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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왕을 참하라,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上,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햇살처럼-이명우 2020. 8. 28. 15:54

615. 왕을 참하라,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上, 청장 백지원, (주)진명출판사, 2009.

 

  역사는 승자가 쓴다. 그래서 역사는 쓰이는 순간부터 왜곡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역사책을 쓰는 저자들 또한 역사의 치부를 감추고 있고, 책을 보는 대중들 역시 치부를 보기 원치않아 역사책의 저자와 영합한다. 둘은 가장 커다란 역사 왜곡의 공범이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왜곡된 역사는 굴절된 거울과 같아 우리 모두의 가치관의 왜곡시킨다. 

 

  필자는 허구인 연속극을 보면서 역사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수 많은 딱한 민중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은 있으나 쉽게 집을 수 있으면서도 깊이와 철학이 있는, 진실의 역사서를 찾기가 쉽지 않은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들을 위해서, 그간 역사서 저자들에 의하여 가리워졌던 우리 역사의 치부를 모두 들추어내어 가감없는 역사의 진실에 접근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서를 쓰고 싶었다.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정해야 했는데,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국호 후보를 찾아보라는 이성계의 명을 받고 정도전은 기자조선의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을 명에 보냈고, 명이 '조선'을 선택해서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결정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이름을 타국에 물어 정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또한, 나라이름으로 뽑은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번국으로 생각되던 기자조선에서 쓸어다 쓴 것이고, 이는 명에 대한 사대의 극치였다. 심지어 명의 사신이 오면 왕이 수창궁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글을 받을 정도로 명이라면 사족을 못써 민족 자존에 큰 상처를 냈다. 명에 대한 사대는 명이 멸망한 후에도 조선왕조 500년 내내 계속 되었다. 결국 명과 청에 대한 사대의 결과가 고인물을 만들어 낸 조선은 역동성을 잃고 무기력하게 쇠퇘했던 것이다.

  사실 명은 개국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 많은 고려의 충신을 화장한데다, 고려 왕조의 후손인 왕씨들을 바닷 속에 처넣어 깡그리 용왕에게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초장에는 조선의 개국 세력을 영 떫게 생각했다. 물론 퍼주기 전 까지만.

  그러다보니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왕으로 승인 받지 못해 죽을 때까지 왕소리를 하지 못했고, 제3대 태종 때에야 비로소 왕에 책봉되어 왕 소리를 할 수 있었다. 

  명으로부터 왕으로 책봉받기 전까지 왕 소리를 한 것을 알게되면 박살이 났다. 그래서 왕 대신에 쓴 호칭이 '권지국사'였다. 

  조선에서 명에 보낸 사신만 해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 생일에 성절사, 동짓날에 동지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황실 경사 때 보내는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진위사 등이 있었다. 좌우간 명나라의 경조사를 제 아비 것보다 더 챙겼다.

  조선의 명에 대한 사대의 정도는 6.25 전쟁 후 미국에 대한 한국의 사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법과 제도, 의복과 학문 등 모든 것을 흉내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중국의 경서에 두었다. 명이 나중에 썩어서 멸망한 후에도 신흥 강국인 청을 배우지 않고 명의 연호를 계속 쓸 정도였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연호를 따서 명이 망한지 50년이면 '숭정 50년'하는 식으로 썼다. 물론 국서에는 청의 연호를 썼다. 

  이처럼 당시 세계문물의 중심이면서 명과 달리 속국인 조선에 대해 비할 바 없이 관대하던 청을 외면한 채, 망한 명에 대한 애착과 향수에만 매달린 조선은 갈수록 세계와 동떨어진 우물안의 개구리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활력을 잃어가다 무기력하게 멸망했다. 조선은 명이 망할 때 쯤 같이 멸망했어야 할 나라였다. 조선에게 명은 아비의 나라였고, 청은 오랑캐의 나라였다. 

 

  조선의 멸망원인

- 경쟁국이 없었다.

