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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인플루엔셜, 2015

햇살처럼-이명우 2020. 3. 11. 15:08

572.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인플루엔셜, 2015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수치다.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거지."


"요컨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착각하게 된다?"


"아니, 착각이 아닐세. 그 때 '자네'가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거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주관에 지배받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지금 자네의 눈에는 세계가 복잡 기괴한 혼돈처럼 비춰질걸세. 하지만 자네가 변한다면 세계는 단순하게 바뀔걸세.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네."


"내가 어떠한가?"


"그렇지. 어쩌면 자네는 선글라스 너머로 세계로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고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차례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 타인의 과제을 버려라.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자네가 말한대로 '과거'의 사건이 인간의 현재를 규정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은 모두 자네의 친구와 같은 결과, 즉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앞뒤가 맞지 않겠나?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 원인이 결과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런 거라네.

  의 원인에 주목해서 상황을 설명하려 든다면, 모든 이야기는 저절로 '결정론'에 도달하게 되네. 즉,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전부 과거 사건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지. 아닌가?

  친구는 '불안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세. 거꾸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다시 말해, 그 친구는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과 공포같은 감정을 지어내는 거지.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목적론(目的論)이라고 한다네."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 친구가 꾀병을 부린다는 말씀입니까""


"꾀병이 아닐세. 그 친구가 그 순간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진짜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두통을 겪거나 심한 복통에 시달리기고 하지. 하지만 그런 증상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어낸 거라네."


"혼동하지 말게. '원인론(原因論)'과 '목적올(目的論)'은 다르다네. 자네는 모든 것을 원인론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어.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네."


"그런데 원인론에 입각한 사람들, 이를테면 일반적인 카운슬러나 정신과 의사는 '당신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까닭은 과거의 그 일에 원인이 있다'라고 지적할 뿐이야. '그러니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라고 위로하는 걸로 그치지. 쉽게 말해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일세."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는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


"간단해. 자네는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낸 것'이 아닐세. 그저 '큰 소리를 내기 위해 화를 낸 것'이지. 다시말해 큰 소리를 내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지어낸걸세."


"모르겠나. 분노라는 감정은 언제든지 넣었다 빼서 쓸 수 있는 도구라네. 전화가 오면 순식간에 집어넣었다가 전화를 끊으면 다시 꺼낼 수 있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야. 그저 소리로 딸을 제압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 자기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걸세."


"가령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세. 이내 사계절 내내 18도를 유지하는 우물물과 같이 객관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을 차갑게 느끼느냐 뜨겁게 느끼느냐는 '지금'의, 그리고 '주관적'인 사실이라네.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태가 정해지는거지."


"문제는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요?"


"그렇지.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네. 시계침을 되돌릴 수 없어. 만약 자네가 원인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과거에 얽매인채 앞으로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걸세."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쓴 책은 한 권도 남기지 않았지. 아테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노상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벌였을 뿐. 그의 철학을 저작이라는 형태로 후게에 남긴 사람은 제자인 플라톤이었다. 아들러도 저술활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네. 대신 빈의 카페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작은 토론 모임에서 의견 나누기를 즐기던 인물이었지.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남이 던져준 답은 어차피 대증요법에 불과해."


"자네가 지금 불행한 것은 자네 손으로 '불행한 상태'를 선택했기 때문일세. 불행의 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악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 소크라테스의 역설


생활양식(life style)

그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네.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포함하는 말일세.


가령 "나는 비관적인 성격이야"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네. 그것을 "나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라고  생각해보자는걸세. 문제가 자신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에 있다고 보는거지. 성격이란 말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세계관이라면 변용시키는 것도 가능할테니 말일세.


생활양식이란 '삶의 태도와 비슷한 말인가요? 


그런 표현도 가능하겠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을 사는 방식'이라고 할까. 자네는 기질이나 성격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본다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인가,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가 불행한 것은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 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거지.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나는 여학생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네. "적면 공포증 쯤이야 간단히 고칠 수 있지" 

"아~ 정말이요?"

"하지만 나는 고쳐주지 않을거란다."

"왜요?"

"넌 적면공포증 덕분에 너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납득할 수 있어. 모든 걸 적면공포증 탓으로 돌리면서......"

"만약 내가 적면공포증을 고쳐주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할까? 아마 너는 이곳에 다시 찾아와 '적면공포증에 도로 걸리게 해주세요'라고 떼를 쓰겠지.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담이야."


적면공포증을 고치고 싶다는 환자가 나타났을 때 카운슬러는 그 증상을 고치면 안되네. 그러면 스스로가 다시 일어서기 힘들어지거든.


그 여학생은 자신감이 없었네. 이대로 고백했다가는 차일게 틀림없어. 그러면 점점 자신을 잃고, 상처받게 될거야, 하는 공포심이 있었어. 그래서 적면공포증이라는 증상을 만들어낸걸세. 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단 '지금의 나'로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라네. 이러한 접근방식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부여'라고 하지.


인정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이네. 하지만 잊지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아들러는 열등감을 '민더베르티히카이트케퓔(Minderwertigkeitsgefuhl)'이라고 했네. 독일어로 '가치(wert)'가 '더 적은(minder)' '느낌(Gefuhl)'이라는 뜻이지.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된 말이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155cm라는 내 키가 열등하지 않았다는 점일세. 내가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 낸 주관적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劣等感)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열등감 그 자체는 그다지 나쁜게 아니다. 아들러도 말했듯이 열등감은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가령 학력에 열등감을 느껴 "나는 학력이 낮다. 그러니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하자"라고 결심한다면 도리어 바람직하다. 하지만 열등 콤플랙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그건 열등 콤플렉스이다.


