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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구본형, 휴머니스트, 2004.

햇살처럼-이명우 2020. 9. 10. 17:55

618.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구본형, 휴머니스트, 2004.

 

  자서전은 평범한 인간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내가 살았던 삶이며 동시에 내 속에 있는 그들의 삶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믿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가장자리에 존재했던 무수히 작고 개별적인 인간들이 증발해버린 역사학 '인간이 없는 인간에 대한 기술'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서는 자는 춤을 춘다. - 니체 -

 

  어쨌거나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가축이다' 그러나 반 밖에 길들여지지 않아 늘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한다.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현실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려주고 싶다. 그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 역시 한 때의 꿈보다 더 영속적이지 못하다. 인생은 결국 짧은 꿈이었다는 것을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부자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정한 기준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공허한 인생을 위로받기 위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한다. 

 

  젊은이들이 호전적인 도덕성을 들어 공격하면 그들은 비껴간다. 고귀하고 능숙하게 비껴가는 방법 가운데 최고의 것은 유머다. 유머는 일종의 여유와 휴식이다. 40대의 중년도 사회에 불만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표시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무능하고 부패한 권위체계의 일부이며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싸울 수도 없을 때 유머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다. 유머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환상적인 속임수다. 진실의 꾸며담일 수도 있다. 불가피한 것에 대항하는 부드러운 대응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정착하고 위기를 지나게 되자 변화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동안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정신적 작업은 사라졌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려낸 프로그램을 집행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유능한 변화 전문가가 아니라 튼튼한 근육을 가진 근면한 행정가였다. 변화와 관련하여 일단 사람들에게 할 일을 찾아주면 그 감독과 독려는 일반관리자의 몫이 된다.

 

  어느 조직도 필요한 사람은 떠나보내지 않는다. 어려울 때일수록 잡아두고 싶은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것이 '필요의 원칙'이다. 필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그 처신에 특별한 공유점이 있었다. 온갖 종류의 구조조정에도 상관없이 한 조직 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성장하고 싶다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략 이렇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이다.

  둘째, 그들은 적절한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그들은 늘 학습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대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단추를 끼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떠남으로써 남겨진 조직의 힘이 격감되는 사람들......그들이 바로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니체는 가장 위험한 조직원은 '그의 이탈로 조직자체가 파괴되는 조직원'이라 불렀다.

 

  프란츠 카프가의 <돌연한 출발>

 

  적극성, 수동성, 즉 유혹은 늘 설득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왔다. 경영학은 '유혹'이라는 싱싱한 단어를 죽은 단어, 즉 '마케팅'이라고 불러왔다.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고,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이고 덫이다.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두는 것이다.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 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모든 위대한 리더는 유혹에 능한 사람들이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 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 질 뿐이다. 

 

  경영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를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위와 자격증은 과거의 열광의 흔적일 뿐이다. 미래를 평가의 잣대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확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물로 된 항아리 속에 물을 담으려는 발상이다. 반대로 미래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바닷물 속에서 식수를 찾는 것과 같다. 온통 가능성의 물로 채워져 있지만, 아직 한 컵의 마실 물도 되지 못한다.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 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만이 전문가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고 같이 말했다. '1978년 4월 어느 날 오후에 야구를 보러갔다. 외야쪽 스탠드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타자는 첫 볼을 외야 2루타로 쳐냈다. 그 때 문득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갑작스런 계시 같은 것이었다. 이유도, 설명할 방법도 없다.'

 

  이유도 없는 우연한 흐름이 곧잘 필연적 운명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제 나의 20년 과거는 죽었다. 나는 그 과거를 차디찬 물속에 버리고 그 과거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제는 나는 꽃처럼 낙엽처럼 죽어 흘러가고 사라졌다. 나무들은 가장 추울 때 그렇게 서 있다.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2000년 봄에 새로운 세계로 떠나 왔다. IBM은 나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제2의 인생 속으로 들어갔다. 조직에게 양도했던 힘과 권리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평범함과 군중의 품을 떠나면서 외로워졌다.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내 안에서 '군주의 본능'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나라, 나의 세계, 나의 꽃을 피워야 했다. 그것은 겨울보다 더 추운 봉이었다. 그러나 꽃 터지는 봄은 왔다. 피워야 할 꽃, 만들어야 할 세계가 생긴 것이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슬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桐千年老港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 신흠(申欽), 衆村集, 조선 중기 문신(선조-광해군-인조) -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것이 갈등이 없는 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어울려 밤낮을 함께하니 갈등도 없고, 싸움도 없이 지낼 수는 없다. 나는 갈등에 대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 부른다. 갈등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있다.

