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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왕을 참하라,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下,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햇살처럼-이명우 2020. 9. 1. 17:39

616. 왕을 참하라,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下,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이는 순간부터 왜곡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역사책을 쓰는 저자들 또한 역사의 치부를 감추고 있고, 책을 보는 대중들 역시 치부를 보기 원치않아 역사책의 저자와 영합한다. 둘은 가장 커다란 역사왜곡의 공범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왜곡된 역사는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 모두의 가치관을 왜곡시킨다.

 

  백성 편에서 본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 할 나라였다. 사실 조선은 조일전쟁 전.후, 아니면 영.정조시대가 끝날 무렵 망했어야 했다. 

  조선은 중기에 들어오면서 사생결단의 당쟁이 피를 튀기며 아무런 비전없이 무기력하게 멸망을 향해 줄달음 쳤다. 조선은 조일전쟁 이후 멸망까지 약 300년 동안 25년간의 정조시대를 빼고는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는 왕조였다. 백성의 90%를 웃돌던 상민과 천민들, 그리고 서얼에게 조선은 정말로 개같은 나라였고, 그들은 아무 희망도 없이 한 줌도 안되는 양반들의 수탈과 억압 속에서 짐승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든 노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전쟁포로이거나 범죄자였고 타민족이었다. 동족을 단지 가난하다거나 출신 혹은 직업이 천하다는 이유로 짐승같이 취급해 사고팔고 상속하는 나라는 조선말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논쟁인고 하니,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효종(17대)이 죽은 후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또 효종비가 죽자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를 를 가지고 현종(18대) 재위 내내 10년이 넘도록 서로 악다구니를 써댄 것이었다. 미친놈들 같으니, 그 한심하게 보낸 세월 동안은 백성들을 위한 단 한 가지 정책도 제대로 세울 수 없었다. 

 

  현종의 비가 명성왕후인데, 그녀는 효종 때 활약했던 서인 김 육의 손녀다(고종(26대)의 명성황후와 다르다). 김 육은 인조(16대)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청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효종(17대) 즉위 후 충청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아 1653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했다. 또한 수레와 수차의 개발에 힘썼으며 상평통보 주조를 통해 화폐 경제가 뿌리 내리도록 하여, 실학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는 명재상이었다. 

  같은 서인이었지만 김 육과 송시열 사이에는 갈등이 컷다. 김 육은 현실주의를 추구하는 '한당'이었고, 송시열은 명분과 원칙만 추구하는 '산당'으로 둘은 서로 대립했다. 당파는 선조(14대) 때부터 결성되었으나 치고 박고, 서로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당쟁의 하일라이트는 현종(18대)를 거쳐 숙종(19대) 대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1683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박세채의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은 다시 한당과 산당으로 나뉘었으며,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분화되었다. 한당과 산당은 김 육과 송시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청남과 탁남은 유배 중인 송시열의 처벌문제에 있어서 강경파는 허목의 청남이 되고, 온건파는 허적의 탁남이 되었다. 

  당쟁이 더럽다고 중간에서 관망하는 사람은 양쪽의 타깃이 되어 사문난적 소리를 듣거나 역모에 얽히기 십상이었다. 분위기가 이러니 누구나 출사를 하려면 어디 한 군데 줄을 대지 않으면 출세가 불가능했고, 그 바람에 아무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임금도 없고, 백성도 없는 개같은 당쟁 때문에 조선에는 왕 같은 왕이 세종(14대)과 정조(22대)를 빼고는 더 이상 나올 수 없었고, 쓸만한 인재들은 당쟁의 와중에서 모조리 살육을 당해 조선은 몰락의 관성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1724년 경종이 죽자 31세인 연잉군이 영조(21대)로 즉위했다. 영조는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래 산 왕이었고, 그 바람에 재위 기간이 가장 길어 자그만치 52년 간이나 재위했다. 좌우간 부친인 숙종(19대)과 합치면 둘이 거의 1세기를 재위했다. 중종(11대)과 선조(14대)도 둘이 거의 한 세대가 아니고 한 세기를 즉위했는데, 두 분도 식사만 하시다 가셨다.  

  연조는 83세까지 살면서 52년 간이나 재위하여 조선 왕조에서 가장 장수하고 오래 재위한 왕이 되었으며, 인조(16대)에 이어 친아들을 죽인 두 번째 왕이 되었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쯤 되었는데, 83세면 다른 왕들보다 거의 2배를 산 것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가볍게 100살을 넘긴 것이다. 

 

  청의 4대 황제 강희제는 1667년 14세에 즉위하여 자그만치 61년 간이나 재위에 있었으며, 이 시기에 청의 국운이 치솟아 역사상 가장 강국이 되었다.

 

  세자(사도세자)가 죽어가는 시간에 장인 홍봉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왜 세자를 구하지 않느냐?"라며 울부짖는 윤 숙을 처벌하라고 영조에게 청했으며, 영조는 윤 숙을 해남으로 귀향 보냈다. 

  이렇게 세자가 뒤주 속에 있는 동안 세자를 동정했던 세자 측근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으나, 세자비 혜경궁 홍씨는 제 사내가 죽어자빠지는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밥 잘 먹고 지냈을 것이다. 제 아비는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죽을 것을 죽었고, 죽은 원인이 정신병으로 인하여 광포해져서 함부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초래된 사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21대) 17년에 태어난 이덕무는 정5품 통적랑 이성호의 서자로 경서에 해박했다. 그러나 서얼출신이었기 때문에 관로에 나아갈 수가 없었고, 집은 째지게 가난했다. 그의 호는 '욕심없이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물고기만 잡아먹고 사는 청렴한 물새'인 '청장'을 따서 '청장관'이었고, 도저한 학문에다 세태를 뛰어 넘는 고고함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냐? 언제나 배가 고팠다.