- 국시인 성리학의 폐단

- 감투 싸움의 극치인 당쟁

 

  12세기까지 미개하기 짝이 없던 유럽이 18-19세기 들어서서 일본을 제외한 전 동양을 식민지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총포개발에 명운을 걸어서였다. 전 영토를 합쳐봐야 중국만 하던 서유럽의 여러나라는 나라의 장래가 무기개발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범국가적으로 무기개발에 나섰다. 무기개발에서 뒤지면 주변의 다른 나라에 의해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 간의 무기개발 경쟁이, 화약의 발명국인 중국과 15세기 초 세계 화약무기 최강국이던 조선을 누르고, 그들을 식민지화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결국 동양에서 유일하게 강대국이던 중국과 중국의 안보우산 아래에서 500년을 편히 지내온 조선은 경쟁국 없이, 긴장을 모르고 느슨하게 연명하다 무기력하게 멸망한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 즉, 긴장은 삶의 활력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꾸라지를 공수할 때 그냥 공수하면 가는 동안 절반이 죽는다. 그러나 미꾸라지의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넣으면, 메기 배만 채울 미꾸라지 몇 마리만 희생되고 나머지는 모두 팔팔하게 살아서 온다.

 

다 믿을 수 없는 <<조선왕조 실록>>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 실록>>은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년) 동안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생활 등 역사적 사실이 총 망라되어 있다.

  실록은 왕이 죽고 난 뒤 후대왕이 작성하게 되는데, 사관들과 사초와 <<관상감 일기>>, <<춘추관 일기>>, <<승정원 일기>> 등을 참고해 편찬했다. 완성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봉안의식을 갖고 사고에 보관하는데, 편찬이 끝난 후에도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왕은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렇다면 실록에 있는 모든 기록은 진실일까? 그렇지는 않다. 자연히 후대 왕의 영향이 미쳤고, 당시 사관이나 실록 편찬자가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180도 달라졌으며, 사관도 자신의 역사인식이 있기 때문에 100퍼센트 공정하게 기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실록이 쓰인 후 '수정실록'이라는 , 먼저의 실록 기록을 부정하는 괴상한 책이 등장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광해군(15대)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에 불만을 품었던 서인들이 인조반정 후 <<선조수정실록>>을 다시 만들었고, 남인들이 <<현종실록>>을 편찬하자, 서인들이 <<현종수정실록>>을 만들었으며, 소론들이 <<숙종실록>>을 만들자 노론들이 <<숙종실록보궐정오>>를 편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죽 살펴보면 먼저 실록을 부정하고 새 실록을 만든 인간들은 조선 당쟁사에서의 가장 오랫공안 정권을 잡고 또 가장 싸가지가 없던 서인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의 기록으로는 따라올 것이 없어 1997년 세계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 등재 <<승정원일기>>는 역시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와 '종' 의 차이

  삼국시대 후반의 임금들은 진흥왕(신라 24대), 의자왕(백제 31대) 등 모두 '왕'자를 붙였는데, 고려로 넘어오면서 태조(고려 1대), 혜종(고려 2대) 등 '조'와 '종'자 붙은 임금들이 출현했으며, 이런 현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와 '종'은 죽은 왕의 시호에 붙이는 자였다. 왕이 죽고 3년 상을 치른 후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때 생전의 치적을 나타낼 수 있는 한 자 짜리 시호를 만든 후 그 뒤에 '조'나 '종'을 붙였다. 치적은 커녕 별볼일 없이 밥값도 못한 왕들에게는 혜, 인, 평, 소, 정, 애, 유, 준, 중 등 어정쩡한 글자를 적당히 붙였다.

  조선 왕은 모두 27명이었는데 '조'자가 붙은 왕이 7명, '종'자가 붙은 왕이 18명, '군'자가 붙은 왕이 2명이었다. 광해군(제15대)이나 연산군(10대) 같이 쫒겨난 임금은 임금이 되기 전 칭호인 '군'으로 썼다. 