 

  제임스 스톡데일, 빅터 플랭클, stockdale paradox, 월남 포로수용소, 비관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한편 앞으로는 잘 될거라는 굳은 신념으로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합리적인 낙관주의.

 

  나는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정도 글 쓰는 일에 몰두하는데, 이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대를 택했다.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따. 마치 모두가 버린 시간의 밭을 일궈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찾아내지 못했다면 영원히 잠 속에 묻혀버릴 뻔한 보물같은 땅이었다. 하루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두 시간이 거의 변하지 않는 내 작업시간이다. 이 시간을 제외한 시간은 늘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선적으로 열려있다. 

 

  삶의 우선 순위를 바꾸게 되자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차는 달빛을 타고 떠올라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달려갔다. 그리고 아주 다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다. 현실이란 그저 '지금 상황에 대한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의 견해일 뿐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갖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

 

  친구의 성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순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성공 속에는 늘 '그 동안 나는 뭘했나' 하는 자신에 대한 문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두움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심이 짊어져야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즐거움은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봄은 햇빛과 바람이다. 그것처럼 언땅을 녹이는데 효과적인 것은 없다. 땅은 빨래와 같다. 언것을 해동하여 물이 질펀해지면 바람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그러면 따뜻하고 약간 촉촉하거나 고슬고슬한 봄 땅이 만들어진다. 걸으면 발바닥에 봄 땅의 부드러운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이내 물이 오르고 대지는 온몸을 열어 속에 있는 것들이 나오게 해준다. 싹은 그 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천리향 꽃가게 화분

 

  자연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은 늘 같다. 먼저 우리를 감탄하게 하여 혼을 빼놓는다. 상상너머의 매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을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한 후 신의 음성을 불어넣는다. 이 아름다움이 보이느냐? 너의 초라함이 보이느냐? 네 마음속에 서식하는 그 벌레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느냐? 이 어리석은 것아. 우매한 미망의 어둠에서 나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숟가락으로 먹은 모든 것드은 똥이 아니더냐. 마흔이 넘게 살아온 긴 세월이 참으로 잠깐이고 꿈이 아니더냐. 다행히 아직 꿈이 끝난 것이 아니니 살고 싶은대로 살아라. 죽음이 널 데려갈 때 좋은 꿈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하여라.

 

  사람은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작고한 이오덕 선생이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은 왜 변화해야 하는가? 그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시작된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 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곽박(郭璞)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外師造化 中得心源)"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둘 충고다.

 

  G.K.체스터턴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낙엽은 나무의 지혜이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나무의 멋이다. 가장 장엄한 문명의 단편이 장례이듯이 낙엽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삶의 과정으로 창조해 낸다. 나무는 해마다 한 해의 삶을 기록한다. 한 겹의 나이만큼 줄기에 그 흔적을 남기고 두꺼워지고 키가 더 자라게 된다.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 의식이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1년의 삶이다. 내 책도 내 1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1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내 책을 남긴다. 책 한권이 쓰여지면 내 1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 해에도 똑 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 해의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하나의 씨앗처럼 날려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으로 가장한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는 잘알 수 없다. 오리진이 어디에 있든지, 분명한 진실은 나의 것이 된 생각들, 즉 이미 '내게 귀화한 생각'들이라는 점이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 로댕.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욕심이라는 암세포,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다. 

 

  가끔 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해야할 일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욕망이 꿈을 만들과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꿈은 또한 목적지다. '지금'이란 늘 그곳에 가는 길 위의 어느 지점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을 떠나 미래(꿈)로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그러나 정말 내 인생은 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에서 표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내 하루하루였다. 나의 하루들은 책으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물처럼 흘러갔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생각하고, 낭비되면서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초라한 순간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멀쩡한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해 불행하고, 약간의 손해를 보아 불행하고,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행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 불행하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지 못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원망한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심'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내 삶의 발자국이고,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 누구에게나 맞는 객관적인 삶의 의미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 이 유일무이한 구체성이 바로 내 삶이고, 따라서 그 의미 역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다.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찾기다.

 

  어느 날 잡초를 뽑다가 문득 잡초 역시 생명인데, 내가 생명을 죽인다는 생각에 움찔한 적이 있다. 생명을 죽임으로서 나는 자연에 반하고 있다. 갑자기 문명의 어원에 '재배하다. 양육하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은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다. 잡초 역시 번성하고 스스로 퍼뜨릴 권리가 있다. 인간은 그 권리를 인정해주기 않는다. 그래서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아 잔디를 보호해 준다. 지배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이것을 문명이라 한다. 잡초뽑기는 그러니까 문명인 셈이다. 

