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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역사철학 강의, 헤겔, 삼성출판사, 1989

햇살처럼-이명우 2018. 9. 3. 12:52

532, 역사철학 강의, 헤겔, 삼성출판사, 1989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8.27.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공국의 재무관, 어머니는 헤겔이 14세 때 죽었는데, 탁월한 교양을 갖춘 부인이어서 헤겔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에 철학강의를 개설했으나 수강생 미달로 폐강되었다. 이유는 바로 헤겔의 강의가 너무 인기있었기 때문이다.


해제

헤겔은 역사의 밑바탕을 '세계정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계정신의 현실성은 자유와 이성의 관심을 구현하고 있는 각종의 행동이나 경향이나 노력이나 제도 안에 존재한다.


'어떠한 소재 안에 이성의 이념은 표현되는가!'

세계정신은 자유의 실현에 힘쓰고, 따라서 자유는 참다운 영역, 즉 국가에 있어서만 자기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어서 세계정신은 말하자면 제도화 되고, 각국에 있어서 세계정신은 자기를 의식하고, 이 자기의식을 통해서 역사법칙은 활동하는 것이다.


헤겔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과 몰락이라는 말하자면 유럽의 역사가 크게 전환하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독일에서 살았다(......) 청년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나 칸트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사상적으로는 '이성'을 중시하여 구 사상을 타파하려는 계몽사상이나 민주적 공화주의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신 시대의 정신과 민족의 존재방식을 탐구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주의 연방체제 밑에서 내면적 자유를 중시하고 복종만 있을 뿐이라는 생존방식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독일인에게 있어서는 실로 충격적이고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머리말

이백년 동안 행해진 역사철학 연구는 저자의 입장에 따라 상이하고, 또 그 저자의 국민성에 따라서도 상이하지만, 대개의 경우 역사철학의 참다운 완성자라고 하기보다는 그 소재를 단지 암시해주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었다. 왜냐하면 철학은 현실에 있어서 신을 밝혀주는 것인데 대해서 신지학(神智學)은 일체의 사건을 신으로 환원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철학에서 그 신지학을 추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역사고찰의 종류
1) 근본적 역사

2) 반성적 역사 - 일반사, 실용적 역사, 비판적 역사, 전문적 역사

3) 철학적 역사(역사철학)


1) 근본적 역사 - 이 역사를 기술한 역사가들의 서술은 자기가 눈 앞에서 보고 자기 자신도 하나의 역할을 한 바 있는 행위, 사건, 정세에 한정되어 있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등등

2) 반성적 역사 - 역사의 서술이 '특수한' 시대에 한하지 않고, 현재 '시대'를 초월해서 정신에 관해 시도되는 역사이다.

3) 철학적 역사, 역사철학 - 역사의 사유적 고찰 이외의 다른 아무런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원래 우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유한다는 것을 중단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들은 동물과 구별되며, 감각에 있어서나 그것이 인간적인 한, 거기에서 사유가 포합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유를 인증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불충분한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역사에 있어서는 보통 사유는 소여(所與)와 존재자(存在者)에 종속하는 것이고, 그것을 자기의 기반으로 삼고 그것에 의해서 인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여 철학의 본바탕을 이루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사변(思辨)에 의해서 사변 그 자신 안에서 산출된 독자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철학이 이 같은 사상을 몸에 지니고 역사에 임하게 된다면, 철학은 역사를 하나의 재료로서 다루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사상에 적응시켜, 따라서 이른바 선천적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 이제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 여러가지 사건과 행위를 순수하게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역사는 주어진 것에만 집착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참다울 수 있기 때문에, 철학의 업무는 한 편으로는 이와 같은 역사의 영위와는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이 모순과 거기에서 생기는 사변에 대한 비난을 분석하고 반박해 두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풀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역사적인 것을 취급하는 목적, 관심, 처리 및 역사적인 것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유행하고 있는 혹은 항상 새로이 인출되는 무수히 많고 무한히 많고 특수한 틀린 표상을 시정하는데 관여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역사의 면에서 우리들이 문제거리로 삼지않으면 안될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 현재에 있었던 것이지만, 철학에 있어서는 과거에 단지 있었던 것도 또 미래에 비로소 일어날 것도 문제는 아니고 현재 있고, 또 영원히 있는 바의 것, 즉 이성의 문제거리이며, 이 점을 철저하게 문제로 삼지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중해는 3대 부분에서는 결합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세계사의 중심점이다. 역사상의 광명의 초점인 그리스는 여기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에는 유대교와 그리스교도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있고, 그 동남쪽으로는 이슬람교의 요람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 서쪽에는 델포이와 아테네가 있고, 그 서쪽에는 로마가 있다. 그 위에 또 알렉산드리아와 카르타고도 이 지중해안에 있다. 그러므로 지중해는 구세계의 심장이다.


