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 인간이 그리는 무늬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최진석, 소나무, 2015
2016년 2월 28일 기관장 워크숍에 특강으로 오신 최진석 교수님 친필 싸인을 받았다.
기업이 인문학에 관심갖는 이유는, 자기들의 생존 때문입니다. 기업은 인문학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에요. 새로운 인류에 맞추어 가는데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으로 '딱' 하고 알아챘다는 겁니다.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상인들은 이것을 알아채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특히 정치나 교육분야에서 모두 다 우리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고 우리 스스로 비전을 만들어 시행했던게 아닙니다. 모두 외부에서 들여온 것들을 받아서 수행해 왔던 것들이죠. 이제 우리만의 메시지나 비전으로 새로 조정되지 않으면 이 혼란이 오래가리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 할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한계에 도달했어요.
그런데 유독 기업인들 즉 상인들만 그들의 더덤이로 이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겁니다. 이 더듬이를 조금 고급스럽게 표시하자면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인문학은 바로 이 통찰력과 관계되는 학문이라는 것을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삶을 자기가 끌고 가는 사람한테는 카리스마가 생기고 향기가 나게 마련입니다. 대중들은 그 향기를 따라서 믿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은 단지 '좋다'와 '나쁘다'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면, 여러분은 아직 내적으로 성숙한 주체력, 이것을 갖추지 못한 거에요. 달리 말하면 여러분은 리더로써 성장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일류의 삶을 꾸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자기 내면의 생명력에 의거하여 자기 삶의 유형을 창조하고 책임지면 고급 삶이고, 타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삶의 유형을 수행한다면 저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류의 삶은 아닐 것입니다.
인문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좋다'거나 '나쁘다'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합니다. "5년 10년 전만 해도 저런 일이 불가능 했는데 이 세계에 무슨 변화가 있길레 저런 일들이 가능해졌지?" 바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인문적 통찰은 대답하는데서 오는게 아니라 질문하는데서 비로소 열립니다. 질문하는 활동에서 인문적 통찰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선견지명의 빛은 자신에게 이미 있는 관념을 적용하는데서 나오지 않고, 질문을 하는 곳에서 피어오릅니다. 모두가 대답하려고 할 때 외롭게 혼자서 질문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그의 저작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니체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합니다.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의 시대라는 얘기겠지요.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입니다. 그 육체성은 구체성입니다.
인간의 본질로 간주되는 맹자의 사단, 네 가지 심리현성(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이성적 사유를 통한게 아니라 직접적 경험으로 알아챈 건이다.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나 주역의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원리도 사유의 극점에서 나오지 않고 집요한 관찰과 경험에서 발굴된 것이다. 서양사상은 '사유'가 원천이지만 동양사상의 원천은 구체적 세계에 대한 '관찰'입니다.
고대인과 중세인은 다른 사람입니다. 중세인과 근대인도 다른 사람이지요.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사람들이지만, '생각의 틀'을 다르게 가졌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입니다. 고대는 고대식으로 생각하는 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살던 기간이고, 중세는 중세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모여살던 기간이며, 근대 내지는 현대도 근대나 현대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 사는 기간을 말하는 겁니다. '생각의 틀'이란 바로 '세계관' 입니다. 세계관이 다르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도 달라지고 삶의 의미도 달라지고, 제도도 달라집니다. 당연히 시대구분의 근거는 세계관이 되겠지요? 바로 '철학'인 것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 문학, 사학, 철학, 줄여서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지요.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을 알려주려고 하는 학문들이지요.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감동의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계기를 재료로 삼아 인간이 그리는 결의 정체를 알게 해주려고 하면 사학이 됩니다. 명증한 범주와 개념들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주면 바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또 뭡니까? 이념이나 신념이나 가치관과 같이 자신을 채우고 있으면서 주인행세를 하던 기존의 굴레를 뚫고 나와, 그들을 밟고 우뚝서거나 그것들을 손 안에서 탁구공 다루듯이 가볍게 희롱할 수 있게된 독립적 주체가, 인간이 그려나가는 무늬의 정체와 방향에 대하여 꿈꿔보다가 그 동선의 앞에 조금 일찍 서보는 일이에요.
자기에게 심각하게 물어봐야 해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할 때에라야 비로소 인문적 통찰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겁니다. 자기가 지식과 이념의 지시를 받지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압도적으로 지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집단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우리의 것'이에요. '나만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 즉 '우리의 것'을 벗었다는게 뭐냐하면, 바로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내가 이념 등과 같은 감옥을 벗어난다는 말은,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행세를 못하게 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뭐가 남을까요? 뭐가 남아서 주인 자리를 차지할까요? 바로 '나'입니다. 바로 온전한 '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학원의 면접 시험장
"왜 그것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 한국 사회에 대한 뜬금없는 사명감만 있을 뿐 '자기'는 전혀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왜 그것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관절 대한민국 사회는 왜 들먹이나요? 한국 사회는 걱정마세요. 오! 간곡히 말하건대, 제발 그러지 마세요. 자기는 자기 일만 하면 돼요. 자기만 잘하면 됩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는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기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고, 왜 스스로를 사명의 완수자가 되어야 한는 존재로 규정하는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사회'나 '국가'에 양보하면 안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튼실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라야 건강합니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벌써 부정적이고 점잖치 못한 느낌이 들테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성의 신화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계산능력과 관계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희랍어인 로고스(logos)를 기원으로 하지요.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라티오(Ratio) 가 되고, 이 말은 계산, 비례, 비율, 조화 등등을 뜻하게 됩니다. '이성'을 뜻하는 불어의 레종(Raison)이나 영어의 reasion 이 모두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어요.
