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8.
1. 기술적 도전
1. 환멸, 역사의 끝은 연기되었다.
2. 일,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땐 일이 없을지도 몰라
3. 자유,빅 데이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4, 평등 데이터를 가진 자가 미래를 차지한다.
2. 정치적 도전
5. 공동체,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6. 문명,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7. 민족주의, 지구차원의 문제는 지구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
8. 종규,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9. 이민, 더 나은 문화를 찾아서
3. 절망과 희망
10. 테러리즘, 당황하지 말라.
11. 전쟁, 인간의 어리석음을 절대 과소평가 하지 말라.
12. 겸손, 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13. 신,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컷지 마라.
14. 세속주의, 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4. 진실
15. 무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무지하다.
16. 정의,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17. 탈진실, 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18. 공상과학소설, 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5. 회복 탄력성
19. 교육,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다.
20. 의미,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21. 명상, 오직 관찰하라.
이 책에서는 지금, 여기의 문제에 주목해보려고 한다. 초점은 시사 현안과 인간 사회가 당면한 미래에 있다.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과 선택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물론, 70억 사람에게는 70억의 의제가 있다. 이미 말했듯이,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 해도 상대적으로 드문 사치다.
뭄바이 빈민촌에서 두 아이를 기르느라 분투하는 홀어머니의 관심사는 다음 끼니다. 지중해 한 가운데 떠 있는 배 안의 난민들은 수평선 위로 뭍의 신호를 찾느라 혈안이다. 런던의 초만원 병원에서 죽어가는 남성은 한 번 더 숨을 쉬기 위해 남은 힘을 다 짜낸다. 이들 모두에게는 눈 앞의 일들이 지구 온난화라든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문제보다 훨씬 다급하다.
1. 환멸.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혀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 속에 그린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 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려한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분야의 쌍둥이 혁명은 경제와 사회 뿐 아니라, 신체와 정신까지 재구성할 수 있다. 과거에 우리 인간은 바깥 세계를 지배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하지만 내부 세계에 대한 지배력은 미미했다. 댐을 짓고 강을 막는 법은 알았지만 노화를 멈추는 법은 몰랐다. 관개시설을 설계하는 법은 알았지만 뇌를 설계하는 법은 몰랐다. 모기가 귓속에서 앵앵거려 잠을 방해하면 모기를 잡는 법은 알았지만, 머릿 속에서 생각이 왱왱거려 밤잠을 설칠 때는 우리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죽이는 법을 몰랐다.
생명기술과 정보기슬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부 세계까지 통제할 수 있고 나아가 생명을 설계하고 만들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뇌를 설계하고 삶을 연장하고 우리의 생각도 임의로 죽이는 법까지 터득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유의 원이 확대되면서 또한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식 복지제도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자유도 어떤 류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잔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1990년대 초까지 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종언'을 반겼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시장과 정부의 복지서비스로 재단장한 자유주의 패키지야말로 여전히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패키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국경을 지우는 한편, 인류를 하나의 자유로운 지구공동체로 바꿔 놓을 운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허무주의적이다.
올리가르히(과두재벌)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 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침략이나 끔찍한 전복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병원과 강물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세기 초 자유주의 질서의 보호아래 경험했던 것 보다 더 큰 평화나 번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 보다 적었고, 기아로 숨진 사람이 비만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으며,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사망자 보다 적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지혜를 활용해서 갱신된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와 깨끗이 단절하고, 오랜 신이나 민족 뿐 아니라 근대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 마저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가 된 걸까?
현재 인류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떤 합의를 이루기란 요원해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환멸과 분노의 허무주의적 순간 속에 있다. 사람들은 옛 이야기에 대한 믿음은 잃었지만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다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첫걸음은 어둠의 예언을 진정시키고, 공황상태에서 당혹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공황도 일종의 오만이다. 이것은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 나쁜 방향이라는 것을 - 정확히 안다는 우쭐한 느낌에서 나온다. 당혹은 보다 겸허하다. 그래서 보다 명민하다. 만일 거리로 나가 "종말의 날이 왔다!" 라고 외치고 싶다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사실은 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야."