 

  우리의 육체가 거리낌없이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아이들은 커서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쳐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 숱한 상처들을 치유하고, 고달픈 일에서 벗어나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어느 경우든 집은 우리의 아늑한 밀실이다.

 

  호수 위에 오리가 있다. 새끼들도 몇 마리 어미 오리의 뒤를 따른다. 낙조가 지고 오리들은 호수 위에서 미끄러지듯 거닌다. 그때 오리가 있음으로써 호수의 그림은 완성된다.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처럼, 가슴 뛰는 일이 없을 때, 그녀에 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학습은 온몸으로 이루어진다. 온몸이 다 배움을 위한 촉수며 성감대다. 

 

  책과 학습은 우리를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로 만든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세상 속의 사람들과 만나게 하기도 한다. 학습을 통해 우리는 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돌연 자연이 속했던 사유의 세계를 떠나 전혀 이질적인 사유의 쾌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흘러간 시대의 흘러간 흔적이 지금 나를 깨우지 못한다면 나와 인영니 닿지 않는 것이다.(그 책은)

 

  학습은 어느 숙난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안는 것이다.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 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모방할 때의 요령이 두 가지라는 점에서도 사업과 글쓰기는 일치한다. 얼마나 많이 모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 어렵다. 

  열정과 가슴의 힘없이는 현장의 바람에 대항할 수 없다.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믿어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방의 또 다른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다.' 라는 충고를 기억하고 많이 보고 감동하는 것이 배움의 요결이다. 

 

  나는 개인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유를 기초로 내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았다.

 

  강연은 쏟아내는 작업이다. 쏟아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 보다 많으면 이내 밑천이 딸리게 마련이다.

 

  불행한 사람들만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을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변화는 달콤한 과정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화 속에는 늘 피의 냄새가 난다.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의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나는 청중 모두를 위해 강연하는 것이지만, 그 강연은 결국 그들 중 누군가를 위한 강연일 뿐이다. 그 강연은 우연한 만남, 우연히 듣게 된 소리에 불과하지만 마음의 문고리를 벗기는 운명적 순간이 되어 주어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치열한 사람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 

  "우연한 쏘시개 불꽃"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 "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갈 때는 내면의 등불을 밝히고 가야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등불이나 등대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여행은 우리 속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직 자신을 태우는 등불로 길을 밝혀야 한다. 

  막막할 때, 주저앉아 있을 때, 우연히 , 자신의 안에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무수한 군중이 있지만, 내 말을 듣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속에서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그 속에 불씨 하나를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즐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다. 모든 씨앗들에게 꽃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

 

  밤의 생각은 지나치게 자유롭고, 낮의 생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나는 새벽의 생각을 좋아한다. 새벽의 생각은 밤의 이상주의가 꿈으로 빚어낸 생각이고, 앞으로 다가올 낮 동안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다.

 

  나는 '트리맨(tree man)'이다. 바람이 불면 '쏴아' 소리를 내며 온 잎들을 있는대로 바람에 실어 날리는 소나무다. 봄이 되면 꽃을 주렁주렁 피우는 나무다. 여름 소나기 끝에 햇빛이 다시 쨍쨍해질 때 초록색 물방울을 달고 서있는 싱싱한 이파리로 뒤덮힌 나무다. 때가 되면 꽃보다 더 진한 단풍으로 깊어지는 나무다. 아 그리고 그 나무, 겨울 그 갈풍에 아무 소리않고 죽은 듯 서 있는 그 나목, 그것이 바로 나다. 나는 온몸 안을 꽃으로 가득 채운 채 꽃 터지는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위대한 것들이 다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나에게 고정된 우상은 없다. 나는 더 이상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이미 죽어버린 고민이다. 나는 배치하고 연결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 본다. 혹은 이것과 저것을 함께 접속하여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모든 것은 실험이다. 나를 실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험이고 탐험이다. 

  실패도 성공도 없다. 어쩌면 그런 단어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새로움으로 아침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내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 하루는 한 개의 꽃이다. 새벽에 망울을 달고 이내 만개하여 밤이되면 떨어지는 하루 꽃, 아주 새로운 하나의 유혹.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늘 가난한 부유함이 같이 있곤했다. 가난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한가의 문제에서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가 개인적 관심사였다. 

 

2019. 7. 3. 수요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