학문적 연구를 할 경우에는 항상 이성을 잠자게 하지 말고, 숙고(熟考)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를 이성적으로 보는 자에게 세계 역시 이성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우리들의 대상인 세계사는 정신의 지반 위에서 진행된다.


세계사적 개인


국가는 인간의 의지와 그 자유가 외면적 현실성의 형태를 취한 정신적 이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역사의 변천은 본질적으로 국가에 결부되는 것이며, 이념의 여러 계기는 각양 각색의 원리로 되어서 국가 안에 현현한다.


우리들에게 있어 종교란 정신이 자기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을 자기 안에서 표상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의 자기 자신 안에 있어서의 내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문자어는 음성어가 적게 25음으로 나뉠 뿐이므로 간단히 기억할 수 있다. 우리들은 단지 이들 기호와 기호의 조합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25기호 대신 수천의 기호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용에 필요한 기호의 수만도 9,353개에 달하고 신조어를 합치면 1만516개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서적 안에 보이고 있는 관념과 그 결합을 나타내는 문자의 총 수는 8만내지 9만에 이른다.


아킬레우스(Achilleus) : 그리스 영웅전설의 제18인자. 미르미돈(Myrmidon)왕 펠레우스(Peleus)와 테티스(Thetis)의 아들이며 네오프톨레모스(Neoptolemos)의 아버지임. 호메로스 의 [일리아드]의 주인공이며 어릴 적 테티스는 그를 명부(冥府)의 강 스틱스(styx)의 물에 적셔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었는데, 그의 발꿈치만은 물에 적셔지지 않았다. 트로이 전쟁 때 아폴론의 가르침을 받은 패리스(Paris)의 화살에 발꿈치를 맞아 죽었다.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왕(다리우스 1세)은 그리스인이 자기에 대한 이오니아인의 반란을 원조한 것에 노하여,군대를 파병한다.

  이 우세한 군대를 맞아 아테네인은 플라타이아인과 함께 밀티아데스의 지휘아래 혼자 힘으로 마라톤(Marathon)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제 2회의 전쟁, 기원전 490년) 그 뒤(10년의 준비 뒤) 크세르크세스 왕(Xerxes : 다리우스의 아들)은 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우수한 대군을 인솔하여 그리스로 밀어닥쳤다. (제 3회의 전쟁, 기원전 480년,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에 대한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육군에 첨가하여, 이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해군을 보냈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는 이내 공략되었지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인솔하는 3백명의 스파르타인과 7백명의 테스피아이(Thespieis)인은 그리스 본토로의 입구인 테르모필레(Thermopylai)의 고갯길을 사수하였다. 그 운명은 알려진 대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Salamis)만에서 (아테네의 유명한 제독 테미스트 클레스에 의해서) 타도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 빛나는 승리의 날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이 기묘하게도 결부되어 있다. 즉, 아이스킬로스는 몸소 전쟁에 참가하여 승리를 돕고, 소포클레스는 전승의 축제에 춤을 추었으며, 에우리피데스는 이날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소피스트의 근본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23세 때 필리포스에게 초청되어 그에게 윤리학, 논리학, 정치학,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로마인의 경기

"죽음에 바쳐진 자. 이제 그대에게 경례한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들은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간의 고뇌는 인생의 모순에서 일어나며, 운명속에서 얼마간 그 해결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심정과 정신의 깊이에서 오는 인간의 고뇌대신 로마인은 육체적 고뇌라는 잔혹한 현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유혈과 사자의 신음소리와 단말마의 외침을 구경하고 그것을 즐겼던 것이다.(......) 짐승의 내장, 번개, 새가 날아가는 방향, 시빌리아의 말이 국가의 직무나 기획을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귀족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했고, 민중탄압을 위한 철책으로서 이용하였다.


로마의 황제는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 거동은 소박하였으며, 동양류로 권위를 풍기거나 금은보화로 몸을 휘감는 사치벽은 없었다.


페르소나(Persona)

그 자체로서 완결, 완성된 이성적인 단일 실체를 의미한다.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으 기둥에 새겨져있다고 하는 말.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의 뜻으로 심화하여 자신이 철학원리로 삼았다.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두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형인 아르카디우스는 트라키아를 포함하는 고대 그리스땅, 소아시아, 이집트 등 동방의 나라를 장악하고, 아우인 호노리우스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갈리아, 브리타니아를 포함하는 나라를 장악했다.