2. 일
정말 우리 앞에 끔찍한 격변이 임박한걸까? 아니면 그런 예측이야말로 근거가 희박한 신기술 반대자들이 보이는 과잉반응의 또 다른 예에 불과할까 답하기 어렵다. 자동화가 막대한 실업을 야기할거라는 공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현실로 닥치지는 않았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기계 한 종에 사람의 일이 하나씩 사라질 때 마다 새로운 일이 또 생겨났고,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극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 할 이유는 충분하다. 기계학습이야말로 확실히 판도를 바꿔 놓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유형의 능력이 있다.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이다. 과거 기계가 인간과 경쟁한 것은 주로 순수 육체적 능력에서 였다. 반면에 인간은 인지력에서 기계보다 월등하게 유리했다. 그 결과, 농업과 산업분야의 수작업은 모두 자동화되었지만, 인간에게만 있는 인지적 기술이란 학습과 분석, 의사소통, 무엇보다 인간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지만 AI는 이제 이런 기술에서도 점점 인간을 추월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 감정의 이해까지 포함된다. 우리는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을 넘어, 인간이 언제까지나 확고한 우위를 유지할 제3의 활동영역을 알지 못한다.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종,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에 날려보내는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온 정보를 분석하는데 최소 80명이 더 필요하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미 지금도 컴퓨터 알고리즘은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고객으로도 작동하고 있다. 가령, 증권거래소에서 알고리즘은 채권, 주식, 상품의 가장 중요한 매입자가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광고 사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객은 사람이 아닌 일개 알고리즘, 즉 구글 검색 알고리즘이다. 사람들은 이제 웹페이지를 디자인 할 때 어떤 사람의 취향부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의 취향에 더 신경을 쓴다.
알고리즘에는 의식이 없는게 확실하다. 인간 소비자와 전혀 달리 자신이 구매한 것을 즐길 수도 없고,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따라 구매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구글 알고리즘은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없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내부계산과 내장된 선호를 기반으로 대상을 고른다. 이런 선호가 점점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규정할 것이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은 아이스크림 판매자 웹페이지 순위를 매기는데 관한 한 대단히 정교한 취향을 갖고 있다. 가장 크게 성공하는 아이스크림 판매자는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구글 알고리즘이 최상위에 올려 놓는 사람이다.
3. 자유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이 문제를 두고) 국민 투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그렇지만 좋든 나쁘든, 선거와 투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게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묻는 것이다. 느낌에 관한 한 아인슈타인과 도킨스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느낌이 신비롭고 심오한 '자유의지'를 반영하고, 이 '자유의지'가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자유롭다고 가정한다. 아인슈타인,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문맹의 가정부 또한 자유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선거일에는 그녀의 느낌 - 투표로 표시되는 - 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계산된다.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 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
개인의 느낌과 자유선택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권위는 인간의 마음보다는 신법(神法)에서 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보다 신의 말씀을 신성시 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지난 수 세기 동안 권위의 원천은 천상의 신에게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이동했다.
조만간 권위는 다시 이동할 지 모른다. 이번에는 인간에게 알고리즘으로 말이다. 과거 신적 권위를 종교적 신화로 정당화한 것처럼 인간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유주의 이야기였다. 따라서 다가오는 기술혁명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바로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을 위태로게 할 수 있다.
이제 수십억명이 의미있고 믿을 만한 정보를 찾을 때 구글 검색 알고리즘을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신뢰하게 되었따.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대힌 우리는 '구글한다'.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 때 구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우리 자신의 정보검색 능력은 갈수록 감퇴한다. 오늘 날 이미 '진실'은 구글 검색의 최상위 결과와 동의어다.
무수히 많은 다른 상황에서도 인간의 감정은 철학적 이론을 이긴다. 이 때문에 세계가 보아온 윤리와 철학의 역사는, 이상은 훌륭하나 행동은 이상에 못미치는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실제로 상대를 관대히 용서하고, 얼마나 많은 불교도가 이기적인 집착을 초월해서 행동하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일상에서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가? 이는 자연선택이 호모사피엔스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도 감정을 사용해 재빨리 생사의 결정을 내린다. 우리는 분노와 두려움, 탐욕을 수백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이들 모두는 자연선택이라는 가장 엄격한 품질관리 시험을 통과했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결과주의 사상가들(행동의 옳고 그름을 결과로 판단하는 입장)은 임마뉴엘 칸트 같은 의무론자들(행동이 옳고 그름을 절대준칙으로 판단하는 입장)과 다른 입장을 고수한다. 테슬라가 차를 생산하기 위해 실제로 그런 얽히고 설킨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취해야 할까?