  원래 '조'는 개국이나 국가의 환란을 극복하는 등 국가적인 변혁의 시기에 공을 세운 임금을 지칭하고, '종'은 그런 상황을 겪지 않고 덕치를 한 보통의 임금들에게 붙였다. 하지만 사실 공이나 덕이니 떠들어 봤자 조선왕조 27대 왕 가운데 밥값 한 인물은 3분의 1도 안되었고, 나머지는 요절했거나 한심한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조선 왕들을 보면 '조'자를 못 붙여 안달이었다. 그래서 그 자식들에 의해 종이 조로 바뀐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소인배 선조(14대)는 원래 선종이었는데 광해군이 선조로 고쳤고, 등신 같은 인조(16대)도 인종이었는데 인조로 바뀌었다. 그 뒤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도 원래 '종'자가 붙은 임금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조'나 '종'은 임금의 치적을 나타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양반들은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고 수 많은 작문법을 익혀 과거에 급제하면 중앙 관서에서 일을 보거나 지방 수령이 되어 임지로 갔다. 그런데 당시 지방 수령은 그 지방의 입법, 사법 등 삼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절대자였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잘 알고 있는 것은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 지식이 아니라 실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공허한 사서삼경의 경구와 시구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업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더러 처리할 수도 없어서 지방의 목민관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예전부터 그 지방에서 일해오던 아전들에게 기대게 마련이었다.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은 월급이 없는 희안한 직업이라서 목민관의 무지에 힘입어 권한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쥐어짰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 제도는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뒷받침 되어 있었다.

 

  조선의 붕당정치는 선조(14대) 때인 16세기 후반 처음 동인당이 결성되면서 18세기 말까지 200여년간에 걸처 이루어졌다. 조선 역사의 거의 절반이 당쟁으로 얼룩졌던 것이다.

  선조(14대) 7년인 1574년 오건이 이황의 문인인 김효원을 이조전랑에 추천하자 이조참의이자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이 이를 반대했다. 김효원이 사림이지만 간신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결국 김효원은 조정기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다음 해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를 반대하고 이발을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이 심해져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부인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했고, 심의겸은 서부인 정릉방에 살았으므로 서인이라 했다. 망국의 당쟁이 시작된 것이다.

 

  유교국가인 조선의 정수이자 양반, 사대부들인 사림파가 정권을 잡은 기간이 모두 250년 정도 되는데, 그들이 평생을 기울여 성취하고자 했던 유학의 유산이 지금 다 어디에 남아 있는가?

  썩어빠진 사대부들이 벌인 당쟁의 와중에서 수 많은 아까운 인재들이 억울하게 죽어가 조선의 국력은 모두 소진되었다. 살아남은 놈들도 생기는 것 하나 없이 이빨이나 까면서 아무 결론도 없는 공허한 논쟁만 계속하는 바람에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던 것이다.

  청나라가 개국한 지 200년이 지날 때까지도 조선은 조청전쟁(병자호란) 때 항복하면서 이마빡에 피가 맺히게 '삼배구고두'한 모욕을 잊어 버렸다. 개뿔도 없는 주제에 청을 오랑캐라 업신여기고 멸망한 명에 대한 어리석은 향수 속에서 조선은 나태와 안일, 그리고 쇄국의 두꺼운 껍질 속에 묻혀들었다. 이렇게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 선진문물과 동떨어지고 세계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해 낙후한 끝에 결국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에 대해 그 잘난 양반, 사대부들은 대부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가뭄과 홍수가 그치지 않았는데, 조선은 그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었다. 즉, 거의 모든 논이 천수답이어서 비가 안오면 그해 농사는 그냥 박살이 나고 말았다. 논이 강이나 냇물보다 한 두 자만 높아도 물을 끌어들일 방법이 없어 등짐을 져서 물을 날라야 했으니, 경작지가 조금만 높이 있어도 그냥 하늘망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무논을 경작하지 않고 물이 덜 필요한 밭논을 경작할 수도 있었으나, 밭논은 무논에 비해 수확량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해 모조리 밭논으로 바꾸면 밥을 못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뭄이 들면 왕실에서는 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상을 왕창 잘 차려놓고 왕이 직접 하늘에 기도하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올 확률은 카지노에 가서 잭팟이 터질 확률하고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내내 백성들은 기아에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세기말 개항 후 일본과 서양에서 양수기가 들어온 후 였다.