  이덕무는  이미 청넌기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공동으로 엮은 시집 <<건연집>>이 북경에서 간행되어 명성이 청조에 까지 알려질 만큼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정조(22대)에게 발탁되어 박제가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수 많은 서적의 정리와 간행에 종사했다. 이덕무는 관직에 있는 15년 동안 520회나 하사품을 받을만큼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정조는 나랏돈 500냥으로 그의 문집인 <<청장관 전서>>를 간행케 했으며, 그 아들에게 아버지의 벼슬을 그대로 내렸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있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정약용의 시론이다.

 

  왕소리 하기도 아까운 헌종과 철종

  강화도에서 뗄나무 장사하던 섬 촌놈 이원범이 정해짐으로써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발판은 철판같이 굳어졌다. 이원범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증손자였는데 왕실과의 촌수가 가물가물해서, 대신 중에서도 그런 애가 강화도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때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뿐이었는데, 그것도 요새같으면 잠깐이면 된다. 

 

  갑신정변(1884)

  김옥균등 개화파들이 일본을 다니면서 크게 깨달은 것은 첫째, 조선의 위생상태를 개선하고, 둘째 상업을 장려해야 하며, 셋째 도로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가 이미 19세기 말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사람과 가축의 똥오줌을 길가 아무데나 버려서 동네마다 똥냄새가 진동했다. 더구나 청계천은 완전 똥물이어서 감기로 코가 막힌 사람이나 코를 솜으로 틀어막은 사람이 아니면 그 일대를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위생적인 상태가 방치되어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18세기까지는 조선과 똑같이, 런던 테임스 강 주위의 주민들이 먹고 싼 똥오줌을 테임스 강에다 내버렸다. 그래서 테임스 강변에 있는 국회의사당에서 회의 한 번 하려면 회를 칠한 두꺼운 커튼을 창문에 쳐서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완전히 차단한 다음 마스크를 쓰고 회의를 해야 할 정도로 더럽기 짝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데 그건 18세기 얘기이고 지금은 19세기가 아닌가!

 

  또, 가마 대신 인력거를 동네마다 배치하여 운용토록 했다. 가마는 속도가 느려터진데다 안그래도 좁은 길을 다 차지했다. 인력거가 생겨서 교통소통이 엄청 원활해지자, 그 신속함과 편리함에 조선 백성들은 감탄했다. 만약 그 당시 독일에서 굴러다니던 벤츠나 영국에서 시간마다 떠나던 지하철을 탈 기회가 있었으면 아마 모조리 심장마시로 쓰러졌을 것이다.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 자동차는 독일의 칼 벤츠가 갑신정변 다음 해인 1885년에 개발했다. 그 직후 칼 벤츠가 벤츠 자동차를 세워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자동차로 뒤덮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박영효가 한성부 판윤이 되어 일을 제법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이를 떫게 본 민씨 일족이 그를 광주 유수로 좌천시켜버렸고 치도국은 폐지되고 일은 흐지부지되기 시작했다.

 

  필자는 몇 년 전 <월간중앙>에서 사학자, 기업가, 대학생 등 세 그룹으로 나누어 한국의 10대 인물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막상 위인은 빠지고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있어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이 한심한 데 매우 놀랐다. 

  을지문덕과 최무선이 빠진 것에 놀랐으며, 박승직, 이건희, 정주영, 백남준이 들어있는데 놀랐다. 아니, 얼마나 제 나라 역사를 모르면 수 천년 역사에 인물이 그렇게도 없어, 요새 우리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절반이나 된단 말인가?

무식한 인간들. 

물론 10대 인물에는 김옥균도 들어 있었다. 

 

  최초의 방탄복, 조선 장태

  대원군은 외세의 침입으로 서양 세력과 전투가 잦아지고 서양 총인 라이플의  위력에 조선 소총이 상대가 안되자 방탄복을 개발했다. 대원군이 아이디어를 낸 방탄복은 면으로 만들었는데, 탄환이 솜이불을 잘 뚫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막상 사용해보니 너무 무거운데다 둔하기 짝이 없었고, 거기다 여름철에는 착용이 불가능했다. 그 더운 여름철에 면이불을 몇 겹씩 휘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누가 입으려 하겠는가? 또 막상 입고 훈련을 하거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소나기라도 오면 그대로 꽝이었다. 방탄복 무게가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세계에서 방탄복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멕시코다.

 

  한국은 한국인이 보수성향과 현실안주 성향 때문에 개혁이 아주 어려운 나라다.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개혁주도 인물로는 고려의 묘청과 만적, 그리고 신돈, 조선에서는 조광조, 정여립과 홍경래, 최제우, 전봉준 등이 있고 대한제국의 김옥균도 있다. 이들 10명 중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개혁적인 인물들은 보수 기득권 세력의 장벽을 넘지 못했거나 외세의 개입, 또는 동지들이나 부하들의 더러운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시대와 불화한 인물들로 역사의 수레바퀴 방향을 바꾸려고 노력하다가 그 바퀴에 깔려 죽은 인물들이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부딪쳤던 시대의 나태를 일깨운 선각자들이었다. 

 

2019.5.29. 휴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