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以時習之 不亦說乎

움직임과 쉼에는 다 양생하는 바가 있다[動息皆有所養]

햇살처럼-이명우 2016. 4. 16. 21:17

우리가 생활 속의 1분, 1초를 즐겁게 누려야 하는 이유는, 인생이란 것이 본래 무수한 일상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근할 때나 길을 건너는 매 순간이 다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모두 삶의 풍경이고 생명 속에서 고동치는 음표임을 

인식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로 마음에 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긋하게 일을 처리할 시간을 줄여 그 시간에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는 데에는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의 일을 끝내는 동시에 또다시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고, 

연이은 일에 파묻혀 자신을 잊게 되고 말 것입니다. …

문제는 우리가 생활을 향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향유할 마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발걸음을 생명의 리듬에 맡기고 일거수일투족을 그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움직임과 쉼에는 다 양생하는 바가 있다[動息皆有所養].”는 말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려는 사유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자신이 정당치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결코 인식하지 못합니다. 강렬한 욕망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일련의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심지어 이런 잇속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자기 욕심을 차리는 행위를 자신의 인생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합당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목적을 이루면 기뻐하고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낙담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무시하고 또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거나 

반성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런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생각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의 사유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해 온 사유 패러다임을 분명하게 평가하고 검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은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생기지만, 남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한 개인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 허망한 생각을 벗어나 진정 자신의 활발한 천성에 속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진성眞誠을 발현하여 자신의 진실한 본성에 비추어 행동하고 일할 것입니다. 이는 사실 아주 간단하고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이때가 되면 타인을 대하는 감정과 태도는 마치 영혼의 계곡에서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어떤 보탬이나 과장 없이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게 될 것인데, 이런 것이 진정한 ‘진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자아를 대면하고 해부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필요와 도덕 규범의 각도에서

 ‘진성’하라고 교육하기만 한 까닭에 결국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빗나갈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치우침이 있으면 외재된 언행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저지르는 많은 잘못은 우리가 아둔해서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체하다가 저지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업을 이루고 이름을 날린 많은 영웅호걸들이 세상 누구와 비길 수 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종종 순간의 부주의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하거나 심지어 패가망신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대부분 수준 낮은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을 잘못을 

영웅호걸이란 사람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총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련의 탐욕스런 마음이 고개를 들고 장난을 쳤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경외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연약하고, 무능하며, 

초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수시로 고도의 경각심을 갖고 그때그때 경험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여 완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의 결함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면 이는 우리가 자신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신의 생명의 잠재력을 소중하게 여겨, 

생명으로 하여금 창조적 활동 속에서 빛을 내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기에 부끄러운 일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본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신비함을 창출할 수 있는데도 도리어 자신의 한계에 의해 훼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모든 생명 곧, 

다른 나라 사람, 동물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합태화保合太和, 내리정乃利貞’(《주역》) 

즉 태화의 원기가 융합 보전되고 만물이 조화롭고 바르게 성장하려면 다른 모든 생명과 동고동락할 정신이 있어야 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주변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도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 사이에 솔직함과 성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사귀면서도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지를 배우게 되었고, 

효과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현대인은 일시적인 자유를 추구할 뿐 감정의 진중함과 깊이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얄팍한 감정 게임을 하면서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깔보면서 동시에 항상 자신을 깊은 미망과 초조함 속으로 빠트립니다. 

특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따뜻한 보살핌을 필요로 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감정적으로 남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남들이 자신을 100퍼센트 책임지길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를 지켜낸다는 것(펑차오후이, 위즈덤하우스, 2014)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