 

  조선 27대 왕 중 전기의 절반인 14대 왕 가운데서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5대), 단종(6대), 예종(8대), 연산군(10대) 등 4명 뿐인데, 그 중 문종과 예종은 일찍 죽었고, 단종과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났다. 초대부터 14대까지 정상적인 절차로 국왕에 올라 통치를 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보통 왕실에서는 세자가 9세~12세 정도가 되면 혼인을 시켰다. 열한살에 자식을 보고, 스물다섯살에 할아버지가 되었던 예종 같은 임금도 있었다. 세자비는 또래거나 대개 몇살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꼬맹이들을 한 방에 집어 넣으니, 처음에는 뭘 모르다가 나중에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세손이 태어나는데, 애들끼리 섹스해서 태어난 애가 정상일리 없었다. 대개 미숙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왕 중에서도 장자가 별로 없고 똑똑한 장자는 더 드물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자 마자 약 3만에 달하는 전국의 왕씨를 모조리 검거해서 재산을 압수한 다음 강화도와 거제도로 옮기게 했다가 모조리 바다 속에 쳐넣어 죽였다. 그 후에도 남아있는 왕씨들을 검거하여 섬으로 옮겨준다고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간 뒤,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모조리 수장시켜 버렸다. 극히 일부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田'씨나 '옥玉'씨, '신申'씨 등으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다.

 

  정몽주는 충신인가? 포은, 그는 은거한 적이 없다.

그는 개혁에는 찬성했으나 임금을 해하면서까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생각은 임금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해서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고, 우왕을 축출하고 공양왕 즉위를 찬성했으나, 고려왕실의 존속을 강력히 희망했다. 더구나 정몽주는 우왕(고려32대)과 창왕(고려33대)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조작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우왕과 창왕의 신분격하에 동참한 것은 그가 고려의 충신이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게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정몽주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그 후에야 임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임금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고방식의 차이가 정도전과 정몽주의 길을 정반대로 가게 만들었으며, 이성계와도 등을 지게 만들었다. 이색, 우현보 등과 연합한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미는 이성계와 치열한 권력쟁탈전 끝에 위기를 느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게 암살당하여 꿈을 접는다.

 

  역사상 제종 같은 임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에도 민란이 있었고, 천재지변으로 가난한 백성들이 해마다 늘었다. 하여간 우리나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역사상 한 번도 가난을 면한 적이 없었다. 

  1426년에는 서울에 방화사건이 일어나 2,200채의 가옥과 보신각으로부터 남대문으로 이어진 116칸 행랑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방화의 주모자인 장원만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437년에는 하남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조정은 강경진압을 피하고 폭도로 변한 백성들을 회유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그런데도 세종대는 태평성대로 불렸다. 참고로 15세기 초인 당시 조선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못먹은 데다가, 의료혜택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조선조 내내 5세 이하 어린이의 거의 50퍼센트가 질병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평균수명이 짧았던 것이다.

 

  백성들이 글을 알면 사대부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음창제를 무조건 반대했던 것이다.

 

  우리나르는 일찍부터 지성으로 사대하여 오직 중국의 제조문물을 중심으로 같은 글자를 써 왔습니다. 이러한 때에 지금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와 같이 되는 것은 분명히 큰 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최만리-(신석조, 김문, 정찬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반대상소)

  

  지금 이 언문은 신기한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 뜬 것이고, 새로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과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한글의 대중화

  1894년11월 고종은 '법률 칙령은 다 국문을 본으로 삼고 한문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한다. 언문 ->국문 한글의 위상을 격상시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450년 만에 한글이 조선의 전면적 표기수단으로 공인된 것이다. <독립신문-서재필 발행>의 순한글 발행은 한반도가 거의 2,000년을 한자문화 속에서 살다가, 한자가 공용문자의 자리를 내준 언어학적 대전환으로 기록되는 사건인 것이며, <독립신문>은 우리 문자사에서 한글사용의 기수가 되었다. 

 

  <독립신문>은 모두 4면으로 발행되었는데, 1~3쪽은 한글, 4쪽은 영문으로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은 순한글 발행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간 띄어쓰기가 없다가 우리 글의 명실상부한 띄어쓰기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이 얼마나 쉬운가? 세계 최강국 미국 국민 중 거의 20%가 영어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문맹이지만 한국에는 문맹이 거의 없다. 순전히 한글 덕이다. 

