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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현장에 답이 있다.

햇살처럼-이명우 2018. 10. 20. 20:52
현장에 답이 있다.

찰스 스트리클랜드를 그림으로 이끈 것은 꿈인가, 운명인가, 악마의 유혹인가? 
그림처럼 살다간 폴 고갱을 모티브로 썼다는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작가는 타히티로 가서 주인공 스트리클랜드가 나병에 걸린 상태에서도 3년 정도 처절하게 그림을 그리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의사 쿠트라에게서 전해듣는다. 스트리클랜드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의사인 쿠트라에게 늦게 전달되어 찾아갔는데, 이미 스트리클랜드는 죽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의사 쿠트라는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어두운 방의 사방 벽과 바닥,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면서, 영혼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압도감에 사로잡혔다. 일체의 언어가 필요없는 경이와 신비에 그는 숨이 막혔다. 자기로서는 알 수도 없고 분석하지도 못할 감동으로 가슴이 꽉 찼고, 마치 세계의 창조를 눈앞에 보아온 사람이나 느낄 수 있었을 불가사의 한 외경감과 환희를 느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알아서는 안될 신성한 비밀을 이미 알아버리고 만 인간의 작품이었다. 스트리클랜드는 나병으로 눈이 멀고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방에 틀어박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집을 태워달라고 했고, 원주민 출신인 아내 아타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나는 런던 땅을 밟았다. 무슨 당연한 급한 용무만 몇 가지 본 다음, 나는 스트리클랜드 부인도 남편의 만년에 대해 알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편지를 띄웠다. 그녀와는 전쟁 전부터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주소를 알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로부터 약속 시간을 지정한 답장이 와서 나는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캄덴 힐의 아담한 집으로 찾아갔다. 이미 예순이 가까웠지만 나이 보다는 젊어 보여서 쉰 이상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곱게 늙은 그런 여자였다. 수척하기는 해도 별로 주름살이 잡히지 않은 까닭에 보는 이로 하여금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다. 아직 머리도 백발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머리도 나이에 어울리게 땋고, 검은 의복도 시속(時俗)에 어울렸다. 그리고 보니 언젠가 그녀의 언니가 되는 맥안드루 부인이 한두 해만에 자기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하게 되자 그 유산이 고스란히 스트리클랜드 부인에게 굴러 들어왔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닌게 아니라 집안 꾸밈새며 안내하러 나온 하녀의 깔끔한 차림새를 보아도 과부 혼자의 살림 쯤이야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응접실로 안내를 받자 비로소 부인에게 손님이 한 사람 더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손님이 누군가를 알게되니 하필 그 시간에 나에게 오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이유가 없는 바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문객은 반 부쉬 테일러라는 미국인이었다. 스트리클랜드 부인은 그에게 변명조의 애교가 가득 찬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소개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서 "반 부쉬 테일러선생님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비평가에요. 테일러 선생님께선 이번에 찰리에 대해 쓰신대요. 그래서 저에게 뭔가 힘이 되어 달라고 찾아오신 거예요." 반 부쉬 테일러씨는 바싹 야윈 몸매에 번들번들한 널찍한 대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둥근 지붕처럼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두개골 밑에 깊은 주름이 잡힌 누른 얼굴이 무척 조그마하게 보였다. 점잔을 빼고 지나치게 공손했다. 뉴잉글랜드 사투리를 쓰며, 태도 전체에 냉혈동물과 같은 차가움이 흘렀다. 그런 인간이 도대체 뭐 때문에 스트리클랜드에게 정신을 팔았는지 속으로는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부인이 자기 남편 이름을 말할 때의 은근한 어조에도 나는 약간의 낯이 뜨거웠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모리스 풍(風)의 벽지도 사라져버렸고, 점잖은 크레톤 천도 없었다. 예전에 아셀리 가든의 응접실을 장식했던 애런들 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방 전체가 괴상한 색깔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유행에 맹종해서 그렇게 했을 터이지만, 이런 빛깔의 배합이야말로 그 자체가 저 남해의 고도에서 죽은 가난한 화가의 꿈의 결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도대체 알고나 있을까? 

  벽에는 베를린의 모 출판사가 간행한 스트리클랜드의 원색 복제판이 걸려 있었다.
  "저 그림을 보고 계시는거 아녜요?"하고 그녀는 나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말했다.
  "물론 원화야 어디 제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건가요. 그래도 이것으로 위안이 되죠. 출판사에서 저에게 보내준 것이랍니다. 그나마도 정말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매일 이 그림들을 보시고 계시면 그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시겠죠?"반 부쉬 테일러가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어린 것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나체의 여자에게로 쏠렸다. 그들 모자(母子) 곁에는 계집애가 하나 무릎을 꿇고 무심한 어린 것에게 꽃 한 송이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가 한 사람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스트리클랜드의 <성가족(聖家族)>이었다. 나도 가만히 생각했다. 틀림없이 이들 모델은 그 타라바오 깊은 골짜기에 있는 그의 식구들이었을 거라고. 여자와 어린애는 물론 아타와 그의 장남이었다. 그것을 이 부인은 꿈엔들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스트리클랜드 부인의 집을 찾아가서 본 집안 분위기, 벽에 걸린 그림, 그 그림의 내용도 모르는 부인과 아들, 딸, 그러면서 그들 나름의 생각. 너무나 슬픈 구도였다.

  근래에 작업중지해제를 위한 심의위원회에 참석하여 심의 한, 두 건의 사고는 어떻게 그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지? 하고 의아해할 사고였다. 한 건은 리조트에서 놀이기구의 안전한 이용을, 놀이기구 탑승고객에게 설명하고 안내해야 하는 근무자가 사망한 사고였다. 근무를 마치고 저녁무렵 퇴근하는 길에 꼭대기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내려오다가 기구에서 튕겨져 나와 사망한 것이다. 다른 한 건은 도로를 따라 상수관로 매설작업을 하는 현장의 차량유도 신호수가 자신이 유도한 굴착토사 운반 트럭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였다.
  많은 사고들이 어처구니 없다고, 말도 안되는 사고라고 표현되면서 안전관리하는 우리를 변명하지만 그런 사고마저도 예방되어야 한다. 불가항력이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면 안된다. 나의 예쁜 딸이, 우리의 아버지가 사고로 희생되고, 유가족들이 받는 고통을 생각하면, 현장에서의 어떤 사고도 일어나서는 안되며, 사고를 예방할 무한책임이 안전하는 우리들에게 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 이해되지 않는 사고라고 말하지 말고 한번 더 현장을 살펴보면 좋겠다. 현장을 보지않고, 현장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이런 사고는 예방할 방법이 없다. 
  스트리클랜드 부인의 모순된 감정과 태도, 이것과 현장을 읽어내지 못하고 책상머리에서 계획하고 판단하는 것이 닮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2018.10.20.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