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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청목, 1993.

햇살처럼-이명우 2020. 6. 23. 15:55

592.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청목, 1993.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삐예르에게 "이봐, 절대로 결혼 같은 것은 하지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 단언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리고 또 자네가 선택한 여자에 대한 사랑이 식어 그 여자의 참모습을 명백히 꿰뚫을 수 있게 될 때 까지는 결혼하지 말게. 그렇잖으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말테니까. 모두 하찮은데 허비되고 말거야."

 

  사교계에서는 '프러시아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육군대장 니꼴라이 안드레예비치 공작은 빠벨 1세(예까쩨리나 여제의 아들, 공포정치를 하여 1801년 궁정혁명으로 살해당함)의 치세 때 시골로 추방된 이래, 여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딸 마리야와 그 말 벗 부리엔느 양과 더불어 두문불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악덕의 근원은 두 가지, 게으름과 미신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미덕에도 활동과 지능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늘은 오후를 접어들면서 다시 활짝 개고, 하늘은 도나우 강과 그것을 둘러 싼 어두운 산들 쪽으로 눈부시게 멀어져 갔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저 산 저쪽에서 어쩌다가 나팔소리와 적의 외침 소리가 날아올 뿐이다. 중대와 적군 사이에는 얼마되지 않는 척후 이외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3백 사줴니 가량의 공허한 공간이 그들을 갈라놓고 있을 뿐이었다. 적군은 사격을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양군을 구분하는 엄숙하고 무서운, 그리하여 다가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하나의 선이 더 한층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생자와 사자를 가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 선'을 한 걸음 넘어서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나무와 태양에 비치어 반짝이는 지붕 저쪽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웬지 알고 싶다. 이 일선을 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어쩐지 넘어보고 싶다. 그리고 결국 우리들은 한 번은 이 선을 넘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삐예르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몰랐다. 그가 들른 마을은 원래 상업이 발달한 마을로서, 언제나 풍족해 보이지만 이 마을 농민들의 9할은 극심한 빈곤 상태에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또 그의 명령에 따라 젖먹이를 가진 아낙네들의 부역이 전면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다른 면에서 보다 더 괴로운 일을 강요받고 있음을 몰랐다. 그는 또 십자가를 들고 그를 맞았던 사제는 가지가지의 헌금을 모아들여 농부들을 괴롭히고 있고, 거기에 모인 생도들은 양친이 눈물을 머금과 내 준 것이며,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야 다시 넘겨받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또 그는 계획대로 석조건축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농민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서류상으로는 감소된 부역이 실제로는 도리어 증대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또 관리인이 그의 뜻에 쫒아 조세를 3분의 1로 감했다고 장부에 나타낸 마을에서는 그 대신 부역이 실제로는 이전의 갑절이나 늘어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삐예르는 소유지의 순회로 완전히 넋을 잃고 기뻐하며, 빼째르부르그를 출발했을 때와 똑 같은 박애적인 기분으로 돌아가 그 지도자에게 환희에 넘친 편지를 써 보냈다.

 

  '나는 젊음이 나에게 이토록 많이 느껴지는 동안에 내 자유를 써야겠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을 믿어야 한다고 삐예르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나도 지금은 그의 말을 믿는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매장시키란 말이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살아서 행복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자유를 사용하고, 자기는 지금 어떤 행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자신의 온 존재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실행하고 나자마자, 시간의 어느 순간에 수행된 그 행동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소유가 되고, 역사 안에서 그것은 자유를 잃은 선천적인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 면의 생활이 있다. 생활의 흥미가 추상적이면 그럴수록 더욱 자유롭게 되는 개인적인 생활과, 인간이 자기에게 정해진 법칙을 부득이 실행하는 집합적인  생활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생활하지만, 역사적이며 온 인류적인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단 행해진 행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행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사람의 무수한 행위와 합류하여 역사적 의의를 띠게 된다.

  왕은 역사의 노예다.

