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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부활1,2, 톨스토이, 민음사, 2005.

햇살처럼-이명우 2020. 6. 22. 14:11

590. 부활1,2, 톨스토이, 민음사, 2005.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 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을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쫒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 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 채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가로수 길의 잔디밭은 물론 도로의 포석 틈새에서도 푸른 봄 빛의 싹이 돋고, 자작나무와 포플러와 구름나무도 봄 내음 풍기는 촉촉하고 윤기 나는 잎을 내밀고, 피나무도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둥우리를 만들기에 바쁜 떼까마귀와 참새와 비둘기는 새 봄을 맞아 아주 즐거워 보였고, 양지바른 담장 가에서 파리들도 분주히 날고 있었다. 식물도 새도 곤충도 어린애들고 모두 명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 어른이 된 사람들은 - 여전히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서로서로를 속이고 괴롭혔다. 사람들은 이 봄날 아침이 신성하다거나 의미 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온갖 만물의 행복을 위해서 신이 마련해주신 세계의 아름다움, 즉 평화와 하평과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생각해 낸 일들만이 가장 신성하고 의미 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카튜샤)

 

  고모네 집에서 보낸 이 해 여름은 네흘류도프에게 넘칠 듯한 감정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것은 청년으로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인생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생이 인간에게 지워준 사명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전 세계의 완성을 향한 끝없는 추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이 품고 있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데 희망과 더불어 뚜렷한 자신감을 가지고서 헌신할 때만이 맛볼 수 있는 그런 감동이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카튜샤가 방으로 들어오거나 멀리서 그녀의 하얀 앞치마가 얼핏 눈에 띄기만 해도, 순간 모든 것이 햇빛을 받은 듯 빛나 보였다. 더욱이 모든 것이 즐겁고 유쾌하고 의미있게 여겨져 그의 인생이 환희로 넘쳐 흐르는 듯 했다. 카튜샤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단지 카튜샤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감정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카튜샤가 존재하고 또 카튜샤에게는 그가 존재한다는 것, 이것을 의식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런 느낌을 준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어머니에게서 언짢은 편지가 왔거나 논문이 뜻대로 써지지 않거나, 젊은이들 특유의 특별한 이유도 없는 우울한 감정에 빠질 때도, 카튜샤가 여기에 있다, 카튜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그런 모든 상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삼 년 동안 네흘류도프와 카튜샤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장교류 임관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 고모네 집에 들렀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정신적 자아가 자신의 진실된 자아라고 믿고 있었으나 지금은 건강하고 용기있는 동물적인 자아가 진실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 라블레(1459~1553)가 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법률가가 재판을 청탁받고는 온갖 법률 조문의 예를 지적하면서 무의미하기만 한 라틴어 법률서를 이십여 페이지나 낭독한 다음에 소송자들에게 주사위를 던지게 해서 짝수가 나오면 원고가 이기고, 홀수가 나오면 피고가 옳다고 했다.

  이 경우도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미시를 대할 때마다 언제나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흔들렸다. 아따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거나 또는 달빛 속에서 볼 때 처럼 그녀의 아름다운 점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는 생명력이 있고, 아름답고, 지적이고 자연스러운 여성으로 눈에 비쳤다. 그러나 이따금 밝은 햇빛 속에서 볼 때처럼 그녀의 결점이 온통 눈에 띄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숨겨진 잔주름이 죄다 보였고, 머리 모양이며 비죽 불거져 나온 팔꿈치도 눈에 거슬렸다.

 

  "그녀가 그런 길을 걷게 된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줘야만 할 것 같소." 네흘류도프의 말.

  "그거야 뭐 서방님 마음 먹기에 달린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귿이 서방님의 탓으로만 돌릴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분별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저절로 해결되어 잊혀지게 될거에요. 모두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말했다.

 

  '이 년 동안이나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이런 어린애 같은 장난은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자기와의,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하고 진실된 자기와의 대화였다. 지난 이 년 동안  이 자아가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무슨 행동을 하기 위해선 자신의 행위가 중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의 행위가 극히 중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게 마련이다.

