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쇼펜하우어, 삼성출판사, 2006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인간은 살아가는 한 자신의 노화를 감당해야 한다. '원래 없던 것'을 얻으면 그것은 의미를 알게 되지만 '가지고 있던 것'을 잃으면 아쉽고 힘들 뿐이다. 사람은 나빴다가 좋아지는 것에는 잘 적응하지만 좋았다 나빠지는 것에는 적응하기 어렵다.
충족해야 할 욕망이 있을 때 인간은 삶에 대해 의욕을 느끼게 된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새가 날 수 없듯이,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려고 한강 다리에 서 있는 사람을 깜짝 놀래키면 죽을 뻔 했다고 펄쩍 뛴다고 한다.
"현재를 마음 편히 아무 걱정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물이 현명하다." 동물은 즐거움이나 공포, 슬픔을 미리 앞당겨 느끼지 않지만 인간은 미리 앞당겨 느끼기 때문에 즐거움은 반감되고 공포나 슬픔은 배가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날을 그리워하거나 앞날의 행복을 기대하느라 현재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은 늘 기대한 것에 못미치게 되고 괴로움은 늘 예상보다 큰 아픔을 준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게 되는대로 보고서는 그것이 세상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친구와 내가 머릿 속에 그리는 학교 앞이 다르다'는 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학교 앞 거리에 대한 친구의 표상과 나의 표상이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다. 표상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다.
세계이 본질은 의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적인 의지의 움직임이 표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관찰하지 않고는 인간은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그 의지의 맹목성을 잘 알고 그로 잇해 다치지 않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충분근거율 '인간이 그렇게 파악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원리' 네 가지 뿌리 ( 생성의 근거율, 존재의 근거유르 인식의 근거율, 행위의 근거율)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현상에 대한 인식만이 가능하다. 사물이 있는바 그 자체(이를 칸트는 '물 자체'라고 칭했다)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우리의 인식형식, 인식능력, 즉 지성의 제약 아래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만 인식하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성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표상하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은 표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인간의 가청주파수는 60Hz에서 20,000Hz이다. 16Hz 미만의 소리는 고막이 울리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하고,20,000Hz 이상은 고막이 터지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듣지 못한다고 해서 16Hz 미만의 소리나 20,000Hz 이상의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귀신의 영역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이 닿지 못해서 파악이 안되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문제는 칸트에서 정리가 된 부분이다. 칸트는 신에 대해서는 지식이 가능하지 않고 단지 신앙만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지 지식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의 영역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나는 범위이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지식의 차원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거나 믿지 않는 것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 중에 동기를 갖지 않는 행위는 없다. 동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행위는 있을지라도, 동기없는 행위는 없다. 의욕은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의욕은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의욕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가 나의 마음에 드러난 것이다. 이 의욕이 행위의 동기를 이루어서 인간은 행위를 하게 된다.
'자연 속에 있는 힘' '모든 사물의 내적인 원리'에 대한 칭호로써 '의지'의 개념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강제로라도 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에는 그 잠깐의 휴식이 아쉬워서 더 쉬고 싶어진다. 이 휴식은 아주 꿀 맛 같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하루 종일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그러한 꿀맛과 같은 휴식을 느끼지 못한다. 찬물의 시원함은 여름 날 뜨거운 햇빛 아래서 열심히 일하다가 마실 때 느끼게 되는거지, 냉방이 잘 되는 사무실에서 느끼기 어렵다. 요점은, 아쉽기 때문에 뭐든 좋아 보이는 것이고, 아쉽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리 좋아보이는 것도 중요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가가 여가다우려면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노는 것에 가장 시큰둥해야 하는 사람은 백수다. 그 사람에게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일과 여가가 구분이 안되고 그리하여 놀이가 놀이로써 의미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열심히 해야 노는 것도 재미있어 진다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도 어느새 시큰둥해져 버린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경우에도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
만족과 동시에 소망은 없어지고, 소망이 없어지면 기쁨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만족이나 행복은 어떤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것은 아니다. -58절-
행복은 불행을 그 이면으로 하고 있다. 충분히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충분히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그러니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불행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201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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