글쎄, 아마 테슬라는 그 문제를 그 문제를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해도 될 것이다. 그럴경우 테슬러가 생산하는 자율주행차량은 두 가지 모델이 될 것이다. 바로 테슬라 박애주의자와 테슬라 에고이스트다. 긴급 상황에서 박애주의자는 더 큰 선행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는 반면, 에고이스트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심지어 두 아이의 사망을 초래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러면 고객은 그 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철학적 견해에 맞는 차량을 구입할 것이다. 테슬라 에고이스트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테슬라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고객은 언제나 옳을 것이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2015년에 실시된 선구적인 설문조사에서 자율주행차량이 여러 명의 보행자를 치려고 하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제시된 적이 있었다. 응답자의 대부분은 그런 경우 주인이 숨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행자를 구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더 큰 선을 위해 주인을 희생시키도록 프로그래밍 된 차량을 구입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대부분이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이 사용할 차량으로는 테슬라 에고이스트를 택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자. 당신은 새 차를 샀다. 하지만 사용하기 전에 설정 메뉴를 열어서 몇 가지 항목을 표시해야 한다. 사고가 났을 때 당신은 차자 당신의 생명을 희생시키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다른 차량에 탄 가족을 숨지게 하기를 바라는가? 이런 선택을 당신은 하고 싶은가? 어떤 항목을 표시할지를 두고 아내와 벌일 논쟁만 생각해도 난감해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선택한다는 환상 속에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결정들은 이미 훨씬 전에 경제학자와 은행가, 기업인들이 만든 것이며, 이들은 상이한 선택지를 메뉴로 작성해 놓았다. 이제 수십년 이내에 정치인들은 AI가 작성한 메뉴에서 정책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을 거라고 가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능과 의식은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데 반해 의식은 고통, 기쁨, 사랑, 분노처럼 어떤 것을 느끼는 능력이다. 이 둘을 우리는 혼동하기 쉽다. 왜냐하면 인간과 다른 포유동물의 경우 지능이 의식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포유류는 느낌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컴퓨터가 문제를 푸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지금 아주 거대한 데이터 처리 메커니즘 안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산하며, 아주 효율적인 칩으로 기능하는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젖소는 좀처럼 인간적인 잠재력을 극대화 할 줄은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정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데는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터넷 연결속도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집중한다. 앞으로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다운그레이드된 인간이 업그레이드 된 컴퓨터를 오용하여 자신과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4. 평등
데이터를 가진 자가 미래를 차지한다.
세계화가 인류 다수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내부는 물론 사회들 간에도 불평등이 커지는 신호가 뚜렸해지고 있다. 세계화의 과실을 일부집단이 점점 독점해가는 반면 나머지 수십억은 뒤처져 있다. 이미 지금도 최고 부유층 1퍼센트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최고 부유층 100명이 최저 빈곤층 40억명 보다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점점 더 많은 데이터가 당신의 신체와 뇌로부터 생체측정 센서를 통해 스마트 기계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기업과 정부기관은 당신을 알고, 조종하고, 당신 대신 결정을 내리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모든 신체와 뇌의 깊은 메커니즘을 해독하고 그것으로 생명을 해독하고 그것으로 생명을 설계하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소수 엘리트가 그런 신과 같은 힘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싶다면, 인류가 여러 생물학적 계층으로 갈라지는 것을 막고 싶다면, 핵심인물은 이것이다. 누가 데이터를 소유하는가? 나의 DNA와, 나의 뇌와, 나의 생명에 관한 정보는 나에게 속하는가, 정부에 속하는가, 기업에 속하는가, 아니면 인류 공동의 소유인가?
5. 공통체 -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지난 세기 동안 기술은 우리를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우리는 우리가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 왔다. 대신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길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스위스에 사는 사촌과 이야기하기는 어느 때 보다 쉬워졌는데 아침식사를 할 때 아내와 대화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눈은 끊임없이 나대신 스마트폰에 가 있다.
6. 문명
오늘날 인류가 동질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면은 자연세계와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1,000년 전에는 몸이 아프면 어디에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했다. 유럽에서는 지역 신부가 십중팔구, 하느님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라며 건강을 되찾으려면 교회에 뭔가를 바치거나, 성지순례를 떠나거나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려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을의 마녀는 환자를 두고 악마에 씌어 그렇가면서 자신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검은 어린 수탉의 피를 뿌리면 나을거라고 했을 수도 있다.