높은 자아, 문화라고 하는 것은 본디 로마인들에게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인들로 부터 받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또 그 때문에 실로 많은 그리스의 노예가 로마에 연행되어 왔던 것이다. 델로스(Delos)는 이와 같은 노예매매의 중심지이며, 어떤 때는 하루에 1만명의 노예가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노예가 로마인들의 시인, 저작자였고, 그들의 공장의 감독이며, 그들의 아이들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세인이 인간의 정의(情意)에 미치는 종교의 감화력을 논할 경우,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보급된다면 사생활이나 정치생활은 모두 완전한 것이 되어 그 상대는 완전히 합법적으로 또 인륜적으로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고, 또 흔히 그렇게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경건한 희망일 수는 있지만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오로지 양심에 간여하는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정열이나 욕망은 이 양심과 대립한다. 


게르만인(동고트족과 서고트족) 

서쪽, 에스파냐, 포르트갈로 진출한 서고트족, 이탈리아에 정착한 동고트족


성격이란 의지와 관심의 특정한 형태이며, 그것이 앞서서 자신을 주장한다.


현실세계안에는 확고부동한 것이라고는 없고 만유(萬有)는 활동하면서, 약동하면서 세계의 무한한 넓힘 속으로 소실되어 가는 것이고, 따라서 이 만유를 연결하는 유일한 유대는 일자의 숭배 뿐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넓힘, 이와같은 위력 안에서는 일체이 제한이나 민족의 차별, 계급의 차별 같은 것들도 일체 소멸한다. 종족이 어떻다든가, 문벌이나 재산에 의한 정치상의 특권이 어떻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고, 인간은 오직 신앙자라는 점에서만 값어치가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일자에 기도하고, 일자를 믿고, 단식을 하고, 각 개인의 아집에서 오는 육체적 감정을 버리고 보시하는 것, 즉 사적인 소유를 제거하는 것, 이슬람교의 계율은 오직 이것에 그친다. 그러나 최고의 공덕은 신앙을 위해서 죽는데 있다. 따라서, 신앙 때문에 싸움에서 쓰러진 자에게는 찬국이 약속되어 있다.


도시의 역사는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어느 당파인가에 따라서 일어난 정치조직의 끊임없는 변경의 역사였다.


화약의 발명은 인간을 자연의 폭력에서 해방시켜 신분의 평등을 도모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도구였다. 즉, 무기의 차별의 소멸과 더불어 주인과 노예의 구분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약의 성벽의 견진(堅陣)도 파쇄해 버렸기 때문에 성벽이나 성 자체도 그 중요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사람들은 개인적인 용감성의 가치의 몰락 또는 저하를 한탄할지 모른다. 용감무쌍한 자도, 의사(義士)도, 악한도 멀리 구석진 곳에서 발사하는 한 발 때문에 넘어지고 만다. 그러나 화약은 도리어 이성적인, 분별력이 있는 용기, 정신적 용기의 값을 높였던 것이다. 이 도구에 의해 비로소 한층 높은 용기, 개인적 정열을 뒤섞지 않는 용기가 생겨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화약은 보편적인 것의 내부를 향해 쏘는 것이며, 따라서 표적은 추상적인 것이지 개개의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사는 보편적인 것을 위햐여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태연자약하게 죽음의 위험 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그의 완력에만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 속으로부터 지휘관의 판단, 지휘, 인격에 몸을 맡기고, 또 고대인들 처럼 일치단결하여 전체의 의시겡 융화되어 싸우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교양있는 국민의 용기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국

봉건귀족 등은 존 왕(John Lackland, 실지왕 失地王, 1167~1216, 199~1216 까지 영국왕, 형 리처드 1세가 제3회 십자군에 출정 중 왕위를 탈취하려 하였지만, 형이 귀국후 굴복, 형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에게 강요하여 영국적 자유의 기초, 특히 귀족의 특전의 근저(봉건적 특권계급의 옹호)인 대헌장(Magna Charta)을 승인할 것을 서약시켰다.(1215년)  이리하여 획득한 자유 중 가장 선두에 서있는 것은 재판에 관한 자유이다. 어떠한 영국인도 그 동료로 구성되는 재판의 판결에 의하지 않는다면, 인격, 재산, 생명의 자유를 빼앗기는 일은 없다고 되어있다. 또 각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


국가와 법률은 현실세계의 모든 관계 안에 나타난 종교인 것이다.


결론.

세계사란 어지럽게 변천하는 역사의 무대한에서 연출되는 이상과 같은 정신의 전개과정이고, 정신의 현실적인 생성이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의론(神義論)'이며, 역사 안에서 신의(神意)를 명증하는 것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 또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은 신 없이는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신의 업(業) 자체라는 통찰만이 정신을 세계사 및 현실계와 유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2013.12.15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