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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클래식에서 리더의 언어를 배우다, 이지혜, 다연, 2017.

햇살처럼-이명우 2020. 8. 25. 17:29

613. 클래식에서 리더의 언어를 배우다, 이지혜, 다연, 2017.

 

  바흐는 1723년부터 1729년까지 무려 140여곡의 칸타타를 써냈다. 노쇠한 바흐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실명했다. 그가 흐려지는 시력에도 끝까지 펜을 놓치 않고자 했던 작품은 미완성 유작으로 남겨진 <푸가의 기법 Die Kunst der Fuga.BWV1080>이다. 푸가는 일종의 돌림노래로, 하나의 멜로디가 흐르는 와중에 다음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멜로디가 동시에 연주되면서 어우러지는데 이 영역이 대위법의 핵심이다. <추가의 기법>은 리듬 변형까지 더해지면서 음율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대위법의 초호화 버전이라고 할 만큼 최고의 기법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바흐가 알토파트에서 자신의 이름 BACH(시b-라-도-시)를 대선율로 적고 이야기를 펼치려던 지점에서 그의 펜은 영원히 멈추었다. 훗날 둘째 아들 카를 바흐가 완성했으나, 오늘 날의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바흐가 적은 음표까지만 연주한다.

  라이프치히에서 머물던 시기에 작곡한 대작 중 하나는 <마태 수난곡(Matthaes-Passion, BWV244)>이다. 이 작품은 완전히 잊힌 채 방치되던 중 멘델스존에 의해 부활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지휘자 겸 작곡가 멘델스존은 우연히 범상치 않은 악보를 발견하고 2년여 동안 공들여 리허설을 했다. 1829년, 다시금 <마태 수난곡>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어느 무명작곡가의 작품에 존경을 표시하며 열광했다. <마태 수난곡>은, 아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생을 마감한지 8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렇게 부활했다. 

  바흐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일깨워 주는 것은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넘어서 '노력의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흐의 악보는 BWV 1127번까지 기록하고 있다. 하루 한 곡씩만 듣는다고 해도 꼬박 3년이 걸리는 분량이다.

 

  스물여덟살 때 모차르트의 손은 기형이 되었다고 한다. 악기를 오랜 시간 연습하고, 작곡을 위해 늘 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천 번의 실험을 거쳐 전구를 만든 것일 뿐'이라고 말했던 에디슨과 같은 양상이다. 서럽도록 꾸준히 노력한 삶에 대해 그저 '천재니까'라며 당연한듯 여겼던 말씨 하나가 마음 한 구석을 부끄럽게 한다. 우리는 '천재'들의 노고를 진작 알았어야 했다.

 

  고독은 내면의 힘을 깨닫고 몰입하는 즐거움이며, 그 창조적 열기는 삶에 활력과 성장을 가져온다.

 

  인생의 어느 길 한가운데에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면, 주저않고 싶어진다면 <카르멘>을 들어보라. 옳은 길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도착한다. 비제처럼!

 

  헨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애칭은 '음악의 어머니'다. 그런데 그의 호방한 성격과 사업가적 기질, 독신 남자로써 화려한 여성 편력 등 '어머니'라는 애칭과 맞아 떨어지는 구석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헨델의 성정이나 업적에서 지어진 별명이 아닌게 분명해진다. 짐작컨데 동갑내기 바흐에게 '음악의 아버지'라는 존경어린 별명이 붙은 후라 극명하게 상대적 기질을 가진 헨델에게 붙인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바흐가 호모사피엔스형 음악가라면 헨델은 호모루덴스형 음악인이다. 바흐는 홀로 작곡하고, 홀로 연구하며, 홀로 가르치고, 홀로 합창팀과 기악팀을 연습시켰다. 심지어 생계에 좀 더 보탬이 되기 위해 교회 음악 작곡을 위해 익힌 라틴어 튜터까지 소화했다. 그러나 헨델은 일찍이 오페라 제작 과정을 여러 팀과 단계로 구분해 매뉴얼화 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오페라 제작의 매뉴얼화로 인해 효율성을 높인 것이다. 작곡에서는 지나치게 심오한 것은 배제하고 관객들이 좋아할 쉽고, 간단하며 반복이 많은 선율로 다가갔다. 결과적으로 헨델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재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오페라는 종합예술이다.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음악이 있어야 하고, 이를 연주할 악단과 노래할 가수, 작품을 뒷받침할 무대, 조명 등 다양한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전체적인 모습이 철저하게 기획되어야 하고 수많은 단원이 한 작품을 위해 상당기간 연습을 해야하므로 이들을 통솔하는 조직 관리능력도 필요하다. 여기에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실패했을 경우 책임자로서 짊어져야 하는 위험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헨델은 야심을 갖고 승부사로서의 기질을 과감히 발휘했다. 그는 성공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일에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고 다혈질에 급하기까지한 성미는 성공할수록 적을 늘리는 원인이 되었다. 급기야 그는 과로와 피로누적으로 쓰러졌다. 자기성찰에 철저하지 못한 결과는 처참했다. 