바람직한 것보다는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해야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샘솟게 됩니다. 더욱 부드러운 사회가 됩니다.
자유도 주지 못하고, 행복도 주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지식을 쌓고 경험을 늘리는 일에 몰두할까요?
서양철학의 시조 탈레스(Thales)는 '이 세계의 근원은 물이다' 탈레스 이전의 사람들은 '이 세계의 근원은 신이다'라고 믿을 때, 탈레스는 과감하게 이 세계의 근원은 물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이냐? 바로 "세계의 근원은 물이다"는 탈레스의 판단이 신의 계시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믿음 체계를 따른 것도 아니며, 오직 탈레스 본인의 '생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철학은 사실 인간이 신을 벗어난 사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독립과 관계되지요. 철학은 신화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을 벗어나서 생각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긍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긍정이란 것은, 잘나고 좋은 모습의 나만을 긍정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못나고 일그러지고 추레하게 보이는 나 역시 자신입니다. 못나고 일그러지고 추레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 그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체 하고 있는 기준에 비춰보니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신' 책임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들을 함께 긍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잘나게 보이는 것도 '나'이고, 못나게 보이는 것도 '나'입니다. 잘난 나만 받아들이고, 못난 나는 외면한다면 진정 자기로 사는게 아닙니다. 집단적 기준에 의해서 자기가 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개는 밖에 나가서도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일, 자기가 자기를 믿지 않는 일, 이것은 천덕꾸러기로 자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과 같습니다. 불행의 시작이죠. 자신에 대한 무한 정!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 그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개념을 이해하는 일을 파악(把握 , 손으로 잡아 꽉쥔다.) 한다고 하죠. 동양의 개념도, 영어의 콘셉트(concept)도 독일어의 베그리프(Begriff)도 모두 다 이 세계를 자기가 잡고 싶은 만큼, 잡을 수 있는만큼 잡아서 손에 남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싶은만큼, 가질 수 있는만큼 잡고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손에 남겨진 것을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 것, 이것이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개념은 출발할 때부터 세계를 전면적으로 반영하기엔 부족한 것이고, 출발부터 소유적 상태이고, 출발부터 제한된 상태이고, 출발부터 딱딱한 거에요.
그런데 왜 우리는 개념의 구조로 되어있는 지식이 우리의 구체적 실생활 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틀인 이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개념의 확신체계인 신념이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개념'에 스스로 굴복당하는 형국입니다. 마름을 주인으로 착각한거지요. 마름은 개념이고, 주인은 실제하는 세계이자 바로 '나'입니다. 개념은 실제하는 세계와 살아 움직이는 '나'를 위해 존재해야하는 마름 같은 것인데, 이 마름이 오히려 실제하는 세계를 제어하거나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가 주인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념이나 개념의 정체를 정확히 보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주자학을 들여와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할 때, 중국은 이미 명나라라는 전혀 새로운 정치적 토양속에서 양명학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중국 송나라라는 특정한 토양에서 만들어진 주자학이라는 이념을 조선에서 수입하여 사용한 것이지요. 근데 어떻습니까? 중국은 토양이 달라지니까 이념도 거기에 맞추어 변화시켰지요? 조선은 어땠나요? 조선은 다른 토양에서 만들어진 수입품으로서의 이념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서 우리가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겁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사용해야 할 어떤 것으로 있었지만, 조선인에게 그것은 모셔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국인에게는 주도권이 구체적 현실 세계에 있었지만, 조선인에게 주도권은 주자학이라는 이념에 있었던 것이죠. 실재하는 구체적 현실세계는 이제 실제적 존재성을 갖고 있지도 않는 이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념의 생산자들은 왜 자신들이 만든 이념을 변경할 수 있다고 했을까요? 그 사람들은 자기 토양에서, 자기의 구체적인 세계에서,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알아요. 그런데 수입해온 사람들은 비밀번호를 알 턱이 없습니다. 왜?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흠집없이 지키는 데만 목을 매다는 거에요. 오늘날 한국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한국의 이념 문제가 이 문제에요.