중동지역에서는 고전적인 전통에 따라 배운 의사라면 몸의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잃었으니 적절한 식단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략으로 조회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할 지 모른다. 인도에서는 이유르베다 의술전문가가 도샤(dosha)로 알려진 세 가지 신체 구성요소들 사이의 균형에 관한 나름의 이론을 설명하고는 허브와 마사지, 요가자세를 통한 치유법을 처방할 것이다. 중국의 의원, 시베리아의 샤먼, 아프리카의 주술사, 아메리카의 원주민 치료사와 같이 모든 제국과 왕국, 부족에는 고유한 전통과 전문가가 있어서, 그들은 인간의 몸과 병의 본질에 대한 자기들 나름의 견해를 신봉하고, 그에 입각한 다채로운 의식과 혼합물과 치료법을 제시했다. 이 중 일부는 효과가 놀랍도록 좋았지만, 개중에는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것도 있었다. 유럽과 중국,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의료관행은 각각 달랐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있었다. 어느 곳이나 어린이의 최소 3분의 1이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평균 기대수명도 50세를 크게 밑돌았다는 사실이다.
7. 민주주의
현재 육류산업은 수십억의 지각있는 존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안기고 있을 뿐 아니라, 지구온난화의 주원인이자, 항생제와 독성물질의 주 소비자이며, 땅과 물, 공기의 주 오염자다. 2013년 영국 기계학회(IMechE)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소고기 1kg을 생산하는데 신선한 물이 약 1만5,000리터가 드는 반면, 감자 1kg을 생산하는 데는 287리터 정도면 충분하다.
더욱이 핵전쟁과 기후변화는 인류의 물리적 생존을 위협할 뿐인 반면, 파괴적 기술들은 인류의 본성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인류의 깊은 윤리적, 종교적 믿음에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핵전쟁과 생태학적 붕괴를 피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생명공학과 AI를 사용해서 인간을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관해서는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만약 인류가 전 지구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지침을 고안하고 집행하지 못한다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활개칠 것이다.
공동의 적은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최선의 촉매제다. 인류는 이제 최소한 그런 적수 셋 - 핵전쟁, 기후 변화, 기술적 파괴 - 을 앞두고 있다.
8. 종교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솔직히 말해 전통종교가 그토록 많은 영역을 뺏긴 것은 애당초 농사나 의료에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와 구루의 진짜 특기는 비가 오게 하거나, 병을 취료하거나, 예언하거나 마술을 부리는 것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들의 특기는 언제나 해석이었다. 사제는 기우제 춤을 추거나 가뭄을 끝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우제 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나, 신이 우리의 기도를 못알아 듣는 것처럼 보일 때도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 정당화 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치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제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 조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 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전 세계가 점점 단일 문명이 되어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무엇이든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
9. 이민
10. 테러리즘. 당황하지 말라.
테러범들은 심리조종의 대가들이다. 아주 적은 사람을 살해하고도 수십억 인구를 경악하게 하고, 유럽연합과 미국과 같은 거대한 정치구조물까지 뒤흔들 줄 안다. 테러범들은 2001년 9월11일 이래 매년 유럽에서 약 50명, 미국에서 약 10명, 중국에서 약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구촌을 모두 합치면 사망자는 2만5천명에 이른다. 반면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은 매년 유럽에서 약8만명, 미국에서 4만명, 중국에서 27만명 등으로 모두 합치면 125만명 가가이 된다. 당뇨병이나 높은 혈당수치 때문에 숨지는 사람도 연간 350만명이나 되고,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도 연 700만명에 이른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당분보다 테러리즘을 더 두려워하고, 집권당은 만성적인 대기오염이 아니라 산발적인 테러 공격 때문에 선거에서 패할까?
테러리즘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퍼뜨리는 방법으로 정치 상황을 바꾸려드는 군사전략이다. 이런 전략은 적에게 물리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는 아주 약한 일당이 주로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테러범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를 닮았다. 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찻잔 하나도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한 마리가 도자기 가게를 부술까? 파리는 먼저 황소를 찾아낸 다음 귓속으로 들어가서 윙윙대기 시작한다. 황소는 두려움과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바로 이런 일이 9.11 이후에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황소를 자극해서 중동이라는 도자기 가게를 파괴했다. 이제 테러범들은 도자기 잔해 속에서 번성하고 있다. 세상에 성마른 황소들은 널렸다.
테러범과 마찬가지로 테러와 싸우는 사람들도 군장군보다도 연극 연출가처럼 사고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테러리즘과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테러범의 어떤 행동도 우리를 무찌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패배를 안길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뿐이다. 테러범의 도발에 잘못된 방식으로 과잉대응하면 우리는 실제로 패하고 만다.