자네가 말한 인과관계에 관해 아들러는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 며칠 전에도 "내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혼한 탓이에요."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원인론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의 이혼은 큰 트라우마이자 그 사람의 결혼관과 밀접한 인과관계에 놓여있다.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 입장에서 그것을 '무늬만 인과법칙'이라며 경계했다.


그렇지. 불행을 무기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첫날 말했던,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들은 곧 잘 불행을 무기로 하는 우월감에 빠진다. 아들러가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오늘날 누가 가장 강한지 자문해보라. 갓난 아기가 논리적인 답이 될 것이다. 갓난 아기는 지배하지만 지배받지 않는다." 갓난 아기는 연약한 존재라서 어른들을 지배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다.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으니까.


내가 아는 젊은 친구는 소년시절에 거울 앞에서 오랫 동안 머리를 빗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얼굴을 주의깊에 보는 사람은 너 뿐이란다." 그날 이후 그는 삶이 조금 편해졌다고 했다.     


  그러면 면전에서 인신공격을 받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나. 그저 참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 '참는다'는 발상은 당신이 아직 권력투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리고 그것이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라.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다.

  하지만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가? 대체 분노를 어떻게 제어하라는 것인가?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러지말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워라.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다.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의 감정도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욱해서"라는 말이 나오는거고, 분노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거다.

  권력투쟁에 관해 한 가지 더 일러 둘 말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마라.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


아들러는 여러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이라고 했다.


유대교 교리에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라. 만약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결과(이를테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망하는 학교에 불합격하는 등)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아이다. 즉 공부는 아이의 과제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다.


구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프리지아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을 때 이륜마차를 몰고 오는 사람이 나라를 구하고 왕이 되리란 신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고르디우스였는데, 당시에는 이륜마차가 흔하지 않았다. 신탁에 의해 왕이 된 고르디우스는 마차를 신전에 바치고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복잡하고 단단하게 묶어 놓았다. 이를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라고 하며,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인간관계이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인간관계의 카드는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산다. 하지만 과제의 분리를 배우고 나면 모든 카드를 내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달라지게 하려고 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일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그 결과,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것도 과제의 분리다. 물론 내가 변화하면서(나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변하기도 한다. 대개는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타인을 조종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언컨대 잘못된 발상이다.


관계가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야.


개입과 지원

개입이란 타인의 과제에 불쑥 끼어들어 '공부해'라고 하거나, '그 대학에 가야해'하고 지시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지원이란 과제의 분리와 수평관계를 전제로 한다. 공부는 아이의 과제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거다.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야. 그야말로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칭찬하지도 야단치지도 않네. 이러한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부여'라고 한다.


일을 도와준 파트너에게 "고맙다"라고 인사하겠지. 아니면 "기쁘다", "도움이 됐다"고 솔직한 심정을 전하거나. 이것이 수평관계에 근거해서 용기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약,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면 감사나 존경, 기쁨의 인사 같은 더 순수한 말이 나오겠지.


칭찬받는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기준이고, 칭찬받고 싶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행동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자유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반면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들러는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 예를들어 부모님 말에 일절 말대꾸를 하지않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큰 회사에 취직한다. 그런(있을 수도 없는) 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 놓고 자식과 비교를 하며,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는다.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 이거야말로,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된다. 이상적인 100점에서 감점하지 말고, 0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 따러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있는 것'에 주목하라.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것이다.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 수용이다.


"신이시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제5 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니버의 기도 -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신경증적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은 걸핏하면 '모두', '늘', '전부'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나를 모두 싫어해", "늘 나만 손해를 봐". "전부 틀렸어" 라는 식으로. 아들러는 이런 삶의 방식을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것으로 본다.

  유대교 교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열명이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서로 모든 것을 받아주는 더 없는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 때 나를 싫어하는 한 명에게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혹은 남은 일곱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그게 관건이다.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한 명만 보고 '세계'를 판단한다.


춤을 추듯 살라.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 과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용

Kinesis적 인생 : 일반적인 운동(이를 키네시스라고 함)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다. 이 시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이르는 운동은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급행열차를 탈 수 있다면 일부러 역마다 정차하는 보통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단적으로 말한다면 변호사가 된다는 목적지가 있다면 되도록 빨리, 되도록 효율적으로 거기에 도달하는 평이 낫다.


energeia적 인생 :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 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과정'자체를 결과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춤을 추거나, 여행처럼 말이야.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생활양식은 '지금 여기'에 관한 이야기며, 자신이 의지로 바꿀 수 있다. 직선처럼 보이는 과거의 삶은 당신이 '바꿀 수 없다'는 결심을 반복한 결과도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 놓여있다. 쭉 뻗은 레일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야기는 없다.


예를들어,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데 공부를 하지않고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가 아니다. 물론 대학입시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귀찮기도 하지. 하지만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 즉 춤을 추는거지.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거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네 아버지도 날마다 일이라고 하는 춤을 진지하게 춰왔을걸세. 큰 목표가 있다거나 그 목표를 달성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 거지.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은 행복했을걸세.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린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는거다.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만을 비춰왔지. 자신의 인생에 더 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거다.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이 의미란 없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하늘 위에 타자공헌이라는 별을 걸면 늘 행복이 함께하고, 친구도 함께 한다.


2016.1.21.(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