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육문사, 1986
Erich Fromm 에릭 프롬(1900~1980)
'소유냐 존재냐' 이 작품은 1976년 그의 나이 76세 때 쓰여진 작품.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에서 유태인 부모 사이에 태어남. 그는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뮌헨대학에서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을 공부했으며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정신분석연구소에서 강의를 했으며, 사회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했다.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인해 그가 속해있던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연구소는 폐쇄되었으며, 그해 그는 시카고 정신분석학 연구소의 강사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국적을 미국으로 옮겼다. 도미 후, 그는 1939년까지 콜롬비아 대학의 '국제사회조사 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했으며, 그 후 콜롬비아 대학, 예일 대학, 멕시코 국립대학, 뉴욕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는 프로이트(Freud)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는 마르크스(Marx)의 영향을 받은 신(新)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이다. 신프로이트 학파의 특징은, 본능은 만족을 인간의 중심적 과제로 생각하는 프로이트의 사고방식과는 달리 역사적, 사회적 요인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즉, 프로이트는 개인의 행동이나 성격 형성을 생물학적 본능으로 설명했으며, 따라서 환경요인을 경시했다.
그러나, 신 프로이트 학파는 생물학적 본능보다는 발달된 의식에, 그리고 개인의 소질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욕구와 충동이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이 바탕이 되는 영원한 힘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판하고, (1)심리학의 중심문제는 본능적 욕구 충족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개인의 관련성의 문제이며 (2)개인과 사회사이의 관계는 고정적이 아니라 항상 변화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원제가 나타내고 있듯이, 인간존재의 두 가지 양식으로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를 분석하고, 그 인식 위에 서 있는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존재양식으로, 우리는 사물의 소유를 자기의 가치, 혹은 존재의 증거로 삼게 되어 버렸다. 이 관계는 사물 뿐만 아니라 인간, 지식, 관념, 신(神), 심지어 건강이나 질병에 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주체도 객체도 사물로 환원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살아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은>관계만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는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의 악순환을 야기시키며, 우리는 만성적인 기아상태에 빠져있다.
이와는 반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형태의 태도가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고(give), 함께 나누어 갖고(share), 관심을 함께하는 <살아 있는> 관계이다. 그것은, 삶의 긍정이며, 삶의 무대에 함게 참여하는 일이다. <역자 박병진 씀>
자유에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년. 41세 때 발표.
차례
서론 : 위대한 약속, 그것의 불이행, 그리고 새로운 대안
제1부 소유와 존재에 대한 이해
1장 일반적 고찰
소유와 존재의 차이의 중요성
여러가지 시적 표현의 예
어법상의 변화
용어들<Having 과 Being>
존재이 철학적 개념
소유와 소비
2장 일상적 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3장 구약, 신약성서 및 에크하르트 저서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
제2부 두 가지 생존양식의 근본적 차이
4장 소유양식이란 무엇인가?
취득적 사회-소유양식을 위한 기반
소유의 본질
소유양식을 지탱하는 기타 요소들
소유양식과 항문애적 특성
금용주의와 평등
생존적 소유
5장 존재양식이란 무엇인가
능동적이라는 것
능동성과 수동성
실재(實在)로서의 존재
주려는 의지,공유하려는 의지,희생하려는 의지
6장 소유와 존재의 심층적(深層的) 고찰
안정-불안정
연대의식-적대의식
기쁨-쾌락
죄와 용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삶의 긍정
여기,지금-과거,미래
제3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7장 종교,성격,사회
사회적 성격의 기초
사회적 성격과 '종교적 욕구'
서양세계는 왜 기독교적인가?
휴머니즘의 저항
8장 인간변혁의 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징
새로운 인간
9장 새로운 사회의 여러가지 특징
새로운 인간학
새로운 사회-그 실현의 가능성은 있는가?
* 여러가지 시적 표현의 예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으로부터 뽑아낸다.
지금 나는 너를 뿌리째로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그러나 <만일> 내가
네가 무엇인지, 너의 뿌리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때 난느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리라.
일본 시인 바쇼(1644~1694)의 하이쿠(단시)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 꽃이 피어있다.
울타리 옆에
이 두 시의 차이는 현저하다. 테니슨은 꽃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는 꽃을 '뿌리채'뽑는다. 그리고 그는 인간과 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꽃이 해낼 수 있는 기능에 대한 지적인 사색으로 끝냊고 있지만,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의 결과로서 꽃 자체는 생명을 잃는다. 우리가 앞의 시를 통해 보는 테니슨은, 살아있는 것을 해부하여 진실을 찾는 서양의 과학자에 견줄 수 있다.
그러나 꽃에 대한 바쇼의 반응은 다르다. 그는 꽃을 뽑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건드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을 '알기'위해 '가만히 들여다 볼' 뿐이다
테니슨은 사람들이나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아무래도 꽃을 소유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꽃을 <소유하는 것>에 의해서 꽃은 파괴된다. 바쇼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것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그것과 자기 자신을 <하나로 하는> 것. 그리고 꽃을 산채로 두는 것이다. 테니슨과 바쇼의 차이는, 괴테의 다음 시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발견
나는 숲 속을 걸었다.
오로지 나 혼자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마음에 있었다.
나는 응달에서 보았다.
조그만 꽃 한 송이를,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같은,
난 그 꽃을 꺾고 싶었지만,
꽃은 상냥하게 말했다.
'곧 시들어 버릴텐데
어째서 나를 꺾으려 하나요'
나는 그 꽃을 캤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그리고 그것을
예쁜 집의 정원으로 가져갔다.
정원의 조용한 곳에
그 꽃을 다시 심었다.
지금은 아주 크게 퍼져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괴테는 아무 목적도 없이 걷다가 맑고 작은 꽃에 이끌린다. 그도 테니슨과 똑같이 그 꽃을 꺾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테니슨과는 달리, 괴테는 그 행위가 꽃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괴테에게는 꽃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말로써 그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그는 테니슨과 바쇼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그 꽃을 '뿌리 채' 캐서 다시 심음으로서 그 생명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괴테는 테니슨과 바쇼 사이에 있는 것이다.
꽃에 대한 테니슨의 관계는 <소우>-물질의 소유가 아니라 지식의 소유-양식에 속한다. 바쇼와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에 속한다. 내가 <존재>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무언가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일 없이, 기쁨에 넘쳐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인 일에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생존양식을 말한다.
삶의 위대한 애호가인 동시에 인간의 해체와 기계화에 대항했던 탁월한 투사의 한 사람인 괴테는 , 많은 시에서 <소유>에 대립하는 것으로써의 <존재>를 표현했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는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메피스토펠리스에 의해 표현된다.) 사이의 투쟁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다음의 단시에서, 그는 존재의 특질을 극히 간결하게 표현했다.
소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나의 영혼에서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사상과
자애로운 운명이 내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주는
모든 고마운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법정의 무소유와 닮았다.
* 어법상의 변화
명사는 사물을 나타내는 고유한 명칭이다. 나는 사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들어 나는 테이블, 의자, 집,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리고 행위나 과정을 나타내기 위한 고유한 명칭이 동사이다. 예를들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증오한다. 등이다. 그러나 <행위>가 <소유>를 나태내는 말로 표현되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즉, 동사대신 명사가 사용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명사에 <가진다>라는 말을 붙여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과정이나 행위는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비자는 다음의 공식에 의해 자기를 확인하려 한다.
<나의 존재 :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 내가 소비하는 것>
amen은 '확실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20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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