  우리는 보통 도둑이나 살인자, 간첩이나 매춘부는 자기의 직업이 나쁘다고 인정하고 그 사실에 수치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운명이나 자기의 실책 등으로 인해 어떤 처지에 몰리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에게는 바람직하고 훌륭한 것이라는 인생관을 갖게 된다.

 

  메니쇼프가 이유 없이 받는 고통은 너무나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그가 당하고 있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는 잔악한 사람들로 인해 그가 품게 될 선과 악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었다.

 

  우리 사이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미신의 하나는 인간은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선인이라든가 악인, 현인, 어리석은 사람, 근면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그렇게 구분해서 단정적으로 봐서는 안된다. 저 사람은 악인일 때 보다 선인일 때가 더 많다든가, 게으를 때 보다 부지런할 때가 더 많다든가, 어리석을 때 보다 똑똑할 때가 더 많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인간을 두고서 당신은 성인이라든가 분별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선 당신은 악인이라든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인간을 그런 식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물은 어느 강에서든 흐른다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강 하나만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지점은 좁고 물살이 빠른 반면, 넓과 물살이 느린 곳도 있다. 또 여기서는 맑기도 저기서는 탁하기도 하고, 차기도 따스하기도 하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온갖 요소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 어느 경우 그 중의 하나가 돌출하면 똑 같은 한 사람이라고 해도,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에 따라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유형의 인간에 속했다. 그에게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육체와 정신 모두에 있었다. 지금도 그의 마음 속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2권.

 

  "우리는 흔히 검사나 재판관들을 무조선 새로운 자유주의의 기수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도 한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 입장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 들은 이제 20일의 봉급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일개 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월급으로 생활하는 그들은 좀 더 나은 벌이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결국 이 문제에 집중된다는 얘깁니다. 그래 그들은 누구든 걸리는 데로 기소해서 재판에 회부하여 유형 판결을 내리는 거죠."

 

  네흘류도프는 이제 분명히 알았다. 자기 이모부 뿐 아니라 원로원 의원이라든가 토포로프, 그리고 각 부처의 깨끗하고 단정한 의복을 입은 관리들이 무고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생에 대해 염려하기 보다는 오직 사회의 위험인자를 없애는 데만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이 때문에 죄없는 한 사람을 벌주지 않기 위해 열 사람의 죄인을 용서한다는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는 어긋나는 썩은 것을 잘단하기 위해 상하지 않은 것까지 자르고 만다. 그리하여 위험한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열사람도 죄목을 만들어 처벌하는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죄수들과 가진 교류를 통해, 또 변호사며 소장, 감옥의 사제가 들려준 이야기와 죄수들의 수기 등을 보고 일반 범죄자로 불리는 이들을 다섯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제1은 방화범으로 수감돼 있는 메니쇼프라든가 마슬로바와 같이 오심(誤審)으로 무고하게 처벌 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서 7퍼센트 가량 될 것이라고 감옥의 사제는 말하고 있지만,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특히 그들의 환경이었다.

  제2는 분노라든가 질투심, 아니면 취기 등이 어떤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전체 범죄자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실 이들을 재판하여 구형하는 재판관들도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역시 그런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 분명했다.

  제3은 자신들은 자기 행위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법을 내세워 범죄행위로 단정하여 수감된 이들이었다.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화전민이라든가 교회의 재물을 빼내는 신앙심 없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제4는 정신적인 면으로 일반 사회의 평균 수준 보가 우위에 있는 사람들로써 수준이 높다는 이유로 이들 부류에 낀 사람들이다. 분리파 교도나 독립을 위해 폭동을 일으켰던 저 폴란드 인이나 체르케스인들, 또 반정부 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 받는 사회주의자며 동맹파업에 참가했던 정치범들이 이들이어다. 이 중엔 사회의 상류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제5는 사회에 대한 범죄자의 죄보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어었다. 돗자리를 훔쳐 들어온 젊은이를 위시해서 네흘류도프가 감옥을 드나들면서 만날 수 있었던 수 백명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유혹과 질서 속에서 올바른 판단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사회가 이들이 죄를 범하게끔 사회 규율의 테두리 밖으로 내몬 것이다.