근본적인 이념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대개는 수입된 것인데, 그것을 우리 토양에 맞게 변형시킬 힘을 우리가 갖지 못한 거예요. 그건 뭐냐? 왜 힘을 갖지 못했어요? 인문학적 자아를 확보하기 못한 거에요. 자아가 이념이나 신념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변화하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아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세계를 봐야하는데로 봅니다. 보고 싶은데로 봅니다. 하지만 보이는 데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인문적 통찰은 세계를 보이는데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되었을 때 실현됩니다. 그래야만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이념의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념을 보위하는 자가 아니라 내 실정에 맞게 이념을 수선할 수 있습니다. 남이 연주하는 음악만 기계적으로 흡수하는게 아니라, 내 마음에 쏙 들게 변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 그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老子의 '거피취차(去皮取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라'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되는 일이 없다. 無爲而無不爲, - 도덕경 37장'
공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인 성인들이 만들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공인된 '바람직한 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원칙' 그리고 '좋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수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자는 이와 정반대였죠. '바람직한 일' 보다는 '바라는 일'을 하고 '해야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좋은 일' 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보편적 이성에서 벗어나 개별적 욕망에 집중하가를 얘기일테지요. 개별적 욕망에 집중해야 멋대로 할 수 있고, 멋대로 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통찰을 위한 거름, 아는 곳에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거름. 인격과 욕망의 깊이를 키우는데 사용되는 거름, 바로 거름인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키워주는 거름을 생명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생명이 위축되어 버립니다. 머슴이 주인 노릇하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는 얘기 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관리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지식을 신봉하는 사람인가? 지식의 지배자인가? 지식에 지배당하는 사람인가? 지식과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지식인은 예측을 할 수 없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측할 수 있는 것에 까지 인도할 수 있는 내적인 동력이 있는 사람은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 이념을 바꿀 수 있는 비밀번호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여자가 키스할 때 눈을 뜬다는 것은 당신과 나는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고, 키스할 때 여자가 눈을 감는다는 것은 구분을 제거해서 일체감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갖추기 위해 제사장들은 며칠 전부터 향이 많이 나는 음식을 안먹는달지, 시간에 맞춰 목욕을 준비한달지, 걸음을 어떻게 걷는달지 하는 준비를 했을테죠? 제사를 집전할 때도 다양한 행위절차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준수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행위절차를 뭐라고 했느냐? 바로 예(禮)입니다.
그 禮라는 절차, 행위절차를 밟아 나가면 하늘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떤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져요.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내면의 상태가 바로 '덕'입니다. 그래서 德은 제사장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준비한 정제된 마음입니다.~
이 德의 상태가 갖춰지면 하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덕의 마음을 가지면 하늘을 움직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인간은 덕을 통해서 하늘과 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덕을 매개로 해서 인간은 합리적 행위 규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 마저도 합리적인 행위 규칙을 갖게 되었습니다.
德不孤 必有隣 <論語, 里仁篇>
공자는 말합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덕을 가진 사람은 이념과 신념에 부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지식에 조정당하지 않지요. 본래적인 자발성과 생명력이 작동하는 그 '터'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감화력이 향기처럼 뿜어져 나와 자발적인 동조자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장자의 애태타(哀駘它). 아마도 <장자>에 나오는 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일겁니다. 애태타는 몰골이 매우 추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지낸 사내들은 그를 따르며 떠나지 못했고,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여자들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 분의 첩이 되겠습니다.'라고 부모들께 간청했다"고 장자는 말합니다.
교언난덕(巧言亂德) <論語, 위령공> "잘 꾸며진 말이 덕을 어지럽힌다."
덕은 지식을 지혜로 넘겨주는 힘이지요. 경험을 행복과 자유의 영역으로 넘겨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인격적 기품까지 제공하지요.
'안전'이나 '완벽'은 죽음의 세계예요. 오히려 '불안'이 세계의 진상입니다.
하찮은 일들 말고 다른 일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이 감당하고 사는 일들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마치 이삿짐 같은 것들이지요.
하찮은 일들 말고 다른 일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이 감당하고 사는 일들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마치 이삿짐 같은 것들이지요. 아무리 좋은 살림도 이삿짐으로 꾸려서 골목에 내놓으면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에요. 이삿짐 같은 구체적 일상을 무리하지 마세요. 우리의 삶은 사실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인생이에요. 고상함이나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일들도 이런 잡다한 일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훌륭하다고 숭앙받던 사람들이 어디서 무너집니까? 바로 일상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인간은 구체적 일상을 같이 영위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일 것입니다.인간 성숙의 척도는 높고, 크고, 거대한 곳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상에서 확인되는 것이 더 치명적이죠.
중국 조주선사(趙州禪師)라는 고승이 있었습니다. 조주선사한테 어떤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 :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조주선사 : 밥은 먹었느냐?
스님 : 예, 밥은 먹었습니다.
조주선사 : 그럼, 그릇이나 씻어라.
추상과 관념의 세계에 젖어 있다가, 구체적 세계로 시선을 돌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일상이 하찮게 보이지 않고, 진리의 주재처로 보이도록 자신을 갈고 닦을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일' 사건이 존재한다.
보편의 세계에는 '우리'가 존재하지만, 일상의 세계에는 '내'가 존재합니다. '죽음'은 보편이지만 '죽는 일'은 일상입니다. 보편적 개념으로 내 영혼을 자극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하는 인재, 대답하는 인재.
욕망은 장르를 만드는 힘.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에 할 산책이 그리워서 잠을 설치지 못하고
파랑새 우는 소리에 전율을 느끼지 못하거든,
깨달아라.
너의 봄날이 가고 있다는 것을 」 소로우 글. 각색
201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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