  역사, 즉 인류의 무의식적, 전체적, 집단적 생활은 왕의 생활의 온갖 순간을, 즉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세포질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식물학자와, 자기가 먹고 싶어서 떨어지도록 빌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나무 밑의 소년은 모두 옳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뽈레옹이 모스크바로 간 것은 그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멸망한 것도 알렉산드르가 그 멸망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옳기도 하고, 옳지않기도 한 것은 마치 백만 뿌드나 파헤쳐져 무너지고 만 것은, 마지막 광부가 곡괭이로 마지막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상의 사건에서 이른바 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 사건에 명칭을 주는 레테르이며, 레테르와 마찬가지로 사건 자체와는 가장 관계가 적은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제 멋대로의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은 모두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전체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일종의 식후의 기분이란 것이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 보다도 강하게 자기 만족감을 주고, 모든 사람이 친구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제8의 , 다른 여러 당파에 비해 1대99라는 비례를 나타내고 있는 가장 큰 집단은 전쟁도 평화도 전진도 방어진지도 황제도, 그러한 모든 것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 근본적인 것, 즉 자기를 위해 최대의 이익과 만족을 바라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총사령부에서 착찹하게 분규하고 있는 음모의 탁수 속에서 평시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어떤 자는 자기의 유리한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오늘은 쁘뿔리에게 찬성하는가 하면 내일은 그 반대자에게 동의하고, 그 이튿 날은 책임을 회피하고 다만 황제의 뜻에 들려고만 애쓰며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어떤 자는 사욕을 채우려고 전날 황제가 넌저시 비친 것을 큰 소리로 왜쳐 황제이 주의를 끌고, 회의석상에서는 가슴을 치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 끝에 반대자에게 결투를 청하기도 하여, 자기는 언제라도 공익의 희생이 되어 보이겠다는 태도를 나타내며 논쟁을 벌이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이 파의 사람들은 오직 돈과 훈장과 직위만을 원했으므로 그것을 찾기 위해 황제의 비위에 맞는 방향만을 노리고 있었다.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면, 위험에 직면하여 자기의 정신을 지배하는 재주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에 나가면서 가장 흥미가 있을 것 같은 문제 - 즉 당면한 위험만을 제외하고 그 밖의 온갖 것을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던 것이다.

 

  커다란 위험이 임박했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상 두 가지는 같은 정도이 힘으로 찾아든다. 한 가지는 위험의 성질 그것 자체를 고려해 넣은 결과 그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겠다는 이성적인 속삭임이다.

  다른 하나는 위험을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 괴로우며, 일의 결과가 눈앞에 빤히 보이는 이상 사건 전체의 진행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역전시킬 수 없을 때 위험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우니까 그것이 정작 눈 앞에 닥칠 때까지는 그 사건을 외면하고 유쾌한 것만을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이상적인 속삭임이다.

 

  승패란 승리란 "병사들의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거야" 안드레이

"전쟁이란 것은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승리가 돌아가기 마련이야."

 

  절대 포로를 잡지 말 것. 전쟁의 성격을 변하게 하고, 전쟁의 잔인성을 덜하게 하려면 이 길 밖에 없어. 우리는 실로 전쟁을 가지고 놀고 있었어......만약 전쟁에 관대함이란게 없다면 우리는 이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싸움터에 나오지 않게 될거야. 전쟁은 장난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더러운 사업이야.

  전쟁은 역시 전쟁이지 결코 어린애의 장난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란 것이 할 일 업는 사람들의 심심풀이가 되고 말거야......대관절 전쟁이란 무엇이고, 군사상의 성공에 필요한 것은 또 무엇이며, 군인 사회의 기질이란 것은 무엇일까?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전쟁의 도구는 간첩, 반역의 장려, 주민의 황폐,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강탈과 절도, 전략이라는 이름이 붙은 속임수와 거짓말이야. 또 군인 계급의 성격이란 것은 자유의 결핍, 말하자면 군기와 나태, 잔인, 무식, 음주, 방탕 등이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인은 최고의 계급으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으미 말이지. 그리고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자가 그만큼 더 많은 상을 타니까 말이지...... 내일이면 사람들은 서로 죽이기 위해 모여서 몇만이라는 인간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겠지. 그리고 그 뒤에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해서 감사의 미사를 올리고, 죽인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공훈도 큰 것 처럼 알고 승리를 자랑하게 되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과연 어떤 기분으로 그들을 보고, 그들의 기도를 들을까!" 안드레이가 삐에르를 보며 한 말.

 

  꾸뚜조프 장군은 오랜 군사상의 경험과 늙은이의 지혜로, 죽음과 싸우고 있는 몇십만의 인간을 혼자서 지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싸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명령도 아니고,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장소와 대포와 전사자의 수도 아닌, 다만 사기라고 불리는 종잡을 수 없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힘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자기의 권력이 미치는 한 그것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는 주민에 의해 태워졌다.

 

  온갖 현상의 원인을 종합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원인을 탐구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지력은 그 하나하나가 단독으로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현상의 무수한 조건의 복잡하기 짝이없는 연관성은 캐려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가장 알기 쉬운 것을 붙들고 이 것 이야말로 원인이라고 말한다.

 

  '공세를 취하면 질 뿐이라는 것은 그들고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내와 시간 - 이것이야말로 전투의 영웅인 것이다!' 꾸뚜조프 장군.

 

  모든 불행은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잉에서 나온다.

 

2017.7.29. 토.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