 

  다 같은 인간이면서 무슨 권리로, 무슨 이유로, 누군가를 구속하고 핍박하고 유형을 보내고, 때리고 죽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그가 얻은 해답은 오직 이론적인 것 뿐이었다. 인간은 자유자재로 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가? 두뇌라든가 그 외 측정방법으로 그가 범죄형의 인간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는가? 범죄가 유전과 관련이 있는가? 도덕이란? 그리고 선천적인 부도덕성은 존재하는가? 열정, 타락, 인간의 습성이란? 기후, 음식, 무지, 최면술, 정욕 등이 범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사회이 책임이란? ......등등

 

  책에는 학술적이고 이론적이며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으나 동등한 인간이면서도 대체 무슨 권리로 누가 누구를 벌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다만 형벌의 필요성을 젠제로 하여 형벌과 이의 변호에 대한 이론만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호송 중에 숨이 찬다거나 더위에 못견디는 사람이 생기면 행진을 잠시 멈추고 잠시 나무 그늘로 가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같이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슬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아예 그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에 슬픔을 표하는 것까지 막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의무는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직무와 의무만을 중요시하여 이를 다른 사람들의 어떤 요구보다도 제1의 조건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잠시라도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애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면, 사람에 대해 죄를 지으면서도 결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어느 정도는 자기가 사상으로, 또 어느 정도는 타인의 사상으로 생활하고 행동하게 마련이다. 단지 어느 정도까지가 자기의 사상, 혹은 타인의 사상이냐에 개개인의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그의 너그러운 마음과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에 그녀에게 청혼한 것이었으나 시몬손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고,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마슬로바는 시몬손이 자기를 다른 어떤 여성보다도 우월한 정신적인 특질을 갖춘 여자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에게 어떤 특질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시몬손의 생각에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뛰어난 특질들을 마음 속에서 불러일으키려 애썼다. 이것은 그녀가 훌륭한 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러시아적이고, 농민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성을 갖춘 일반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생활방침을 버리고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어떠한 비인간적인 모독과 구타, 곤욕도 허용된다는 감옥의 새로운 사고를 익히게 된다.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니 자애심이니 하는 도덕성은 사실상 던져버렸으므로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체험을 믿는다.

 

  "여러가지 신앙이 있는 건 자기를 믿을 줄 모르고 남만 믿으려하기 때문이지. 나도 예전에 타인을 믿고 숲 속을 헤매듯 방황한 적이 있었소. 그야말로 미로를 벗어날 수 없었소. 구교도, 신교도, 토요안식교도, 편신교도, 몰로칸교도, 스코페스교도, 성직자 교도, 무직자 교도 등 모두가 제 자랑만 늘어놓지. 그러니까 앞 못보는 개처럼 헤맬 뿐이지. 영혼은 하나요, 종파는 무수하지만 나 뿐 아니라 당신에게도 저 사내에게도 영혼이 있소. 그러므로 자기의 영혼을 믿는다면 이 세상은 하나로 결합될 수 가 있는거요. 모두들 자기를 믿으면 일체가 될 수 있는거요."

 

  '너희는 지난 수세기 동안 죄인이라고 판결된 사람들을 수천 수만 처벌했으나 과연 죄인이 사라졌던가? 오히려 처벌에 의해 더욱 타락한 죄인과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예비판사, 교도관 등과 같은 죄인들로 하여 더욱 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고 있는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네흘류도프는 알게 되었다.

 

작품해설

  작품의 결말에서 민중출신 카튜샤는 다시금 민중을 향해 나아가고, 민중과 함께 했던 사람들 속에 녹아든다. 카튜샤의 원형이던 '로잘리야 오니'는 죽고 톨스토이의 여주인공은 새로운 삶 속에서 되살아난다. 불쌍한 로잘리야와 그녀의 운명에 관한 톨스토이의 펜 아래서 '민중이 어떻게 수난을 당하고 있는지'에 관한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서술로 변화된다.

 

2017.6.5. 휴가 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