 

  삶에는 언제나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패배감에 움츠러들지 않고 재기의 노력을 기울이는 마음자세다.

 

  일명 '잘로몬 세트' 중 <교향곡 제94번 '놀람'>은 하이든의 재치와 유머가 담겨있다. 하이든은 연주회장에서 조는 런던의 귀부인들을 골탕먹이기로 했다. 하이든의 연주회장에서 조는 런던의 귀부인들을 골탕 먹이기로 했다. 그는 현악기의 경쾌하고 조용한 연주를 30초 정도 이어가다가 난데없이 팀파니 소리가 터져나오게 했다. 졸고 있던 부인들은 깜짝놀라 깨어났다. <교약곡 제94번 '놀람'>은 청중에게 놀라움을 주는 동시에 주제의 변주 기법을 잘 보여준다.

  영국왕실의 환대와 호응은 대단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그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영국으로 귀화해 30년 넘게 활동한 헨델로 받지 못한 영예였다. 그럼에도 하이든은 빈으로 돌아왔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The Creation)>를 작곡하는 데 열중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독일어로 해독하고 각 테스트에 해당하는 곡조를 정성껏 써 갔다. 예순여섯의 노작곡자는 마치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처럼 작곡에 임했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한 인간의 신앙과 삶과 음악적 역량이 하나로 응집된 느낌을 준다.

  <천지창조> 이후에도 하이든은 오라토리오 <사계(The Seasons)>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일흔 세살에도 현악 4중주를 계속적으로 써냈다. 일흔 다섯살의 나이에 노환들으로 작곡을 멈추어야만 했을 때 그는 "울고 싶을 뿐!" 이라며 탄식했다. 이 일화는 꾸준함과 위대함을 비례적 관계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말년까지도 자신의 음악에 감동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을 다해 작곡에 임했다. 평생에 쉼 없는 정진과 몰입은 그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0대 왈츠

  - 아침신문(1864)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1867)

  - 예술가의 생애(1867)

  - 빈 숲속의 이야기(1868)

  - 술과 여자와 노래(1869)

  - 천일야화(1871)

  - 빈 기질(1871)

  - 남국의 장미(1880)

  - 봄의 소리 (1882)

  - 황제(1888)

 

슈베르트

  고작 30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그가 써낸 무수한 작품은 모두 우리에게 배울거리를 준다. 생의 마지막 해인 1828년 3월, 슈베르트의 발표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험난하지만 가련했던 인생을 보상이라도 받듯 처음으로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1월의 어느 날, 장티푸스 진단을 받은 슈베르트는 "여기야! 여기가 나의 마지막 길이야!"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벨링크 묘지, 베토벤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슈베르트 최후의 명작은 세 개의 연가곡집을 꼽을 수 있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이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와 <겨울 나그네>는 모두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집이다. 뮐러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슈베르트 보다 3년 먼저 태어나 같은 해에 사망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태어나 베토벤 보다 고작 1년을 더 살다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의 엄청난 활약상을 소상히 알고 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동경했고 자신의 음악적 이상으로 여겼다. 같은 도시 빈에서 같은 시기를 살았음에도 둘 사이에 교류의 흔적이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슈베르트는 마지막 해에 교향곡 2곡, 오페라 5곡, 피아노 소나타 4곡, 가곡 150여곡, 미사곡 2곡과 합창곡 등을 썼다. 교향곡 성과만 보더라도 미완성을 포함해 모두 10곡의 교향곡을 남긴 대작곡가이다. 

  베토벤은 들을 수 없었기에 자연에 의지했고, 더 깊은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베토벤 이후의 음악계는 그의 교향곡을 출발점으로 삼아 더욱 크고 거대한 악곡들을 생산해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치는데 열중했다. 슈베르트 역시 교향곡과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그런 반열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남다름은 '특별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음악으로 옮기는 일에 열중한 것이다. 대부분의 작곡가가 자신의 이야기만 표출하고 있을 때, 대중의 목소리와 가슴 속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이가 바로 그였다.

  어느 시대에나 듣고자 하는 사람보다 말하고 싶어하는 살마들이 더 많기에 그가 돋보인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의 저자 레오버스카 글리아

'산다는 것은 죽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시도해 본다는 것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험은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감내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95세까지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치며 30여권의 경영에 관한 대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나태하지 않으며 항상 완벽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은 열여덟살에 본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덕분이라고 전했다.

  <팔스타프>는 베르디 최후 작품으로 여든 살에 완성했다. <팔스타프>는 베르디 오페라의 최고이며 동시에 가장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드러커는, 평균 수명이 쉰 살 내외이던 시절 팔순이 넘는 노장이 보여준 인간미에 대한 통찰과 완벽한 예술성에 충격과 감동을 받는 것이다. 

 

 

2019.1.26. 토요일 아침