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以時習之 不亦說乎

자산보다 소득이여[퍼온글]

햇살처럼-이명우 2016. 4. 8. 17:11


아흔 살인 할머니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매달 50만원만 주는 사람이 있으면 죽은 다음 살던 집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집값은 1억 원입니다. 받아 들이겠습니까? 지금 할머니 나이는 평균수명보다 훨씬 많습니다. 할머니가 앞으로 1년을 살면 600만원, 2년을 살면 1,200만원만 내면 됩니다. 설령 할머니가 1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총 비용은 6,000만원으로 집값 1억 원에 한참 못 미칩니다. 이렇게 보면 썩 괜찮은 제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거래 상대방이 잔느 칼망(Jeanne Calment)이라면 애기가 달라집니다. 1960년대 중반 프랑스 남부 아를 지방에 살았던 잔느 칼망은 동네에 변호사에게 살던 아파트를 팔기로 했습니다. 매매조건이 조금 특별했습니다. 변호사는 잔느 칼망이 살아 있는 동안 매달 2500프랑을 지불하고, 대신 그녀가 죽은 다음 소유권을 넘겨 받기로 했습니다. 당시 잔느 칼망 할머니의 나이는 90세였고, 변호사는 47세였습니다. 계약조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웠습니다. 별다른 소득이 없는 잔느 칼망 할머니 입장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매달 일정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어 좋고, 변호사는 크게 목돈 들이지 않고 싼 값에 집주인이 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변호사의 머리 속엔 아흔 살 된 잔느 칼망이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느냐는 계산이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1995년 변호사가 77세에 사망했을 당시 잔느 칼망은 12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변호사는 무려 30년 동안 매달 2500프랑(현재가치 50만원)을 꼬박꼬박 지불했지만 집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낸 돈을 전부 합치면 집값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결국 변호사가 죽은 다음 가족들이 계약을 물려받았습니다. 어찌됐든 그들은 주택 소유권을 넘겨받으려면 잔느 칼망이 사망할 때까지 매달 약속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잔느 칼망은 변호사가 사망한 다음 2년을 더 살다 1997년에 122세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장수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결국 변호사는 싼 값에 집을 산 게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그녀의 집에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어리석었던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순 없습니다. 그는 평균수명을 근거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재수가 없었던 탓일까요? 문제는 거래 횟수에 있습니다. 만약 변호사가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아흔 살 된 할머니와 같은 조건으로 거래를 반복해서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이득을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뿐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개인이 몇 살까지 살지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생설계나 노후준비를 할 때 앞서 변호사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곤 합니다. 필자는 직장인이나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노후준비 강의나 컨설팅을 할 때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으로 예상하느냐" 는 질문을 자주합니다. 이때 마다 남자들은 보통 여든, 여자들은 여든 다섯이 되면 죽을 것 같다고 답하는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아무래도 평균수명에 근거해서 이 같이 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4년에 출생한 신생아의 기대여명은 78.99세, 여자는 85.48세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대여명이란 말과 평균수명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많이 사용하는데, 이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기대여명이란 특정연령에 도달한 사람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생존할 수 있는가를 나타냅니다. 이때 갓 태어난 0세인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나타냅니다. 엄밀히 말하면, 평균수명이란 0세인 아이의 기대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퇴직자 입장에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노후자금 인출 계획을 세우려면 평균수명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여명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통상 영∙유아 사망률이 다른 연령에 비해 높은 점을 감안하면, 성인들의 기대여명은 단순히 평균수명만 가지고 계산한 것보다 더 깁니다. 예를 들어보자. 60세 한국인의 기대여명은 25.14세입니다. 지금 예순인 사람은 평균 85.14세까지는 산다는 얘기입니다. 평균수명(82.40세)과는 2~3년 차이가 납니다.

자신의 기대수명에 맞춰 노후자금을 전부 소진해버리면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서 60세 한국인은 평균 85세까지는 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60세인 사람이 모두 85세가 되기 전에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통계청의 연령별 사망확률을 보면 85세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 절반(50.3%)이 넘습니다. 60세 은퇴자들이 기대수명에 딱 맞춰 노후자금을 빼 쓰면 죽기 전에 돈이 먼저 떨어져 파산하는 사람이 절반은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대여명이란 특정 연령의 집단 구성원의 사망연령을 평균을 낸 것일 뿐입니다. 보험회사에서는 이 같은 평균수명을 이용해 연금상품을 만듭니다. 재수없는 변호사와는 달리 보험회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목숨을 대상으로 베팅을 합니다. 잔느 칼망처럼 오래 사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연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보험회사 입장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균보다 일찍 죽은 사람이 덜 받아간 돈으로 이를 보충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단의 평균을 구하는 것과 개인의 수명을 예측하는 것은 다릅니다. 평균은 어디까지나 평균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정확히 기대여명까지만 살다 죽지는 않습니다.

실내수영장에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마침 그곳에선 경품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수영장을 가로질러 건너기만 하면 상금으로 금 1냥을 준다고 합니다. 실내수영장의 평균수심은 1.2m입니다. 당신은 수영을 못하고 다른 안전장비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나요? 이 같은 제안을 하면 별로 주저하지도 않고 "건너가겠다"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바닥도 훤히 드려다 보이는데다 수심도 고르기 때문에 조심조심 건너면 별탈 없이 금 1냥을 손에 쥘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실내수영장이 아니라 저수지를 건너면 금 1냥을 준다고 해봅시다. 저수지의 평균수심은 똑같이 1.2m이고 다른 조건 역시 동일합니다. 건너가겠나요? 이번엔 꽤나 망설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저수지는 바닥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실내수영장처럼 수심도 고르지 않습니다. 평균수심이 1.2m 밖에 안 된다고 해도, 자기 키보다 깊은 곳이 어디 한 곳이라도 있기라도 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실내수영장과 달리 저수지를 건널 때는 평균수심보다는 최대 수심에 대한 정보가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균수명이 85세인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60세 은퇴자가 모두 85세에 사망하지는 않습니다. 60대 초반에 죽는 사람도 있고, 100세 이후에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실내수영장이 아니라 저수지를 건너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을 때 이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에 그런 뜻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얼마나 살다 죽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수명예측의 어려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평균에 딱 맞춰 노후자금 인출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라, 기대보다 오래 살 때도 대비해야 합니다. 평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아야 합니다. 

잔느 칼망을 보면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은퇴자가 자산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택매매계약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매달 2500프랑의 현금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평균수명의 잣대를 가지고 드려다 보면 이 계약은 손해가 났으면 났지 절대 이익이 될 리가 없어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녀가 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대보다 오래 살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아서입니다. 죽고 난 다음 집 한 채 덩그러니 남겨놓기보다는 살아 있을 때 생활비 걱정을 더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주택연금에 가입하지 않았을까요? 100세 시대를 살아가려면 소득이 없는 자산을 소득원으로 바꾸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자산보다 소득입니다.
글 :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