고 권력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2세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 교황(그레고리우스 7세)이 머무르고 있던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눈이 퍼붓는 성 밖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사흘 밤낮을 서 있었던 사건이다.

'십자군 원정'은 로마교황 우르바누스2세가 프랑스 중부의 클레르몽에서 선언한 1095년에 시작되어, 1291년 아코가 함락될 때까지 8차에 걸쳐 진행된 역사상의 일대 운동이다.

'아비뇽 유수'는 미남왕 필리프 이래로 70년 동안 프랑스 왕들이 역대 로마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한 일이다. '유수(幽囚)'라지만 감옥에 들어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기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비뇽은 시가지 전체가 프랑스 왕의 감시를 받았고, 그 도시에서 살던 교황이 죽은 뒤 교황을 정하는 교황선출 콘클라베도 아비뇽에서 열렸으며, 프랑스 왕의 뜻대로 프랑스 태생 성직자가 교황으로 뽑히는 일이 7대째 이어졌다. 그 사이 로마의 교황궁 라테르노 궁은 주인을 잃었으며,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열리는 미사도 주최자가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카사노의 굴욕'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교황의 극단적인 권위 실추였다. 그리고 '카노사의 굴욕'과 '아비뇽의 유수' 사이에 '십자군 원정'이 끼어 있는 것이다.

 

2012. 10. 7 일요일 오혜민 결혼식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