 

  유럽의 최신 시신처러법은 화장하지 않고 특수한 용기에 넣어 수분을 빼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는 70~80%는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수분을 빼고나면 작은 상자 하나 분량이 남는다고 한다. 이것을 조그만 종이 박스에 담아 나무 밑에 묻으면 더 이상 좋은 유기질 비료가 없다하니 백번 그렇게 해야될 것 같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연산군조 이후에는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여 신료들끼리 서로 주도권을 다투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붕당, 즉 당쟁이다. 이 붕당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아니고 왕권보다 우위에 선 신권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으로 조선 쇠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성리학이란 태평성대에는 쓸모가 있는 학문이겠으나 전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치면, 평소에 무를 천시하고 문관 우월주의를 지나치게 추종한데다, 또 지나친 명문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위기에 전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연산군의 업적 중에 국기일의 폐지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기일은 현충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죽은 왕과 왕비의 기일이 모조리 국기일이었다. 그러다보니 해가 지날수록 국기일이 늘어나 엄청난 폐단이 발생했다. 

  왕과 왕비가 죽은 날이 국기일인데, 한 왕에 왕비가 한둘이어야지. 국기일의 문제는 첫째, 그 날은 모든 대소관원들이 업무를 보지 말아야 했고, 두번째는 국기일에 치르는 상례에 들어가는 엄청난 경비 문제였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오늘은 누구누구의 기일이라 업무를 보지 않았다'는 구절이 거의 매월 한 두번씩 꼭 나온다. 세상에, 전쟁 중인데 국기일이라고 전쟁을 하다말고 쉬다니 한심한 생각이 절로 났었는데, 연산군 치세시에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쓸데없는 예산을 줄이기 위하여 과감히 국기일을 폐지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죽은 뒤 국기일이 도로 복원되어 이순신은 업무를 보고 싶어도 못보게 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연산군의 행적을 기록한 <연산군 일기>나 <중종실록>은 그를 폐위시킨 반정파에 의하여 씌어졌으므로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연산군 때의 인구는 대략 세종(4대) 때와 비슷한 1,000만명 정도 였다. 

 

  갑자사화 때(연산군 때) 등장한 형벌이 '쇄골표풍'이었다. 시체의 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형벌을 말한다. 조상 숭배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던 당시에 쇄골표풍은 제사를 지낼 근거마저 없애버리는 극악한 형벌이었다.

  한명회는 부관참시, 이세좌와 윤필상(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들)은 죽은 후 쇄골표풍의 형벌을 받았다.

 

  허균은 신지식으로 무장한 당대 최고의 국제적 인사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허균은 중국방문을 통하여 선진학문과 서학을 배웠다. 그는 두 번 중국방문 동안 자그만치 1만5천만냥이나 들여 4,0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을 구입해 들여왔는데, 모두 이단 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중에 유교경전 비슷한 것은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책 중에는 천주교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새도 4,000권이면 대단한 분량인데 17세기에 4,000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으면, 당시 국내에서 꼽히는 장서가에 들었을 것이다. 

 

  황진이와 서화담(경덕), 지족선사(30년 면벽, 파행)

  이매창과 허균

  허난설헌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게 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 

 

  조선 왕들 중에 형제를 죽인 태종(3대)이나 아들을 죽인 (영조, 21대) 같은 임금이 있었으나,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시원하게 싹쓸이한 왕은 인조 뿐이었다. 인조의 '인'자는 '어질 인'자가 아니고 '잔인할 인' 자라는 것을 알아둬라. 이 멍청한데다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는 재위 27년 동안 밥만 축내고, 두 번의 전쟁을 자초한 후 치적도 없이 그냥 갔다. 밥이 아깝다.

 

  만일 선진문물에 눈을 뜬 소현세자와 실리에 밝은 강빈이 즉위했으면 조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선은 광해군(15대)에 이어 벌써 두 번째 기회를 잃고 말았다. 하여간 기회를 위기로 만드는 한심한 인간들만 살아있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그저 뭐라도 좀 할 수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 것이 조선사였다. 

 

2019.5.11.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