국가가 그런 테러범의 도발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은, 근대 국가가 생겨날 때 공공영역에서는 정치폭력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 위에 정당성을 두었기 때문이다. 재난은 아무리 끔찍해도 정치체제가 견뎌낼 수 있고 심지어 무시할 수도 있다. 정당성의 기반이 그런 것을 사전 예방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정당성의 기반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정치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 14세기 유럽에서는 흑사병 때문에 인구의 4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가 숨졌을 때도 왕이 권좌에서 쫒겨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무도 전염병 예방이 왕의 책무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에 통치자가 자기 영지에서 종교적 이단이 퍼지는 것을 방치하면 왕권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심지어 그 일로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11. 전쟁. 인간의 어리석음을 절대 과소평가 하지마라.
21세기에는 주요 강대국들이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뭘까? 한 가지 이유는 경제의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경제 자산이 주로 물질이었다. 따라서 정복을 통해 치부하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르기만 하면 도시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노예시장에서 팔고, 값나가는 밀밭과 금광을 점령해 곧바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로마는 포로로 잡은 그리스와 갈리아 사람들을 팔아 번영했고, 19세기 미국은 캘리포니아 금광과 텍사스 소목장을 점령해서 번창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래서는 푼돈 밖에 못번다. 오늘 날 주요 경제 자산 밀밭이나 금광, 심지어 유전도 아닌 기술적, 제도적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으로 지식을 정복한 수는 없다. 물론 IS 같은 조직은 여전히 중동지역이 도시와 유전을 약탈해서 - IS는 이라크의 은행들에서 5억달러 이상을 탈취했고, 2015년에는 석유를 팔아서 5억달러를 추가로 챙겼다 - 번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나 미국 같은 주요 강대국에게 이 정도 수익은 하찮은 금액이다. 연간 국내 총생산이 10조달러가 넘는 중국이 고작 10억달러를 위해 전쟁을 시작할 리는 없다. 만약 중국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수조달러를 쓴다면, 어떻게 그만한 비용을 다 갚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잃어버린 교역기회를 만회할 수 있을까? 물론 애플, 페이스북, 구글 같은 기업들의 가치는 수천억달러에 이르지만 이것을 힘으로 장악할 수는 없다. 실리콘밸리에는 실리콘 광산이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힘들 중 하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때가 많다. 정치인, 장군, 학자들은 세계를 거대한 체스게임으로 본다. 모든 수를 신중한 이성적 계산에 따라 둔다고 여긴다.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말이다. 역사상 지도자들 중에 말의 좁은 의미에서 '미친'사람은 드물다. 폰(pawn)과 나이트(knight)를 무작위로 옮기지는 않는다. 도조 히데키나 사담 후세인, 김정일이 둔 포석에도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세계는 체스판 보다 훨씬 복잡하며 인간의 합리성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이성적인 지도자들 조차도 대단히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말 때가 많다.
12. 겸손. 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13. 신.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묻는 질문을 받으면, 먼저 우주의 불가해한 신비와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한다. 이들은 "과학은 빅뱅을 설명할 수 없다."라고 운을 뗀다. "그래서 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마치 마술사가 카드 한 장을 다른 카드와 감쪽같이 바꿔치기 위해 관객을 속이는 것처럼, 우주의 신비를 재빨리 세상의 입법자로 대체한다. 알수 없는 우주의 비밀에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서 그 다음에는 그것을 어떻게든 비키니와 이혼을 비난하는데 활용한다.
우주의 신비와 세상의 입법자 간의 빠진 고리는 흔히 어떤 신성한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규제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우주의 신비 탓으로 돌린다. 신도들의 설명대로라면 그 책도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신이 지었다. 그 신은 어리석은 우리 인간을 깨우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내용은 주로 어떤 불가사의한 신전의 의식과 음식 터부에 관한 것이다. 사실은 성경이 됐건, 모르몬 경전이 됐건, 베다가 됐건, 다른 어떤 신성한 책이 됐건, 그 책이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의 제곱이며, 양성자의 질량은 전자의 1.837배라는 법칙을 결정한 것과 같은 힘에 의해 씌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아는 최선의 과학지식에 따르면, 이 모든 성스러운 텍스트들은 상상력이 뛰어난 호모사피엣늣가 쓴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선조가 사회규범과 정치구조를 정당화하려고 발명한 이야기일 뿐이다.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어떤 신화나 이야기를 믿을 필요는 없다.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만 기르면 된다. 어떤 행동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
14. 세속주의. 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15. 무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무지하다.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다. 탈식민주의 사상가들과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율성과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해 왔다. 행동경제학자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림짐작식의 손쉬운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우리의 감정과 어림짐작은 석기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 시대에는 한심할 정도로 부적합하다.
합리성 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 보다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마을이 협력해야하는 것처럼,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교회를 짓든, 원자폭탄을 만들든, 비행기를 띄우든, 어느 한 개인이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 할 수 있는 전례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고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 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 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를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쓸데없는 지식도 걸러낸다.
16. 정의.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도덕적 딜레마를 이해하려고 판단할 때 사람들은 흔히 다음 네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첫번째는 이슈를 축소하는 것이다. 가령, 시리아 내전을 마치 두 명의 수렵,채집인 사이에 일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두번째, 감동적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 분쟁의 복잡한 진상을 통계와 정확한 데이터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하지만 한 어린이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눈물 샘을 자극하고, 피를 끓게하고, 허위의 강한 확신을 불러 일으킨다.
세번째, 음모 이론을 짜는 것이다.
네번째, 도그마를 만들고,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나 제도, 우두머리를 믿고 어디든지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 날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적, 이념적 도그마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17. 탈 진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 <해리포터>를 비교한 것 때문에 또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오류들과 신화적인 요소들을 두고 성경은 설화가 아니라 깊은 지혜를 담은 은유적인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거야 <해리포터>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치의 선전 총책이자 아마도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미디어 마법사일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수법을 이런 말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한 번 한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지만, 천번을 반복한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가장 탁월한 선전선동가의 기술을 가졌다해도 한 가지 근본적인 원리가 머리 속에 즉각 떠오지 않으면 아무 성공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즉 몇 가지 요점만 한정해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날 어떤 가짜 뉴스 장사꾼이 이보다 나을 수 있을까?
18. 공상과학 소설. 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자아를 규정하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에 필요한 생존기술이 될 수도 있다.
19. 교육. 변화 만이 유일한 상수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 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 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학생들에게는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성(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됨에 따라, 기술이 나에게 봉사하기보다는 내가 기술에 봉사하게 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붙인 채 길을 스마트 폰에 얼굴을 붙인 채 길을 오가는 좀비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기술을 통제하는걸까? 기술이 그들을 통제하는 걸까?
20. 의미.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불안전하다. 하지만 실현가능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꼭 맹점이나 내적 모순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완전 무결한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 첫째, 내가 맡을 어떤 역할을 부여해야만 한다. 스타 영화배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에게 중요한 배역을 맡기는 대본만 좋아한다.
둘째, 좋은 이야기는 무한정 확장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 나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는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엇 안에 나를 자리매김함으로써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내 삶에 의미를 준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 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없이 유지된다. 기독교 이야기를 보자. 기초는 엉성하지 짝이 없다. 온 우주의 창조자의 아들이 2,000년 전 쯤에 은하수 어딘가에서 탄소기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런 일이 로마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처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그럼에도 전 지구에 걸쳐 막대한 기관들이 그 이야기 위에 세워졌고, 그 무게가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으로 내리누르는 덕분에 그 이야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려는 것을 두고도 전면전이 벌어졌다. 서유럽 기독교와 동방정교회 기독교도 간에 1천년 동안 계속된 균열은 최근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상호 살육전으로 표출되기도 했는데, 애초에 '필리오케(filioque : 라틴어로 '또한 성자에게서'라는 뜻) 라는 한 단어가 발단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안에 이 단어를 넣고 싶어 한 반면, 동방정교회 기독교도는 격렬히 반대했다.(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는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여기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궁금하면 구글에게 물어보라.)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개인적, 사회적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때로는 지반보다 지붕이 더 중요하다.
21. 명상. 오직 관찰하라.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괴로움은 고통과 전혀 다릅니다. 고통은 어떤 경험입니다. 주로 압력이나 열, 긴장 같은 다양한 감각들로 구성됩니다. 이 경험운 이따금 필요하고 심지어 유용할 때도 있습니다. 반면, 괴로움은 고통에 의해 촉발될 수도 있는 정신적 반작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많은 경험들로도 촉발될 수 있습니다. 쾌락도 괴로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이 거부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쫒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019.6.22.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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